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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식

羅湜
1498년 ~ 1546년

1. 개요2. 생애3. 연려실기술에서의 나식 형제
3.1. 나식(羅湜)3.2. 나숙(羅淑)3.3. 나익(羅瀷)
4. 허균의 평

1. 개요

조선의 학자.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정원(正源), 호는 장음정(長吟亭)이다. 아우 나숙과 함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당한 사림이다.

2. 생애

아래 내용은 다음 논문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여 작성되었다.[1]

조부는 나계종, 부친은 나세걸, 모친은 대사헌을 지낸 조익정의 딸 풍양 조씨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이다. 동생으로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나숙, 성균관 전적을 지낸 나익이 있다.[2]

조광조, 김굉필, 윤정숙의 문인이며 시에 뛰어났다. 1519년(중종 14년)기묘사화로 스승이 희생당하자 출사에 뜻을 잃었다. 이후 김안국, 박영 등 석학들과 교유하며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제자 중 한 명이 훗날 동인의 영수 허엽이다.[3] 1534년 부모의 뜻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 후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곧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동생 나숙은 김안로를 경계하며 그 당여인 채무택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파직당한 바 있었고, 김안로 사후에는 윤원로에게도 경계 받았다.[4] 사림은 기본적으로 추후 인종이 되는 세자를 문정왕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5]. 그러다보니 사림은 자연스레 대윤[6]에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중종 사후 인종은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고, 인종 즉위 후 나식은 윤임에게 사림의 등용을 적극 권한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 8개월도 채 되지 않아 30세에(1545년) 사망하였고, 이복 동생 명종(문정왕후의 아들)이 즉위하게 된다.

명종 즉위 후 윤원형, 윤원로, 이기 등 소윤에 의한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나식은 '이휘의 옥'에 얽혀들어간다.[7] 나식은 대윤의 중심인물로 지목되었고, 전라도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평안도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가 동생 나숙과 같은 날 사사당하였다.실록 링크 1568년 이준경의 상소로 나숙과 함께 신원되었다.

1578년 허엽이 편집하고 서문을 썼으며, 심방숙[8]이 발행한 시 50여수가 포함된 문집이 간행되었다.[9][10] 1678년 송시열의 묘표와[11] 박세채의 서문을 받아 나양좌[12]에 의해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13]가 간행되었다.

3. 연려실기술에서의 나식 형제

3.1. 나식(羅湜)

나식은 자는 정원(正源)이며, 호는 장음정(長吟亭)이고, 본관은 안정(安定)이다. 벼슬은 참봉이었는데, 을사년에 곤장을 맞고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가 강계(江界)로 옮기었고, 병오년에 사사되었다.

공은 천품이 명석하고 큰 절개가 있으며, 문장은 매우 품격이 높고 고아하였다. 과거 보기를 싫어하고 두 아우인 숙(淑)과 익(瀷)을 가르쳤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최수성(崔壽峸)은 뜻이 높아 웬만해서는 사람을 인정하지 아니하였는데, 공을 보고 칭찬하기를, “압록강 동쪽에는 나생 한 사람뿐이다.”고 하였다. 《식소록》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한 후로 인가(人家)에서는 《소학》과 《근사록》을 말하기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에 장음 나식에게서 배웠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이 슬고 다 떨어진 《소학》 네 권을 보았다. 펴서 읽어보고는 학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공(羅公)에게 가서 보이니, 공이 깜짝 놀라면서 '네가 어디서 이 귀신 붙은 물건을 얻었느냐?'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전현(前賢)들의 불은을 슬퍼하였다. 선친께서 이를 배우기를 청하니, 나공이 매우 칭찬하고는 《소학》과 《근사록》을 가르쳤다. 그러나 남들에게는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지소록》[14]

공은 호협스럽고 의기를 중하게 여겼다. 을사년 이휘의 사건과 관련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를 당하였는데, 대간이 아뢰기를, “식은 흉패한 인간으로 언제나 반역의 뜻을 품었습니다. 중종 때에도 세자를 갈아 세우려는 말이 있다고 말을 조작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몰래 세자를 업고 경주에 피해 가서 있겠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뒤에도 역신 이휘 등과 함께 ‘어진 임금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주장하였다는 것이 또 역적 유(瑠)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하여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유분록》

