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나씨 묘 출토 편지 중 한 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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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2년 5월 대전광역시 유성구 금고동 안정 나씨 회덕파 종중 묘역을 이장하다가 발견된 한글 간찰 2통.조선 전기인 1490년에 나신걸(羅臣傑, 1461∼1524)[1]이 자신의 부인 신창 맹씨(新昌孟氏)에게 보낸 친필 한글편지이다. 후손들의 기증으로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나신걸 한글편지는 2023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2. 내용
출처 : KBS 뉴스 500년 전 배냇저고리·한글 편지 공개
2012년 5월에 대전 유성구 금고동 안정나씨 종중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미라 4기, 한글편지 2점, 기타 장삼과 의례용치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배냇저고리 등 출토 유물 약 150점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한글 편지 2점은 1490년에 안정나씨 회덕파의 파조(波朝) 6대손 나연종(羅蓮宗)의 둘째 아들인 나신걸이 지금의 함경도(1470~1498까지 영안도) 경성(鏡城) 지방에서 군관으로 복무하는 도중 아내인 회덕 온양댁 신창 맹씨에게 보낸 편지다.
한 통은 군관으로 부임해 가면서 부인 신창 맹씨에게 안부와 함께 농사와 소작 등의 여러 가정사를 두루 챙기는 내용이 들어 있고, 나머지 한 통은 당시 군관 등 남성들이 입던 포인 철릭을 보내달라는 이야기와 함께 자기 부인을 위해 분과 바늘을 사서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내용은 주로 군관으로 부임해갈 때 미리 집에 가서 당신과 가족들을 봐야 하는데 못보고 가니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 하며 애통해하거나, 군복무 도중 부인에게 분(화장품)과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며 울었다는 등 아내에게 보낸 사랑편지이다.
한글편지 두점은 모두 조선 전기인 1490년에 지어진 것으로 필사본이 아닌 친필 원본 한글편지 중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편지로 여겨지고 있다.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친필 한글편지로 여겨지던 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의 편지 192장보다 약 65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신걸 간찰 두 점(1490년)은 당시 훈민정음이 1443년에 창제되어 1446년에 반포되었기 때문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 후 얼마되지 않아 일반 민간에서 사용된 친필 한글 편지글이라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높다고 여겨지고 있다. 다만 나신걸의 집안은 생짜 평민 집안이 아니라 아버지 나연종(羅連宗, 1443~1488)과 동생 나문걸이 청산(현재의 옥천군 청산면) 현감을 지낸, 지방에서는 힘깨나 쓴다는 사족(士族) 가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2]
2012년 발굴 후 2016년 4월에 대전시립박물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중에 공개되었기 때문에 아직 관련 연구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전시립박물관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타국이나 이전 한국의 왕조에서는 사망한 인물이 권력 및 돈이 많은 왕실 인물이나 고위 귀족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 형편상, 또는 불교나 기독교 등 종교의 영향으로 시신을 화장, 또는 풍장해버리거나 간단히 매장하고 끝냈다. 반면 조선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일반 민간의 유생들까지도 생전에 사용하던 각종 부장품 및 의복, 편지 등을 다수 소장시켜 매장하였고, 또한 조선인들은 주자가례의 의식에 따라 관이 들어갈 자리 둘레에 엄청난 두께의 단단한 회벽을 둘러쳐 방수와 방충, 방부 효과를 극대화시켰기 때문에 다른 시대의 묘제 방식보다 미라, 복식 등의 유물 출토 비율이 매우 높다고 한다.
이는 타임 캡슐과도 같아서, 후손들에게 매우 귀중한 연구자료를 주는 점에서 정말 고마운 일이다. 다만 조상님들의 묘를 지켜야 한다는 문중들의 반발이 매우 심하기 때문에 오래된 조선시대 묘역을 여는 것은 몇몇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에 가깝다.
