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念彌陀道場懺法
1. 개요
조선 성종 5년, 1474년에 세조의 정실이던 정희왕후가 세종과 세조, 공혜왕후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불교 의식집. 대한민국의 보물 제949호, 1144호, 1165호, 1241호, 13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국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중국 원나라의 왕자성(王子成)이 처음 간행했던 불경으로 고려 우왕 대에 수입하여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쓰이고 있었다. 그러다 1474년에 세조의 비인 정희대왕대비의 후원에 의해 왕실 발원판(發願版)으로 나온 것이 이 예념미타도량참법이다.발원 내용은 자신보다 먼저 하늘로 떠난 공혜왕후 한씨, 세종, 소헌왕후, 세조, 의경세자, 예종 등의 극락왕생을 빌고 있다.
조선 초기 왕실에 의해 공식적으로 간행된 불경으로 이후 조선 전국 각지에서 간행되는 예념미타도량참법의 모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고인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조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 지닌 높은 불교 문화 포용성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예념미타도량참법 항목을 참조.
3. 보물 지정
3.1. 제94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 끝에는 1474년에 김수온이 쓴 글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 종친, 간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치밀하게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글을 쓴 사람, 그림을 그린 사람은 물론이고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한 사람도 모두 일류기술자들로 이루어진 조선 전기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실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글을 쓴 사람, 그림을 그린 사람은 물론이고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한 사람도 모두 일류기술자들로 이루어진 조선 전기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2. 제1144호
목아불교박물관 소장. 미타참법의 절차를 수록한 것으로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6에서 권10까지를 1권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33.4㎝, 가로 22㎝이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내는데 동원된 사람들이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고,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목판 인쇄기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내는데 동원된 사람들이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고,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목판 인쇄기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3.3. 제1165호
김영래(개인) 소장. 미타참법의 절차를 수록한 것으로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3-4와 권7-8을 1권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37.3㎝, 가로 23.6㎝이다.
간행에 관계된 기록은 없지만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 6-10(보물 제949호)과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보물 제1144호)을 비교하여 보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다. 이들 책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 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내는데 동원된 사람들이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고,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목판 인쇄기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그리고 조선시대 왕실에서 주관하여 펴낸 책 중에서 가장 정성이 깃들여진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간행에 관계된 기록은 없지만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 6-10(보물 제949호)과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보물 제1144호)을 비교하여 보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다. 이들 책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 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내는데 동원된 사람들이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고,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목판 인쇄기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그리고 조선시대 왕실에서 주관하여 펴낸 책 중에서 가장 정성이 깃들여진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3.4. 제1241호
직지사 소장. 나무에 새겨 찍어낸 권6∼10의 5권을 1책으로 엮었다. 간행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예념미타도량참법』권1∼5, 6∼10(보물 제949호)과 비교해 보면 판의 형식 등이 동일하여 같은 판에서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성종 5년(1474)에 세조비 자성대왕대비가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며, 왕실과 고승 및 당시 일류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써 있는 것이 보물 949호와 다르다. 이 책과 같이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는 책이 더러 있는데, 그 책의 발문(跋文:책을 간행한 동기 등을 적은 글)을 통해 성종 5년의 원본을 연산군 9년(1503)에 해인사에서 원본과 가깝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 해인사에서 다시 찍어낸 불경으로 판의 새김이나 인쇄상태가 처음의 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그 무렵 책들의 간행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되며, 서지학과 불교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성종 5년(1474)에 세조비 자성대왕대비가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며, 왕실과 고승 및 당시 일류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써 있는 것이 보물 949호와 다르다. 이 책과 같이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는 책이 더러 있는데, 그 책의 발문(跋文:책을 간행한 동기 등을 적은 글)을 통해 성종 5년의 원본을 연산군 9년(1503)에 해인사에서 원본과 가깝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 해인사에서 다시 찍어낸 불경으로 판의 새김이나 인쇄상태가 처음의 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그 무렵 책들의 간행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되며, 서지학과 불교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3.5. 제1320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고려 우왕 2년(1376)에 간행된 것으로 책 끝에는 박면타(朴免妥)가 쓴 발문이 있고, 다음으로 간행에 참여한 이단(李端) 등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시주를 담당한 상당군 한중례(韓仲禮), 완산군부인 최씨, 상당군부인 정씨 등의 이름이 보인다. 희귀한 판본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