사사되던 날,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는데, 마치 임금께서 바로 옆에 계신것 같이 태도를 취하니 꿇었다가 일어나는 것이 매우 공손스러웠다. 이것을 보고 금부 도사가 서로 말하기를, “태연히 죽음에 나가는 태도는 나 참봉이 첫째라.” 하였다. 《괘일록》

3.2. 나숙(羅淑)

나숙은 자는 선원(善源)이며, 식(湜)의 아우이다. 중종 임오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갑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을사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가게 되었는데, 대간이 아뢰어, “유배에만 처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 하였다. 철산(鐵山)에 옮기고 갑오년에 다시 경원(慶源)으로 옮겼다가 사사하였다. 경오년에 직첩과 몰수하였던 재산을 돌려주었다.

형제가 동시에 죽음을 받으니, 세상에서 ‘두 나씨(二羅)’라 하였다. 《계곡집(谿谷集)》

3.3. 나익(羅瀷)

이름이 없는 비방서를 종루에 붙여 안로가 권세를 마음대로 결정하여 국사를 그르친 것을 비난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한림 나익(羅瀷)이 역사서에 써 두었더니, 안로가 마침 사초(史草)를 열람하다가 이것을 보고 나익에게, “누가 쓴 것이냐.” 물으니, 나익은 정색하고 말하기를, “사필(史筆)을 잡은 자라면 누구인들 이렇게 쓰지 못하리오” 하였다. 이에 안로가 노하여 사람을 시켜 탄핵하니 얼마 안 되어 나익이 죽었다.

나익은, 자는 명원(明原)이며, 본관은 안정(安定)이요, 신묘년에 문과에 뽑혔다. 안로가 일찍이 나익이 어렸을 때 남을 대신하여 관과시(館課試)에 〈서정부(西征賦)〉를 차운한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나식ㆍ나숙이 또 아우가 있느냐.” 하였으니 이것은 그들을 꺼려서 한 말이었다. 나익이 항상 말하기를, “간신이 권력을 잡고서 맑은 의논을 하는 자에게 원한을 품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마침내는 반드시 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하고 깊이 조심하였다. 과연 그가 죽은 지 9년 만에 을사년의 화가 일어나 나익의 형인 나식ㆍ나숙이 모두 화를 면치 못했다. 《계곡집(谿谷集) 묘갈(墓碣)》[15]

4. 허균의 평

1. 성수시화(惺搜詩話) 에서의 언급
羅長吟湜有詩趣。往往逼盛唐。
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의 시는 시취(詩趣)가 있어 왕왕 성당시(盛唐詩)에 접근하고 있다.

申,鄭諸老會于人家。方詠蒲桃?簇。沈吟未就。長吟乘醉而至。奪筆欲書簇上。主人欲止之。湖老曰。置之。長吟作二絶。其一曰。
신광한과 정사룡 등 노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바야흐로 포도(蒲桃) 그림 족자를 놓고 시를 읊으려 하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음이 술에 취해 와서는 붓을 빼앗아 들고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호음이 그냥 두라고 하니, 장음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老猿失其群 落日枯槎上 兀坐首不回 想聽千峯響
늙은 원숭이 제 무리 잃고, 지는 해에 외로운 나무가지에 올랐네.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湖老大加稱賞。因閣筆不賦。蓀谷亦云此盛唐伊州歌法。所謂截一句不得成篇者也。
호음이 크게 칭찬하고는 붓을 놓아버리고 짓지 않았다. 손곡(蓀谷=이달(李達))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성당 이주가(伊州歌)의 법이니 이른바 한 구절이라도 끊어 놓으면 시편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2. 학산초담(鶴山樵談) 에서의 언급
장음정(長吟亭) 나공 식(羅公 湜)은 웅장한 글과 곧은 절개가 천세에 빛난다.