안정나씨 묘에는 두점의 친필 한글편지 외에도 150여종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 유물들도 1400년대 조선 전기의 민간인 유물들로 복식사, 풍속사, 미시사, 민속학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출토된 복식 중 일부. 출처: 대전광역시 공식 홍보 블로그 대전이 좋다
나신걸 한글편지는 그 가치를 인정 받아 2023년 3월 9일 보물로 지정됐다.
3. 전문
3.1. 원문
안부 그지업시 수업시 ᄒᆞ뇌 지븨 가 어마님미라 아기라 다 반가이 보고 가고져 ᄒᆞ다가 쟈ᇰᄉᆔ 혼자 가시며 날 몯 가게 ᄒᆞ시니 몯 가 ᄃᆞᆫ녀가뇌 이런 민마ᇰᄒᆞ고 셜온 이리 어ᄃᆡ 이실고 군과ᄂᆞᆯ ᄌᆞ마ᇰᄒᆞᆫ 휘면 내 ᄆᆞᄋᆞ모로 마디 몯ᄒᆞᄂᆞᆫ 거실쇠 가디 말라 ᄒᆞᄂᆞᆫ 거ᄉᆞᆯ 긋드리 가면 벼ᇰ조의셔 회덕 골로 ᄒᆡᆼ이ᄒᆞ여 자바다가 귀햐ᇰ 보낼라 ᄒᆞ니 이런 민망ᄒᆞᆫ 이리 어ᄃᆡ 이실고 아니 가려 ᄒᆞ다가 몯ᄒᆞ여 영안도로 경셩 군관 ᄒᆞ여 가뇌
내 고도 겹텰릭 보내소 게ᄂᆞᆫ 가면 ᄀᆞᄂᆞᆫ ᄇᆡᆨ뵈와 명디와 흔ᄒᆞ니 무명이 하 귀ᄒᆞ니 관워니 다 무명 오ᄉᆞᆯ 닙ᄂᆞ다 ᄒᆞᄂᆡ 무명 겹텰릭과 무명 단텰릭과 니블라 ᄒᆞᄂᆡ 모ᄅᆞ매 마니 ᄒᆞ여 설 쇠오디 말오 경셩오로 구디 ᄒᆞ여 드려보내소 옷 몬 미처 지을 양이어ᄃᆞᆫ ᄀᆞᄂᆞᆫ 무명을 마니 보내소 두 녁 그ᄐᆡ 투슈 텨 보내소 무명옷 이시면 게갠ᄃᆞᆯ 오시사 몯 ᄒᆞ여 니블가 민망ᄒᆞ여 ᄒᆞ뇌
모로매 ᄒᆞ여 보내소 길히 ᄒᆞᆫ ᄃᆞᆯ 길히라 ᄒᆞᄂᆡ 양식 브겅이 ᄒᆞ여 주소 모ᄌᆞ라디 아니케 주소 뎐디예 구실란 형님ᄭᅴ ᄂᆞ라 주소 ᄒᆞ여 구실 ᄃᆡ답ᄒᆞ소 공셰란 박 튱의 ᄯᆡᆨ긔 가 미리 ᄉᆞᆯ와 둣다가 공셰 회환ᄒᆞ소 ᄡᆞᆯ 디혀다가 두소 ᄯᅩ 골셔 오ᄂᆞᆫ 뎨역 주려 ᄒᆞ고 ᄎᆡ뎝ᄒᆞ여 주워ᄂᆞᆯ 완ᄂᆞ니 ᄀᆞᄋᆞᆯᄒᆡ 덩시리ᄃᆞ려 ᄌᆞ셰 ᄎᆞ려 바다 뎨역 츠라 ᄒᆞ소 ᄯᅩ 녹숑이사 슬거오니 녹숑이ᄃᆞ려 무러보와 저옷 ᄃᆡ답ᄒᆞ려 ᄒᆞ거ᄃᆞᆫ 뎨역글 녹숑이 맛다 츠라 ᄒᆞ소 녹숑이 저옷 ᄃᆡ답ᄒᆞ거ᄃᆞᆫ 골 가 ᄃᆞᆮ건녀 보라 ᄒᆞ소 쉬 비ᄎᆡ게 쉬 비ᄎᆡ게 소것 마니 달라 ᄒᆞ여 쇼쳥ᄒᆞ라 ᄒᆞ소
