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15:44:05

창경궁 경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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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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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colbgcolor=#bf1400> 창경궁 경춘전
昌慶宮 景春殿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484년 (창건)
1616년 (중건)
1833년 (중건)
파일:창경궁 경춘전.png
파일:pal_ckk_pct09_ori.jpg
<colbgcolor=#bf1400> 경춘전[1]
1. 개요2. 역사3. 구조4. 여담

[clearfix]

1. 개요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경춘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 등을 볼 때, 대체적으로는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된 듯 하다.

이름은 성종 시기 창건할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을, '춘(春)'은 장수함을 뜻하니 옛날과 지금에 걸쳐 축복하는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2. 역사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지어졌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처음으로 거주했고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으며 다른 창경궁건물과 달리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다. 인조 때는 소용 조씨장남 숭선군부인간택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숙종 시기엔 왕도 머물렀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폐비되었다 복위된 후 잠시 이곳에서 거주하다 승하했다.#

영조 때는 효장세자숙종의 세 번째 왕비 혜순대비(인원왕후)가 거주했고, 나중에는 혜경궁 홍씨가 살면서 여기서 의소세손정조를 낳았다. 정조는 즉위 후 어머니를 자경전으로 옮겨 모셨고 자신이 태어난 이곳을 수리하면서 탄생전(誕生殿)이란 편액을 붙였다. 순조 즉위 후 혜경궁은 다시 경춘전으로 돌아왔고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조와 순조는 생모와 친할머니가 주로 머물던 경춘전을 굉장히 각별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경춘전의 역사와 부모에 대한 효성 등을 담은 《경춘전기》를 지었다.

이후 효명세자 부부가 사용하였으며, 세자빈 조씨(신정왕후)가 헌종을 이 곳에서 낳았다.#

1830년(순조 3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834년(순조 34년) 3월에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창경궁창경원이 되면서 유물 전시실로 쓰여 내부와 외형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2000년대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1층[2]으로 평면은 ‘一’자 형태로 되어있다. 기단은 장대석 2벌로 깔고 정면에는 5단의 계단을 1개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쇠서[3] 2개를 둔 이익공 양식이다.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를 두었다. 잡상은 놓지 않았다.
  •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4면의 가장자리 칸은 툇간으로 구성하였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대청 양 옆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분합문은 위, 아래 한지가 발라져있고 중간에 정(井)자 살 창문이 있는 모습이다.
  • 전술했듯, 일제강점기에 전시실로 쓰면서 외부와 내부가 변했다. 전부 마루가 깔렸고 모든 칸이 한 공간으로 트였다. 현재는 복원된 상태.
  • 대청 3칸의 정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단, 칸마다 가장자리에 난간을 두었고 가운데 칸의 난간 중간에 사람 한 명 정도가 지나다닐 공간을 두어 실질적으로는 가운데 칸으로만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뒷면엔 문이 없어 출입이 불가능하다.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창문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이다. 양 측면의 경우, 온돌방이 있는 2칸은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창을 놓은 뒤 나머지는 으로 마감했으며 서쪽(건물 뒤쪽) 툇간의 외면에는 창을 두고 중방 위를 벽으로 두었다. 동쪽 툇간의 외면은 벽 없이 교창과 문이 달려있는데, 원래 경춘전 측면에 가퇴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일:동궐도 경춘전.png}}} ||
<colbgcolor=#bf1400> 〈동궐도〉 경춘전
18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은 〈동궐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모습과 크게 다른 것은 없으나 몇 가지 차이를 보인다. 측면에 3칸 짜리 가퇴를 놓고 가퇴와 건물 주위에 쪽마루를 두었으며 쪽마루를 받치기 위해 하단부에 기둥을 두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다. 계단도 돌이 아닌 나무 사다리로 되어있으며 정면 뿐 아닌 측면에도 놓였다.

동궐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주위에 나무 판장과 행각, 등으로 독립된 영역을 구성하였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에 이른다.
  • 경춘전 현판건물 외부 말고도 대청 가운데에 하나 더 걸려있다. 바깥 현판과 마찬가지로 순조의 친필이다. 창경궁 내전 건물 중 이런 경우가 더러 있는데 대표적으로 통명전의 현판 역시 건물 안팎으로 2개가 걸려 있다.
  • 대청에 걸린 경춘전 현판 옆으로 왼쪽엔 정조가, 오른쪽엔 순조가 지은 《경춘전기(景春殿記)》가 걸려있다. 이 밖에도 대청 왼편에 윤집궐중(允執厥中)이란 편액도 걸려있다. 자세한 내용과 이미지는 이 포스팅을 참조.

4. 여담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경궁관리소.
[2]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3] 모양의 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