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05:54

창경궁 빈양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사모정 미확인 건물지 집춘문
대온실 관덕정
창덕궁 춘당지관풍각 국립어린이과학관
병경문 성종 태실 앙부일구
풍기대
관리사무소 월근문
함양문 건극당세답방수궁
영안문환취정자경전장고요화당통화전명광문
건인문 통명전양화당정일재집복헌영춘헌
여휘문여휘당 채원합소주방연희당연춘헌천오문만입문보정문 통화문
정양문연경당
경춘전환경전소주방장방수문장청
순역헌
풍순헌
함인정공목합수랏간
함안각
교태문영군직소
취명문 빈양문 명정전 명정문 옥천교 홍화문
보화문협문숭문당 문정전 문정문 영군직소
주명문누국오위도총부고문관주자소영군직소
낙선당 일영대 수문장청
저승전 진수당 군옥재계방등룡문 선인문
춘방사주문내사복시
시민당 +종묘수문암문
※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colbgcolor=#bf1400> 창경궁 빈양문
昌慶宮 賓陽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616년 (창건 추정)
1833년 (재건)
1986년 (복원)
파일:창경궁 빈양문.png
파일:창경궁 빈양문 2.png
<colbgcolor=#bf1400> 빈양문[1]
1. 개요2. 역사3. 구조4. 여담5.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창경궁 명정전후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정전의 후문 기능을 넘어 창경궁 내 합문(閤門) 역할을 했다. 합문이란 궁궐에서 행사공적 공간사적 공간의 경계로 설정된 문을 말한다.# 빈양문은 외전 일대와[2] 내전 구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합문을 두기 적절한 장소였다.

명정전의 서쪽[3]에 있으며 남쪽으로 숭문당과 붙어있다.

‘빈양(賓陽)’ 뜻은 ‘밝음(陽)을 공경히 맞이한다(賓)’이다.

2. 역사

파일:동궐도 빈양문.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 빈양문
정확한 건립 연대는 모르지만 기록에서 빈양문이 처음 등장하는 시점이 1616년(광해군 8년)인 것을 보아 이 무렵 진행했던 창경궁 중건 공사 때 처음 지은 듯하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불탄 것을 1633년(인조 11년)에 재건했다.

이후 주로 임금이 명정전으로 행차할 때 지나거나#, 장례 때 망곡례[4]를 행하고#, 발인할 때 재궁(梓宮)[5]이 나가는 공간으로 등장했다.## 이외에 영조가 문과 식년시에서 뽑은 54명을 이곳에서 만난 기록이 있다.#

그 후 1830년(순조 30년)에 다시 불탄 것을 3년 뒤에 복구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일제창경궁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 때 같이 철거했다. 8.15 광복문화재관리국에서 1984년에 발굴조사를 거쳐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가 높이 솟은 형태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 문짝은 나무 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장자리에 바로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본 기둥과 약간 간격을 두고 샛기둥을 세운 뒤 거기에 달았다. 가운데 이 다니는 어칸(御間)은 조금 더 높게 만들어 신하들이 다니는 좌, 우 (협칸)과 차이를 두었다. 협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는 나무 으로 마감했으며 어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 그리고 양 측면의 칸에는 중인방을 끼우고 나머지 공간을 역시 나무 판으로 막았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6]으로 입혔다. 바닥엔 전돌을 깔았다.

파일:빈양문 복도.png}}} ||
파일:빈양문 복도2.png
||
<colbgcolor=#bf1400> 빈양문과 명정전을 잇는 복도 <colbgcolor=#bf1400> 문정전까지 이어진 빈양문의 복도
명정전 뒷면에 가설된 툇마루까지 복도각을 연결하여 날씨에 상관없이 편하게 행차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복도는 문정전 뒷면까지 이어진다.

4. 여담

  • 합문은 고정된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현직 관료가 아니면 합문이 어딘지를 잘 몰랐다. 이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정조창경궁에 머물 때 한 신입 사관창덕궁의 합문인 협양문에서 을 기다렸다. 하지만 임금이 거기서 나올 리 없었고, 뒤늦게야 정조가 창경궁에 있는 것을 안 사관은 빈양문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부랴부랴 건너갔다고 한다.(...)##

5. 매체에서


[1] 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정전명정전편전문정전 구역.[3] 명정전은 동향했기에 뒷면은 서쪽이 된다.[4] 望哭禮. 시신이나 무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곡하는 예식.[5] 왕실에서 쓰는 을 말한다.[6]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2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2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