ᄯᅩ 뎐디 다 어우리 주고 녀ᄅᆞᆷ지이 마소 ᄯᅩ 내 오ᄅᆞᆫ 텰릭 보내소 미ᄐᆡ나 닙새 ᄯᅩ 보논 몰애 든 ᄃᆡ 가래질ᄒᆞ여 어우리 주고 ᄉᆡᆼ심도 죵의 말 듣고 녀ᄅᆞᆷ지이 마소 ᄯᅩ 내 헌 간사 텰릭 긔섀 주소 긔섀 오ᄉᆞᆯ 복경이 니펴 가뇌 ᄯᅩ 가래질ᄒᆞᆯ 제 긔섀ᄅᆞᆯ 보와 도옥ᄒᆞ라 ᄒᆞ소 논 가래질 다 ᄒᆞ고 슌워니 노하 ᄇᆞ리소 브리디 마소 구디ᄃᆞ려 니ᄅᆞ소 영동의 가 알외여 우리 논 인ᄂᆞᆫ 겨ᄐᆡ셔 경셩 군과니 ᄂᆡ월 열흘ᄭᅴ 드러오ᄂᆞ니 게 가 아라 ᄒᆞᆷᄭᅴ 내 옷 가져 드러오라 ᄒᆞ소 ᄯᅩ 모ᄅᆞ매 영동의 가 무러 그 군관과 ᄒᆞᆷᄭᅴ 드러오라 ᄒᆞ소 그 군과ᄂᆡ 일호미 니현죵이라 ᄒᆞᄂᆞᆫ 소니 ᄯᅩ 내 삼뵈 텰리기라 모시 텰리기라 셩ᄒᆞ니로 ᄀᆞᆯᄒᆡ여 다 보내소 ᄯᅩ 분ᄒᆞ고 바ᄅᆞᆯ 여ᄉᆞᆺ 사 보내뇌 지븨 가 몯 ᄃᆞᆫ녀가니 이런 민망ᄒᆞᆫ 이리 어ᄃᆡ 이실고 울오 가뇌 어마님 아기 뫼ᄋᆞᆸ고 다 됴히 겨소 ᄂᆡ년 ᄀᆞᄋᆞᆯᄒᆡ 나오고져 ᄒᆞ뇌
ᄯᅩ 다랑이 슌마니 ᄒᆞᄂᆞᆫ 노내 ᄡᅵ 열연 말 니필소ᄂᆡ 노내 ᄡᅵ 닐굽 말 손댱명의 노내 ᄡᅵ 단 말 쇼과니 ᄒᆞᄂᆞᆫ 노내 ᄡᅵ 단 말 구디 지에 ᄒᆞ던 노내 ᄡᅵ 단 말 니문 지에 노내 ᄡᅵ 여ᄃᆞᆯ 말 죵도리 ᄒᆞᄂᆞᆫ 노내 ᄡᅵ 여ᄃᆞᆯ 말 즌고래 노내 ᄡᅵ 열 말 ᄯᅩ 두말구레 바ᄐᆡ 피ᄡᅵ 너 말 뭇구레예 피ᄡᅵ 너 말 삼바ᄐᆡ 피ᄡᅵ ᄒᆞᆫ 말 아래 바ᄐᆡ 피시 ᄒᆞᆫ 말 닷 되 □ᄌᆡ ᄒᆞᄂᆞᆫ 바ᄐᆡ 피시 서 말 어셩개 믿 바ᄐᆡ 피시 서 말 허옴동이 어우리 ᄒᆞ던 보노ᄂᆡ 시 서 말 니레 뎨역 무명 반 필 ᄡᆞᆯ 넉 되 져ᇰ죠 나ᄅᆞᆨ 서 되 뎌ᇰ미ᄡᆞᆯ ᄒᆞᆫ 되 윗즁살이예 양식 맛다 되 콩 마 닷 되
