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奉使朝鮮倡和詩卷. 조선 세종 32년인 1450년에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이 주고받은 시 37편을 편철한 국가 시문집.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404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1450년 정월 1일에 중국 명나라에서 경태제의 등극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예겸이란 인물이 사신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약 1개월간 조선에 머무르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나눈 시문을 모은 것이다. 37편의 시 모두 당사자들이 직접 친필로 쓴 원간본이며, 각자 도장을 찍었다.중국인 예겸의 후손들이 보관하다 훗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기 쯤에 국내로 유입되었으며, 간송 전형필 등 여러 인물들이 소장해오다가 최종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1450년대 조선과 명나라 양국의 외교 상황을 연구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3. 외부 링크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 명나라 사신 예겸과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가 나눈 시를 모은 문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봉사조선창화시권
- 두산백과 : 봉사조선창화시권
- 한국어 위키백과 : 봉사조선창화시권
4. 보물 제1404호
봉사조선창화시권은 왕숙안(王叔安)이 전서(篆書)로 「봉사조선창화시책(奉使朝鮮倡和詩冊)」이라 쓴 제전(題篆)과 창화시(唱和詩) 본체 및 청(淸)나라 당한제(唐翰題)와 나진옥(羅振玉)이 쓴 발문(跋文)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明)나라 봉사(奉使)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인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사이에 서로 나눈 창화시(唱和詩)를 모아 권축으로 만든 것을 광서(光緖) 을사년(乙巳年)에 개장한 것이다.
이 시권은 명(明)나라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예겸이 경제(景帝, 1450∼1457 재위)의 등극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조선에 온 세종 32년(1450) 윤정월 1일에서 2월 3일 다시 압록강에 이르는 1개월간에 원접사인 정인지(鄭麟趾)와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간에 창화(唱和)한 시문(詩文) 중 37편을 추려서 엮은 것이다.
이 시권에는 시문의 찬자와 시권의 소장자의 도서(圖書) 수십 과(顆)가 날인되어 있다. 시문 찬자로는 예겸(倪謙)·정존(靜存)·예겸지인(倪謙之印)·한림시강사인(翰林侍講私印)·사원재필(詞垣載筆)·동각사관(東閣史官)·예씨자자손손기영보지(倪氏子子孫孫其永保之) 등 예겸의 도서가 가장 많다. 예겸은 이처럼 다양한 도서를 사용한데 비하여 정인지(鄭麟趾)는 인지(麟趾)·하동정씨(河東鄭氏), 신숙주는 숙주(叔舟)와 범옹(泛翁), 성삼문은 근보(謹甫)를 사용하는 등 1∼2개의 도서를 사용하고 있다. 이 외에 이 책을 감정하고 수장한 사람이 사용한 도서로 진기종(陳驥鍾)의 진기덕소보명적(陳驥德所寶名跡), 당한제(唐翰題)의 당한제심정(唐翰題審正), 나진옥의 송옹감장(松翁鑒藏) 등이 있어서 이 책이 예겸의 자손에게 전해오다가 진기종과 당한제를 거쳐서 다시 나진옥의 당풍루(唐風樓)로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권말에 추가된 1905년(고종(高宗) 광무(光武) 9)에 쓴 발문에서 나진옥은 이 책이 가흥당씨(嘉興唐氏)에게서 입수한 것이라 한 것으로 보아 당한제의 구장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축과 별도로 1958년에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일산(一山) 김두종(金斗鍾)·동주(東州) 이용희(李用熙)·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동창(東滄) 원충희(元忠喜) 6인이 이 책을 감정(鑑定)하고 그 결과를 한 장의 한지(韓紙)에 한문(漢文)으로 작성한 감정기(鑑定記)가 있어서, 이 책이 늦어도 1958년 이전에 국내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최근까지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의 진장(珍藏)에 속해 있다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자료는 당시의 대명외교(對明外交)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명(明)나라 봉사(奉使)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인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사이에 서로 나눈 창화시(唱和詩)를 모아 권축으로 만든 것을 광서(光緖) 을사년(乙巳年)에 개장한 것이다.
이 시권은 명(明)나라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예겸이 경제(景帝, 1450∼1457 재위)의 등극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조선에 온 세종 32년(1450) 윤정월 1일에서 2월 3일 다시 압록강에 이르는 1개월간에 원접사인 정인지(鄭麟趾)와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간에 창화(唱和)한 시문(詩文) 중 37편을 추려서 엮은 것이다.
이 시권에는 시문의 찬자와 시권의 소장자의 도서(圖書) 수십 과(顆)가 날인되어 있다. 시문 찬자로는 예겸(倪謙)·정존(靜存)·예겸지인(倪謙之印)·한림시강사인(翰林侍講私印)·사원재필(詞垣載筆)·동각사관(東閣史官)·예씨자자손손기영보지(倪氏子子孫孫其永保之) 등 예겸의 도서가 가장 많다. 예겸은 이처럼 다양한 도서를 사용한데 비하여 정인지(鄭麟趾)는 인지(麟趾)·하동정씨(河東鄭氏), 신숙주는 숙주(叔舟)와 범옹(泛翁), 성삼문은 근보(謹甫)를 사용하는 등 1∼2개의 도서를 사용하고 있다. 이 외에 이 책을 감정하고 수장한 사람이 사용한 도서로 진기종(陳驥鍾)의 진기덕소보명적(陳驥德所寶名跡), 당한제(唐翰題)의 당한제심정(唐翰題審正), 나진옥의 송옹감장(松翁鑒藏) 등이 있어서 이 책이 예겸의 자손에게 전해오다가 진기종과 당한제를 거쳐서 다시 나진옥의 당풍루(唐風樓)로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권말에 추가된 1905년(고종(高宗) 광무(光武) 9)에 쓴 발문에서 나진옥은 이 책이 가흥당씨(嘉興唐氏)에게서 입수한 것이라 한 것으로 보아 당한제의 구장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축과 별도로 1958년에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일산(一山) 김두종(金斗鍾)·동주(東州) 이용희(李用熙)·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동창(東滄) 원충희(元忠喜) 6인이 이 책을 감정(鑑定)하고 그 결과를 한 장의 한지(韓紙)에 한문(漢文)으로 작성한 감정기(鑑定記)가 있어서, 이 책이 늦어도 1958년 이전에 국내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최근까지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의 진장(珍藏)에 속해 있다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자료는 당시의 대명외교(對明外交)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