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11:51:33

금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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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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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구성4. 의의5. 관련 영상6. 외부 링크

1. 개요

錦溪日記. 조선 중기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의병 노인(魯認)이[1]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귀국할 때까지의 일을 기록한 일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31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전라남도 나주 사람인 노인은 17세에 진사에 급제한 향촌사족이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약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는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기도 하였지만, 그 외에는 지속적으로 권율을 도왔다. 권율과 함께 하동 진지에 있던 노인은 1597년 8월 10일 일본군이 남원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한 권율의 명으로 지원군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갔다. 명나라의 지원군과 조선군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접전을 치렀으나 8월 15일에 남원성은 함락되었고, 노인은 권율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가다가 화살에 맞고 쓰러져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잡혀가 축전주(筑前州, 지쿠젠), 풍전주(豊前州, 부젠)의 중진촌(中津村, 나카쓰), 이예주(伊豫州, 이요)의 부혈(浮穴, 우케나)을 거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번주(藩主)로 있는 살마주(薩摩州, 사쓰마)에서 억류 생활 중 한 차례 배를 타고 탈출하려다 실패한 후 화천주(和天州, 이즈미) 일근(日根, 히네)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화천주에서 만난 중국의 차관 진병산(陳屛山)과 임진혁(林震虩), 이원징(李源澄)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가는 배편으로 탈출을 시도하여 1599년 3월 17일에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푸젠성으로 갔다가 귀국을 승인받고, 베이징을 거쳐 1600년 1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때문에 노인의 금계일기는 다른 작자들의 일기와는 다르게 중국을 경유하여 고국으로 돌아옴으로써, 체험 공간이 중국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당시 전쟁에 한, 중, 일 3개국이 모두 참여하였으니 노인은 모든 임진왜란 참전 국가의 상황을 모두 경험한 것이다.

3. 구성

원래는 2년 5개월간 쓴 일기가 모두 내려왔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1599년 2월 21일부터 6월 27일까지, 4개월 7일간의 기록만이 앞과 뒤가 끊어진 채 남아 있다. 현전하는 부분에는 일본에서 탈출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탈출 성공까지의 상황과 중국에서의 생활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현전하는 부분에 이 탈출 과정이 생생히 담겨 있으며, 다른 작품에는 없는 중국체험 부분이 담겨 있고 양적으로도 풍부하여, 현전하는 부분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2월 21일에서 3월 16일까지는 일본에 억류된 상황에서 중국인들과 탈출을 준비하는 상황, 3월 17일에서 3월 28일까지는 중국으로의 항해 내용, 3월 29일에서 6월 27일까지는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중국인들과 교유하거나 중국의 문물들을 살펴보고 기록한 내용이다.

탈출을 준비하면서 노인은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지난 해에 중국배가 돌아갈 때에 조선 사람 3명이 그 배를 통해 탈출을 하려다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불안해 하고(1599년 3월 7일), 노인 등을 데려가기로 약속했던 중국 사람이 와서 데려가는 것이 어렵겠다고 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하기도 한다(1599년 3월 9일). 그러다 노인은 거룻배를 타고 섬에 나가있다가 일본인들이 중국 배를 수색한 후 섬에서 배를 옮겨 타는 묘책을 찾아내고(1599년 3월 12일), 1599년 3월 17일에 탈출에 성공한다.

중국으로의 항해는 긴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항해이다. 강항이나 정희득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짧게 서술한 데 비해, 노인은 중국으로의 항해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자신의 의지로 성공한 탈출 과정을 부각시킨다.

중국에 도착한 3월 28일부터 현전하는 6월 27일까지는 모두 중국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중국에 도착한 후 노인은 여러 중국 사람들과 교유를 하게 되고 그들의 부탁으로 시를 지어 준다. 그리고 글 재주를 인정받아 5월 12일부터 양현사서원(兩賢祠書院)의 강학에 참여하며 여러 중국인 수재들과 교유를 한다. 안정된 생활 속에서 노인은 중국 사람들과의 문답, 주고 받은 시, 토론한 내용 등을 일기에 기록하고, 중국의 풍경, 새로 접한 생물에 대해 서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여러 사람들과 교유를 하며 안정되게 지내는 듯하지만 고국인 조선으로 빨리 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작자는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다. 그리하여 빨리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글인 최귀문(催歸文)을 여러 차례 쓰게 되고 그 전문이 금계일기 속에 들어있다. 결국 노인은 4차례 최귀문을 쓴 후 5월 10일에 가을이 되면 보내 주겠다는 확답을 받게 되었다. 귀국이 확정된 노인은 안정된 상태에서 강학에 참여하고 학자로서 중국의 학문, 제도 등에 관심을 갖는다. 노인의 이러한 관심은 금계일기에 나오는 중국인들과의 여러 문답을 통해 잘 드러난다.

4. 의의

임진왜란 중에 일본으로 포로로 잡혀가, 중국으로 탈출하고, 다시 중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노인의 경험은 전쟁에 참여한 삼국을 모두 경험한 것에 의의가 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과정과 중국에서의 생활을 기록하고, 최귀문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글을 담고 있는 것은 금계일기가 갖는 중요한 가치이다. 또한 이 시기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노인이 죽은 뒤 약 200년이 지나서 후손들이 그의 일기와 시문을 모아 금계집을 간행하였는데, 거기에 금계일기에서 멸실된 전후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문집을 편찬할 당시까지는 멸실 부분이 없이 온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기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해외체험 포로실기의 대표 5대 작품인 간양록, 금계일기(錦溪日記), 만사록(萬死錄), 월봉해상록,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 중 하나로 어려운 고난의 시기에도 그 모든 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노력했던 선조들의 소중한 기록유산 중 하나다.

5. 관련 영상


6. 외부 링크



[1] 노인(老人)이 아니라 '노'(魯)씨성을 가진 '인'(認)이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