회덕 오냐ᇰᄯᆡᆨ 가인ᄭᅴ 샹ᄇᆡᆨ 유무 벌▨ ᄌᆞ셰 즉재 다 받ᄌᆞᆸ소 ᄲᆞᆯ리 보내소
출처
내 고도 겹텰릭 보내소 게ᄂᆞᆫ 가면 ᄀᆞᄂᆞᆫ ᄇᆡᆨ뵈와 명디와 흔ᄒᆞ니 무명이 하 귀ᄒᆞ니 관워니 다 무명 오ᄉᆞᆯ 닙ᄂᆞ다 ᄒᆞᄂᆡ 무명 겹텰릭과 무명 단텰릭과 니블라 ᄒᆞᄂᆡ 모ᄅᆞ매 마니 ᄒᆞ여 설 쇠오디 말오 경셩오로 구디 ᄒᆞ여 드려보내소 옷 몬 미처 지을 양이어ᄃᆞᆫ ᄀᆞᄂᆞᆫ 무명을 마니 보내소 두 녁 그ᄐᆡ 투슈 텨 보내소 무명옷 이시면 게갠ᄃᆞᆯ 오시사 몯 ᄒᆞ여 니블가 민망ᄒᆞ여 ᄒᆞ뇌
모로매 ᄒᆞ여 보내소 길히 ᄒᆞᆫ ᄃᆞᆯ 길히라 ᄒᆞᄂᆡ 양식 브겅이 ᄒᆞ여 주소 모ᄌᆞ라디 아니케 주소 뎐디예 구실란 형님ᄭᅴ ᄂᆞ라 주소 ᄒᆞ여 구실 ᄃᆡ답ᄒᆞ소 공셰란 박 튱의 ᄯᆡᆨ긔 가 미리 ᄉᆞᆯ와 둣다가 공셰 회환ᄒᆞ소 ᄡᆞᆯ 디혀다가 두소 ᄯᅩ 골셔 오ᄂᆞᆫ 뎨역 주려 ᄒᆞ고 ᄎᆡ뎝ᄒᆞ여 주워ᄂᆞᆯ 완ᄂᆞ니 ᄀᆞᄋᆞᆯᄒᆡ 덩시리ᄃᆞ려 ᄌᆞ셰 ᄎᆞ려 바다 뎨역 츠라 ᄒᆞ소 ᄯᅩ 녹숑이사 슬거오니 녹숑이ᄃᆞ려 무러보와 저옷 ᄃᆡ답ᄒᆞ려 ᄒᆞ거ᄃᆞᆫ 뎨역글 녹숑이 맛다 츠라 ᄒᆞ소 녹숑이 저옷 ᄃᆡ답ᄒᆞ거ᄃᆞᆫ 골 가 ᄃᆞᆮ건녀 보라 ᄒᆞ소 쉬 비ᄎᆡ게 쉬 비ᄎᆡ게 소것 마니 달라 ᄒᆞ여 쇼쳥ᄒᆞ라 ᄒᆞ소
ᄯᅩ 뎐디 다 어우리 주고 녀ᄅᆞᆷ지이 마소 ᄯᅩ 내 오ᄅᆞᆫ 텰릭 보내소 미ᄐᆡ나 닙새 ᄯᅩ 보논 몰애 든 ᄃᆡ 가래질ᄒᆞ여 어우리 주고 ᄉᆡᆼ심도 죵의 말 듣고 녀ᄅᆞᆷ지이 마소 ᄯᅩ 내 헌 간사 텰릭 긔섀 주소 긔섀 오ᄉᆞᆯ 복경이 니펴 가뇌 ᄯᅩ 가래질ᄒᆞᆯ 제 긔섀ᄅᆞᆯ 보와 도옥ᄒᆞ라 ᄒᆞ소 논 가래질 다 ᄒᆞ고 슌워니 노하 ᄇᆞ리소 브리디 마소 구디ᄃᆞ려 니ᄅᆞ소 영동의 가 알외여 우리 논 인ᄂᆞᆫ 겨ᄐᆡ셔 경셩 군과니 ᄂᆡ월 열흘ᄭᅴ 드러오ᄂᆞ니 게 가 아라 ᄒᆞᆷᄭᅴ 내 옷 가져 드러오라 ᄒᆞ소 ᄯᅩ 모ᄅᆞ매 영동의 가 무러 그 군관과 ᄒᆞᆷᄭᅴ 드러오라 ᄒᆞ소 그 군과ᄂᆡ 