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22 12:57:41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wiki style="margin:-12px 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寶物
}}}

파일: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1.jpg
사진 출처 : 광주무등산박물관 -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보물 제131호

1. 개요

光州 證心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현 광주광역시 동구 증심사(證心寺)에 봉안되어 있는 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의 철조 불상. 현재 증심사(광주 동구 증심사길 177, 운림동)에 소재 중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파일: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3.jpg

불상 높이 90㎝.

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에 광주광역시 지역에서 만들어진 철제 비로자나불로, 본래는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전남도청 뒷편(구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위치한 대황사(大皇寺)라는 절터에 있었던 것이다. 광주시사(光州市史, 1966년)에 의하면, 대황사는 11세기경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후기까지 광주광역시의 주요 사찰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었으나 19세기에 유학자들의 손에 의해 불타 사라졌다고 한다.법보신문

본 불상은 통일신라기인 9세기에 광주광역시 지역에서 처음 제작된 후, 2백여년이 지난 11세기에 대황사로 이동해 천여년 간 모셔졌다가 19세기에 대황사가 불타 사라지자 한동안 빈 터에서 굴러다니던 중,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광주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증심사의 승려들이 버려진 불상을 추려 다시 모신 것이다. 아쉽게도 증심사 승려들이 찾았을 당시 불상의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이미 소실된 상태였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858년 제작),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 865년 제작) 등과 함께 9세기 신라의 철조공예품을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신라 하대에 유행한 철불의 대부분은 겉틀을 떼어낸 흔적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거칠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본 불상은 겉틀의 흔적이 일부분에서만 보이는 정도라서 당시 광주광역시 지역의 철 주조 기술이 매우 세련되고 수준높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파일: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2.jpg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철조 불상으로, 신라시대 광주광역시 지역의 철조공예술과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에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131호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높고 뚜렷하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어서 온화하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전체적으로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서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으며 양 팔에 걸쳐진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光州 證心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