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4:15:15

창경궁 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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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인화문이었으나 후일 폐쇄되고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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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383호 384호 385호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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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384호
창경궁 홍화문
昌慶宮 弘化門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 시대, 1483년 창건, 1616년 중건
파일:Honghwamun.jpg
<colbgcolor=#bf1400> 홍화문
파일:창경궁 홍화문 국립중앙박물관 수정.jpg
일제강점기 홍화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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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구조4. 특징

1. 개요

창경궁의 정문. 조선 중기에 만든 문이나 조선 초기 양식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84호이다.

고유의 아름다움이 일부 퇴색되기는 했지만,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2. 역사

파일:동궐도 홍화문.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 홍화문
1483년(성종 14년)에 창덕궁 옆 옛 수강궁(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거처한 궁, 1419년 창건)터에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지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중층(2층)이며 동쪽으로 향한 점이 특징이다. 창경궁 정전 명정전, 명정문과는 명목상 일직선상에 놓여있으나 실제로는 축이 맞지 않는다.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했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우고 있다.
  • 문의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위층 누간에 오르면 사면벽에 낸 판문을 통해 사방을 관망할 수 있다.
  • 상층과 하층의 공포는 모두 다포 양식으로 내3출목, 외2출목이다. 공포는 기둥을 받치는 부분 외에 기둥 사이에도 두었다. 명정전 공포형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명정전, 명정문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 동궐도에는 월대가 있지만 다른 궁궐의 정문들에 있는 월대와 달리 기단만 있는 형태이며 이마저도 현재는 일제강점기 이후 부터는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4. 특징

  • 조선 후기 특히 영조와 정조 시기엔 대민소통의 장소로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균역법을 시행함에 앞서 영조는 이곳에서 요즘의 공청회, 토론회를 가졌고 정조는 수원화성행차를 전후해 빈민들에게 쌀을 하사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1] 1층 기둥에 창경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