일호미 니현죵이라 ᄒᆞᄂᆞᆫ 소니 ᄯᅩ 내 삼뵈 텰리기라 모시 텰리기라 셩ᄒᆞ니로 ᄀᆞᆯᄒᆡ여 다 보내소 ᄯᅩ 분ᄒᆞ고 바ᄅᆞᆯ 여ᄉᆞᆺ 사 보내뇌 지븨 가 몯 ᄃᆞᆫ녀가니 이런 민망ᄒᆞᆫ 이리 어ᄃᆡ 이실고 울오 가뇌 어마님 아기 뫼ᄋᆞᆸ고 다 됴히 겨소 ᄂᆡ년 ᄀᆞᄋᆞᆯᄒᆡ 나오고져 ᄒᆞ뇌
ᄯᅩ 다랑이 슌마니 ᄒᆞᄂᆞᆫ 노내 ᄡᅵ 열연 말 니필소ᄂᆡ 노내 ᄡᅵ 닐굽 말 손댱명의 노내 ᄡᅵ 단 말 쇼과니 ᄒᆞᄂᆞᆫ 노내 ᄡᅵ 단 말 구디 지에 ᄒᆞ던 노내 ᄡᅵ 단 말 니문 지에 노내 ᄡᅵ 여ᄃᆞᆯ 말 죵도리 ᄒᆞᄂᆞᆫ 노내 ᄡᅵ 여ᄃᆞᆯ 말 즌고래 노내 ᄡᅵ 열 말 ᄯᅩ 두말구레 바ᄐᆡ 피ᄡᅵ 너 말 뭇구레예 피ᄡᅵ 너 말 삼바ᄐᆡ 피ᄡᅵ ᄒᆞᆫ 말 아래 바ᄐᆡ 피시 ᄒᆞᆫ 말 닷 되 □ᄌᆡ ᄒᆞᄂᆞᆫ 바ᄐᆡ 피시 서 말 어셩개 믿 바ᄐᆡ 피시 서 말 허옴동이 어우리 ᄒᆞ던 보노ᄂᆡ 시 서 말 니레 뎨역 무명 반 필 ᄡᆞᆯ 넉 되 져ᇰ죠 나ᄅᆞᆨ 서 되 뎌ᇰ미ᄡᆞᆯ ᄒᆞᆫ 되 윗즁살이예 양식 맛다 되 콩 마 닷 되
회덕 오냐ᇰᄯᆡᆨ 가인ᄭᅴ 샹ᄇᆡᆨ 유무 벌▨ ᄌᆞ셰 즉재 다 받ᄌᆞᆸ소 ᄲᆞᆯ리 보내소
출처
3.2. 현대어역
안부를 그지없이 수없이 하네. 집에 가 어머님이랑 아기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하다가 장수가 혼자 가시며 날 못 가게 하시니, 못 가서 못 다녀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꼬? 군관 자리에 자망(自望)한 후면 내 마음대로 말지 못하는 것일세.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구태여 가면 병조(兵曹)에서 회덕골로 사람을 보내 잡아다가 귀양 보낸다 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아니 가려 하다가 못하여 영안도(永安道) 경성(鏡城) 군관이 되어 가네.
