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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명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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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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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1460호
흥천사명 동종
興天寺銘 銅鍾
Bronze Bell with Inscription of "Heungcheonsa Temple"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경복궁)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의식법구
시설 1구
지정연도 2006년 1월 17일
시대 1462년 (세조 8년)
소유자
(소유단체)
국유
관리자
(관리단체)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파일:흥천사명_동종.jpg
<colbgcolor=#ff8c00> 흥천사명 동종[1]

1. 개요2. 상세3. 구조4. 의의5. 외부 링크6. 보물 제1460호

[clearfix]

1. 개요

1462년(세조 8년)에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명으로 만든 .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0호이다.

2. 상세

흥천사1396년(태조 5년)에 조선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가 슬퍼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 인근에 지었던 절이다. 이후 태조는 1398년(태조 7년) 7월에 열린 우란분재[2]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8월에는 직접 신덕왕후의 천도회[3]를 열면서 스님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4] 태종은 즉위한 뒤인 1403년(태종 3년)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1408년(태종 8년)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나라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했다.

이후에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허물고 수리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12월에는 화재로 절이 전부 불 타 사리각만 남았고, 1510년(중종 5년)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 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1794년(정조 18년)에 정조의 명으로 현 위치인 성북구 돈암동 지역에 '신흥사(神興寺)'란 이름으로 절을 다시 복구했고, 고종 때 이름을 다시 '흥천사(興天寺)'로 되돌렸다.

흥천사에 있던 이 동종은 흥천사가 박해받던 조선 초 · 중기에 7대 임금 세조가 국가의 발원과 재력을 동원하여 1462년(세조 8년)에 만들어 달아준 종이다. 높이만 282cm에 이르는 초대형 범종으로, 흥천사와 불교에 대한 세조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도 효령대군, 임영대군 등 왕실 종친과 조석문, 김개 등 세조를 왕위에 올린 공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연산군중종 시기에 흥천사가 결국 폐사당할 때에도 이 대종만은 훼손당하지 않았다. 다만,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영조 시기부터는 경복궁 광화문에 걸려서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5] 그럳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1860년대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후에도 광화문에 걸려있다가 1910년에 창경궁에 있는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938년에 이왕가박물관이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자 동종도 같이 덕수궁으로 옮겨가 덕수궁 광명문에 걸렸다.
파일:흥천사명 동종.jpg
<colbgcolor=#ff8c00> 광명문에 걸려있던 흥천사명 동종
광명문(光明門)은 원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 남쪽에 있었는데 1938년에 일제가 멋대로 석조전 남쪽으로 옮겼다. 원래는 함녕전 권역의 대문이었던 광명문에 동종이 걸리고 자격루도 같이 전시되면서 그 역할을 잃었다.

문화재청2016년 광명문이 원래 위치해 있던 함녕전 남쪽 터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여 건물 유구를 확인했고, 2018년부터 2019년까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그에 따라 흥천사명 동종은 경복궁 경내 궐내각사 터로 옮겨져 현재 보존 처리 중이다. 다만, 흥천사명 동종을 원래 있던 곳인 흥천사로 보내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3. 구조

  • 종의 횡대와 문양대 사이에는 1462년(세조 8년)에 왕명으로 국가에서 흥천사용으로 제작한 사실이 명문으로 돋을새김되어 있고, 이어서 종을 제작할 당시의 분업 상황과 참여한 직제 등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또한 아름다운 유곽이 새겨져 있고, 광휘에 뒤덮인 채 합장하는 보살 상이 유려하게 입각되어 있으며 쌍룡 2마리가 판각되어 있다.

4. 의의

고려 때에 들어온 중국의 양식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양식이 섞여서, 조선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전통방식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후 조선에서 만들어지는 우리나라 고유한 범종의 모본이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왕실에서 왕의 명을 받아 직접 만든 것으로, 크기와 예술성 및 판각 기술 등이 매우 수준 높으며 이 종을 만들던 당시에 세조가 지녔던 숭불의식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5. 외부 링크

6. 보물 제1460호

흥천사종은 고려말부터 수용된 중국종적인 요소 가운데 한국 전통 종에서 보였던 형식과 요소가 가미되어 새로운 조선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다.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전기 범종의 하나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천사종은 다른 조선전기 범종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크기나 문양·주조기술의 탁월함 외에도 왕실에서 발원(發願)한 종이어서 각 분야의 관장(官匠)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어졌으며 명문(銘文)은 주성시(鑄成時)의 조직체계를 알려 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당시의 사회제반사항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1]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盂蘭盆齋. 영혼을 기리기 위해 스님들에게 음식을 바치는 의식.[3] 薦度會. 사망한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고자 실시하는 불교 의례.[4] 정확히는 신덕왕후처럼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정치를 좌지우지하려는 외척들에 대한 경계였다.[5] 임진왜란 때 불타고 흥선대원군 섭정기에야 중건된 경복궁 광화문이 어떻게 영조 시기에 있냐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광화문은 지금과 같은 육중한 문이 아니라, 경복궁 터에 경계를 두기 위해 옛 자리에 임시로 지어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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