孤舟宜早泊 風浪夜應多
외로운 배는 일찍 매어야만 하니 /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하다네

라는 구절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던 것이고, 원숭이 그림에 부친 절구 두 편을 손곡(蓀谷)은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山猿擁馬乳 脚踏長長枝 收拾落來顆 誰分雄與雌
산원숭이 포도를 안고는, 다리로 긴긴 가지를 밟는구나
떨어진 열매 주울 때, 뉘 능히 암수를 구별하리오

또 이런 시도 있다.

老猿失其群 落日枯槎上 兀坐首不回 想聽千峯響
늙은 원숭이 제 무리 잃고, 지는 해에 외로운 나무가지에 올랐네.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아랫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羅湜)의 자는 장원(長源), 안정인(安定人)이며, 정암(靜庵=조광조)의 문인이다. 을사사화에 아우인 부제학(副提學) 숙(淑)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의 여강시(驪江詩) 상구(上句)는 다음과 같다.

日暮滄江上 天寒水自波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

다른 야사(野史)를 참고해 보면 최원정(崔猿亭)의 시로 되어 있다. 그의 숙부인 세절(世節)이 이 시를 가지고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나,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화원시(畫猿詩)의 아랫수를 《기아(箕雅)》에서는 원정(猿亭)의 시라고 하였는데, 혹 잘못이 아닌가 한다.

[1] 한미현, '長吟亭 羅湜의 詩世界 硏究', 동방한문학 52권0호, 2012[2] 두 아우를 직접 가르쳤다. 나숙, 나익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나익은 김안로를 경계하다가 파직당하고 병으로 사망하였다(1537년).나익의 묘갈명[3] 허엽의 아들인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평론가인 허균은 훗날 본인의 문집에서 나식의 시에 대해 평하였던 바 있다. 그 내용은 아래 참고.[4] 윤원로는 막말로 유명했으며, 나식에게 '너의 아우는 어찌하여 나를 미워하여 좋지 못한 의논을 하고 다니는가?'하며, 나숙의 새 집을 가리키고 “속담에 새 집이 이루어졌으나 살 주인이 적다고 하였으니 네 아우도 그렇게 되지 않게 하라. 주상도 단명하였다'는 말도 기록되어 있다.[5] 적자로 정통성에도 문제가 전혀 없으며, 성품도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세자를 싫어할 사림은 없다[6] 윤임은 인종의 외숙부이다.[7] 이휘는 윤임의 사위 이덕응과 친했다. 이휘 -> 이덕응 -> 윤임으로 얽은 셈이다.[8] 당시 전라도 관찰사[9] 허엽은 본인이 기억하던 10편을 덧붙이기도 했다.[10] 허엽이 쓴 서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나는 선생의 마을에서 나고 자라 어린 시절부터 직접 그 모습을 뵈었다. 윤정숙 선생을 좇아 배웠는데 민기, 종성령 이구, 이항 등이 함께 그 문하에서 덕행과 학문을 닦아 모두 대유(大儒)가 되었다.', '모재(募齋=김안국) 선생이 물러나 여강에 은거할 때, 항상 문인들에게 나모(羅募)를 만나 보았느냐고 물었다.', '선생이 서화담을 만나보길 원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해 탄식하곤 했다. 가정 병신년(중종 31년) 가을, 화담이 강원의 집에 와 머물렀을 때 내가 그를 위하여 선생을 만나러 갔다. 두번째 갔을 때 격한 논쟁이 벌어져 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화담이 사례로 부채에 시 두 편을 써주었다.' - 곽정례, '허씨 오문장가의 문학적 배경과 활동에 관한 연구' 참조[11] 링크[12] 나식의 동생 나익의 5대손이다. 나익-나윤침-나급-나만갑-나성두-나양좌[13] 식문화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신선로에 대한 언급이 있다. 난주기라고 지칭하며 '새로운 모양의 난주기는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전우치에 대한 기록도 있다.[14] 허균, 성소부부고, 23권, 성옹지소록 중.[15] 계곡집, 나익 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