내 낡은 칼과 겹철릭을 보내소. 거기는 가면 가는 흰 베와 명주가 흔하고 무명이 아주 귀하니 관원이 다 무명옷을 입는다고 하네. 무명 겹철릭과 무명 홑철릭을 입을까 하네. 반드시 많이 하여 설을 쇠지 말고 경성으로 단단히 하여 들여보내소. 옷을 못 미처 지을 것 같거든 가는 무명을 많이 보내소. 두 녘 끝에 토시를 둘러 보내소. 무명옷이 있으면 거기인들 옷이야 못하여 입을까? 민망하여 하네.
반드시 하여 보내소. 길이 한 달 길이라 하네. 양식을 브겅이(인명)에게 넉넉히 하여 주소. 모자라지 아니하게 주소. 논밭의 온갖 세납이란 형님께 내어 주소 말씀하여 세납에 대해 대답하소. 공세(貢稅)는 박충의 댁에 가서 미리 말하여 두었다가 공세를 바꾸어 두소. 쌀 찧어다가 두소. 또 골에서 오는 면역(免役) 걷어 모아 채접하여 주거늘 완완(緩緩)히 가을에 덩시리(인명)에게 자세히 차려서 받아 제역을 치라 하소. 또 녹송이야 슬기로우니 녹송이에게 물어보아 저라고 대답하려 하거든 제역을 녹송이에게 맡아서 치라 하소. 녹송이가 저라고 대답하거든 골에 가서 뛰어다녀 보라 하소. 쉬이 바치게 많이 달라 하여 부탁하라 하소.
또 논밭은 다 소작(小作) 주고 농사짓지 마소. 또 내 다른 철릭 보내소. 안에나 입게. 또 봇논(洑) 모래 든 데에 가래질하여 소작 주고 절대로 종의 말 듣고 농사짓지 마소. 또 내 헌 비단 철릭을 기새(인명)에게 주소. 기새 옷을 복경(인명)이 입혀 가네. 또 가래질할 때 기새 보고 도우라 하소. 논 가래질을 다하고 순원이(인명) 놓아 버리소. 부리지 마소. 구디(인명) 데려다 이르소. 영동에 가서 아뢰어 우리 논 있는 곁에서 경성 군관이 내월 열흘께 들어오니 거기 가서 알아 함께 내 옷 가져 들어오라 하소. 또 반드시 영동에 가서 물어 그 군관과 함께 들어오라 하소. 그 군관의 이름이 이현종이라 하는 바이니 또 내 삼베 철릭이랑 모시 철릭이라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 보내소.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가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고,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또 다랑이 순마니가 하는 논에 씨 열여섯 말, 이필손의 논에 씨 일곱 말, 손장명의 논에 씨 다섯 말, 소관이가 하는 논에 씨 다섯 말, 구디지에 하던 논에 씨 다섯 말, 이문지에 논에 씨 여덟 말, 종도리가 하는 논에 씨 여덟 말, 진 구레논에 씨 열 말, 또 두말 구레 밭에 피 씨 너 말, 뭇구레에 피 씨 너 말, 삼밭에 피 씨 한 말, 아래 밭에 피 씨 한 말 닷 되, □ 하는 밭에 피 씨 서 말, 어성개 밑밭에 피 씨 서 말, 허오동이 소작 하던 봇논에 씨 서 말.
회덕 온양댁 가인(家人)께 올림. 편지 벌써 자세히 즉시 다 받았소. 빨리 보내소.
안정 나씨 대종회 홈페이지 中
내 낡은 칼과 겹철릭을 보내소. 거기는 가면 가는 흰 베와 명주가 흔하고 무명이 아주 귀하니 관원이 다 무명옷을 입는다고 하네. 무명 겹철릭과 무명 홑철릭을 입을까 하네. 반드시 많이 하여 설을 쇠지 말고 경성으로 단단히 하여 들여보내소. 옷을 못 미처 지을 것 같거든 가는 무명을 많이 보내소. 두 녘 끝에 토시를 둘러 보내소. 무명옷이 있으면 거기인들 옷이야 못하여 입을까? 민망하여 하네.
