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粉靑沙器 象嵌牡丹唐草文 獐本. 조선 세종 또는 세조 시기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분청사기 장군. 현재 경기도 성남시의 박영숙(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400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높이 20.2㎝, 입지름 6.9㎝, 밑지름 19.3㎝.조선 전기, 15세기 중엽에 상감 기법으로 제작된 분청사기 장군이다. 장군의 양측 면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조선 세종, 세조조 시기에 사용되던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승렴문(繩簾文)을 빼곡하게 시문하였고, 문양대에는 선상감(線象嵌)으로 커다란 당초문을 율동감있게 장식하였다.
고려 말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한국의 분청사기는 세종연간인 1418~1450년경에 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세조 연간을 주축으로 한 1450~1470년경에 최전성기를 맞았다.15세기의 도자기, 분청사기와 백자 특히 세조 재위 시기에 세조의 명으로 완성된 인화(印花) 분청사기는 당시의 불교중흥과 맞물려 극한의 세련됨을 자랑하였고 이로 인해 분청사기계의 백미로 통하고 있다.15세기 조선의 얼굴 분청사기
조선 세조 시기는 분청사기인화문귀대접, 분청사기인화문대접, 분청사기인화문바리 등 극도로 발전한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이다. 이 분청사기 상감모란당초문 장군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학계에서는 세종 재위 후반기 또는 세조 재위 시기에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1400호
분청사기 상감모란당초문장군은 측면이 완전한 직사각형에 가깝고 양쪽 옆면이 직선에 가까운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있어서 양감이 크고 듬직하며 무게감이 느껴지는 형태이다. 몸통의 듬직함과 같이 입술도 넓고 굵으며 굽다리도 완전한 직사각형으로 넓게 만들어 붙여서 전체는 크고 듬직하며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면에는 윤곽선이 굵은 모란당초문과 조밀하게 찍은 인화문(印花文)을 중심으로 가는 상감선을 사용하였는데 굵은 면은 더욱 굵고 듬직하게, 가는 선은 섬세하고 유려하게 새겨 넣어 강과 약의 조화를 꾀하였다. 문양은 넓은 몸통을 수직상으로 나누고 다시 구연부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나누었는데, 중심부에 가는 선상감의 당초문대를 내리고 좌우편에 간결한 선으로 윤곽을 두른 넓은 잎과 모란꽃을 좌우 대칭으로 면상감 한 후 옆면 둥근 마구리면은 인화상감을 조밀하게 찍어 넣었다. 굽의 안바닥에는 복부에 2∼3줄의 음각선이 있는데 이것은 음각하고 굽을 붙인 후 백상감을 한 흔적이다. 태토는 밝은 회청색이며 좁쌀만한 크기의 철분이 유층으로 튀어나온 상태이며, 유약(釉藥)은 얇고 투명하여 기포가 거의 없고 부분적으로 두껍게 뭉친 곳은 약간의 녹색을 띠며 불투명한 상태를 나타낸다. 전체에 결손 부분이 없는 완전한 작품으로 전면에 망상의 균열이 있고 백토분장은 순수하게 밝은 흰색이다. 특히 백토 상감된 부분의 균열은 매우 가늘고 조밀하게 나 있으며 부분적으로 유층이 탈락된 곳이 있다. 측면 마구리 한쪽을 밑으로 하여 받쳤는데 이면에 8개의 사질 내화토 비짐을 받쳤다. 저부 일부에 태토 균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약을 두껍게 바른 흔적이 남아 있다. 면(面)과 선(線)의 상감기법으로 모란문과 당초문, 그리고 인화문이 몸체 전면에 화려하게 시문(施文)된 분청사기로 유약이 굽 안바닥에 이르기까지 전면에 시유(施釉)되어 기형, 장식과 더불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안정감 있는 당당한 기형에 활달하고 대담한 문양, 섬세한 인화기법의 표현 등에서 15세기 분청사기 장군을 대표하는 예이며 도자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전면에는 윤곽선이 굵은 모란당초문과 조밀하게 찍은 인화문(印花文)을 중심으로 가는 상감선을 사용하였는데 굵은 면은 더욱 굵고 듬직하게, 가는 선은 섬세하고 유려하게 새겨 넣어 강과 약의 조화를 꾀하였다. 문양은 넓은 몸통을 수직상으로 나누고 다시 구연부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나누었는데, 중심부에 가는 선상감의 당초문대를 내리고 좌우편에 간결한 선으로 윤곽을 두른 넓은 잎과 모란꽃을 좌우 대칭으로 면상감 한 후 옆면 둥근 마구리면은 인화상감을 조밀하게 찍어 넣었다. 굽의 안바닥에는 복부에 2∼3줄의 음각선이 있는데 이것은 음각하고 굽을 붙인 후 백상감을 한 흔적이다. 태토는 밝은 회청색이며 좁쌀만한 크기의 철분이 유층으로 튀어나온 상태이며, 유약(釉藥)은 얇고 투명하여 기포가 거의 없고 부분적으로 두껍게 뭉친 곳은 약간의 녹색을 띠며 불투명한 상태를 나타낸다. 전체에 결손 부분이 없는 완전한 작품으로 전면에 망상의 균열이 있고 백토분장은 순수하게 밝은 흰색이다. 특히 백토 상감된 부분의 균열은 매우 가늘고 조밀하게 나 있으며 부분적으로 유층이 탈락된 곳이 있다. 측면 마구리 한쪽을 밑으로 하여 받쳤는데 이면에 8개의 사질 내화토 비짐을 받쳤다. 저부 일부에 태토 균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약을 두껍게 바른 흔적이 남아 있다. 면(面)과 선(線)의 상감기법으로 모란문과 당초문, 그리고 인화문이 몸체 전면에 화려하게 시문(施文)된 분청사기로 유약이 굽 안바닥에 이르기까지 전면에 시유(施釉)되어 기형, 장식과 더불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안정감 있는 당당한 기형에 활달하고 대담한 문양, 섬세한 인화기법의 표현 등에서 15세기 분청사기 장군을 대표하는 예이며 도자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