반드시 하여 보내소. 길이 한 달 길이라 하네. 양식을 브겅이(인명)에게 넉넉히 하여 주소. 모자라지 아니하게 주소. 논밭의 온갖 세납이란 형님께 내어 주소 말씀하여 세납에 대해 대답하소. 공세(貢稅)는 박충의 댁에 가서 미리 말하여 두었다가 공세를 바꾸어 두소. 쌀 찧어다가 두소. 또 골에서 오는 면역(免役) 걷어 모아 채접하여 주거늘 완완(緩緩)히 가을에 덩시리(인명)에게 자세히 차려서 받아 제역을 치라 하소. 또 녹송이야 슬기로우니 녹송이에게 물어보아 저라고 대답하려 하거든 제역을 녹송이에게 맡아서 치라 하소. 녹송이가 저라고 대답하거든 골에 가서 뛰어다녀 보라 하소. 쉬이 바치게 많이 달라 하여 부탁하라 하소.
또 논밭은 다 소작(小作) 주고 농사짓지 마소. 또 내 다른 철릭 보내소. 안에나 입게. 또 봇논(洑) 모래 든 데에 가래질하여 소작 주고 절대로 종의 말 듣고 농사짓지 마소. 또 내 헌 비단 철릭을 기새(인명)에게 주소. 기새 옷을 복경(인명)이 입혀 가네. 또 가래질할 때 기새 보고 도우라 하소. 논 가래질을 다하고 순원이(인명) 놓아 버리소. 부리지 마소. 구디(인명) 데려다 이르소. 영동에 가서 아뢰어 우리 논 있는 곁에서 경성 군관이 내월 열흘께 들어오니 거기 가서 알아 함께 내 옷 가져 들어오라 하소. 또 반드시 영동에 가서 물어 그 군관과 함께 들어오라 하소. 그 군관의 이름이 이현종이라 하는 바이니 또 내 삼베 철릭이랑 모시 철릭이라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 보내소.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가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고,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또 다랑이 순마니가 하는 논에 씨 열여섯 말, 이필손의 논에 씨 일곱 말, 손장명의 논에 씨 다섯 말, 소관이가 하는 논에 씨 다섯 말, 구디지에 하던 논에 씨 다섯 말, 이문지에 논에 씨 여덟 말, 종도리가 하는 논에 씨 여덟 말, 진 구레논에 씨 열 말, 또 두말 구레 밭에 피 씨 너 말, 뭇구레에 피 씨 너 말, 삼밭에 피 씨 한 말, 아래 밭에 피 씨 한 말 닷 되, □ 하는 밭에 피 씨 서 말, 어성개 밑밭에 피 씨 서 말, 허오동이 소작 하던 봇논에 씨 서 말.
회덕 온양댁 가인(家人)께 올림. 편지 벌써 자세히 즉시 다 받았소. 빨리 보내소.
안정 나씨 대종회 홈페이지 中
4. 외부 링크
- 대전광역시 공식 홍보 블로그 대전이 좋다: 안정나씨묘 출토의복 특별전에서 만난 500여년 전 타임머신
- 대전광역시 공식 홍보 블로그 대전이 좋다: 대전가볼만한곳 안정나씨묘 출토복식 특별전, 500년의 그리움을 깁다
- KBS: 500년 전 배냇저고리·한글 편지 공개
- 한국일보: 대전 출토 조선시대 전기 유물 특별전
- 서울신문: 最古 한글편지 복원…대전 안정 나씨 묘서 출토
- 파이낸셜 뉴스: 500년만에 빛본 안정나씨 부부의 사랑편지...국가기록원 복원 성공
- 연합뉴스: '어머니!' 부치지 못한 학도병의 편지
5. 문화재청 소개글
‘나신걸 한글편지’는 조선 초기 군관(軍官) 나신걸(羅臣傑, 1461∼1524)이 아내 신창맹씨(新昌孟氏)에게 한글로 써서 보낸 편지 2장으로, 2011년 대전시 유성구 금고동에 있던 조선시대 신창맹씨 묘에서 발견되었다.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편지의 내용 중 1470∼1498년 동안 쓰인 함경도의 옛 지명인 ‘영안도(永安道)’라는 말이 보이는 점, 나신걸이 함경도에서 군관 생활을 한 시기가 1490년대라는 점을 통해 편지 역시 이 때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신걸은 조상대대로 무관직(武官職)을 역임한 집안 출신으로, 편지를 썼을 당시 그는 함경도에서 하급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인 신창맹씨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저고리, 바지 등 의복 28점, 한글편지를 포함해 13점의 유물 등 총 41점에 달한다. 이 중 한글편지는 피장자의 머리맡에서 여러 번 접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편지는 아래 위, 좌우에 걸쳐 빼곡히 채워 썼으며, 내용은 모친과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 철릭(天翼, 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 등 필요한 의복을 보내주고, 농사일을 잘 챙기며 소소한 가정사를 살펴봐 달라는 당부가 주를 이룬다.
이 편지가 1490년대에 쓰였음을 감안하면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과 하급관리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말해 준다. 특히 조선 시대 한글이 여성 중심의 글이었다고 인식된 것과 달리, 하급 무관 나신걸이 유려하고 막힘없이 쓴 것을 통해 남성들 역시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즉 기존에는 관청에서 간행된 문헌으로는 한글이 대중에 어느 정도까지 보급되었는지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면, 이 편지가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조선 백성들에게 깊숙이 일려져 실생활에 널리 쓰인 사실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신걸 한글편지’는 현재까지 발견된 한글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료이자 상대방에 대한 호칭, 높임말 사용 등 15세기 언어생활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앞으로 조선 초기 백성들의 삶과 가정 경영의 실태, 농경문화, 여성들의 생활, 문관 복식, 국어사 연구를 하는데 있어 활발하게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며, 무엇보다도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알려주는 언어학적 사료로서 학술적ㆍ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나신걸은 조상대대로 무관직(武官職)을 역임한 집안 출신으로, 편지를 썼을 당시 그는 함경도에서 하급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인 신창맹씨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저고리, 바지 등 의복 28점, 한글편지를 포함해 13점의 유물 등 총 41점에 달한다. 이 중 한글편지는 피장자의 머리맡에서 여러 번 접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편지는 아래 위, 좌우에 걸쳐 빼곡히 채워 썼으며, 내용은 모친과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 철릭(天翼, 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 등 필요한 의복을 보내주고, 농사일을 잘 챙기며 소소한 가정사를 살펴봐 달라는 당부가 주를 이룬다.
이 편지가 1490년대에 쓰였음을 감안하면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과 하급관리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말해 준다. 특히 조선 시대 한글이 여성 중심의 글이었다고 인식된 것과 달리, 하급 무관 나신걸이 유려하고 막힘없이 쓴 것을 통해 남성들 역시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즉 기존에는 관청에서 간행된 문헌으로는 한글이 대중에 어느 정도까지 보급되었는지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면, 이 편지가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조선 백성들에게 깊숙이 일려져 실생활에 널리 쓰인 사실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신걸 한글편지’는 현재까지 발견된 한글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료이자 상대방에 대한 호칭, 높임말 사용 등 15세기 언어생활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앞으로 조선 초기 백성들의 삶과 가정 경영의 실태, 농경문화, 여성들의 생활, 문관 복식, 국어사 연구를 하는데 있어 활발하게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며, 무엇보다도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알려주는 언어학적 사료로서 학술적ㆍ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