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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33호 | |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 |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2020년 10월 21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 |
1. 개요
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건칠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목조 조각상으로, 통일신라 말~고려 초까지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를 묘사했으며 고려 시대인 10세기 전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문화재명에 나오는 건칠(乾漆)은 옻칠을 활용한 공예 기법을 말하는데, 모시나 삼베 같은 천에 옻을 바른 뒤 굳히고 이를 여러 번 쌓으면서 형태를 잡는 방식으로 대단히 손이 많이 가는 기법이다.불상의 모델이 된 희랑대사(希朗大師)는 생몰연대나 자세한 행적이 전해지진 않는다. 다만 고려 초기의 승려인 균여의 행적을 다룬 일대기인 균여전에 희랑도 언급된다.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 화엄종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으로 나뉘었는데 북악의 지도자가 바로 희랑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화엄종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정작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견훤은 남악을 왕건은 북악을 지지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아마도 정치 파벌에 휘말려서 갈라선 게 아닌가 추정한다. 어쨌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승자가 됐기에 왕건이 지지한 북악과 희랑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을 것이며, 희랑대사상이 만들어진 것도 당대의 이러한 위상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1][2]
즉, 일반적인 불상들과는 달리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당대에 활동했던 실존 인물을 묘사한 불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 인물을 소재로 만든 불상을 조사상(祖師像) 혹은 진영상(眞影像)이라고 부르는데,[3] 중국과 일본에서는 조사상을 만든 사례가 많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도 상당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조사상의 사례가 거의 없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도 모델이 된 인물의 사후 오랜 기간이 지나고 만든 게 대부분이다. 작품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오직 해인사의 희랑대사상만이 유일하다.[4]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1989년에 보물 제999호로 지정되었으나,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2020년 국보 제333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
희랑대사상의 형태는 마른 노승이 단정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인데, 전체적으로 대단히 사실적이다. 머리 부분은 일반적인 노승의 모습으로, 삭발을 한 머리와 이마와 얼굴 곳곳에 잡혀 있는 깊은 주름, 다소 큰 귀, 얇은 입술로 짓는 미소 그리고 도드라진 광대뼈까지 묘사가 되어서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라 실제 희랑대사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체구는 전체적으로 말랐는데, 푹 꺼져 있는 가슴팍을 보면 다소 수척해 보일 정도다. 또한 희랑대사의 가슴팍에 뚫려 있는 구멍이 특히 인상적인데, 이는 흉혈(胸穴)이라 한다. 흉혈에 대해 해인사에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희랑대사가 모기에 시달리는 다른 스님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이라 하는데, 사실 고승의 신통력을 상징하기 위해 흉혈이 일반적으로 쓰인다고 한다.[6]
희랑대사의 옷은 장삼이며 그 위에 가사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쳤다. 장삼은 흰색 바탕에 붉은색 점과 초록색 점을 꽃무늬처럼 찍어서 장식했고 가사는 붉은색 바탕을 초록색 선이 가로 세로로 간격을 두고 덮고 있는데 마치 빨간 벽돌집의 외관을 연상케 한다. 또한 가사에 달린 남색 끈장식도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옷에 채색된 색은 다소 바라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단히 잘 남아 있다. 하체는 장삼과 가사에 덮인 것으로 조형을 했지만 가부좌를 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리 위에 단정히 맞잡은 두 손을 올렸는데 손의 조형도 사실적으로 했다.
이와 같이 독보적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희랑대사상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고승의 인자함과 굳은 의지가 동시에 드러나고 희랑대사의 높은 학식과 경륜이 함축된 고고한 정신세계까지 형상화됐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대상의 정신세계까지 초상에 나타내는 방식은 한국 초상의 특징으로 내려져와서 조선시대에까지 계속 이어진다.[7]
또한 희랑대사상은 조선 시대 문헌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奉安)되어왔던 사실이 확인되는데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가야산기(伽倻山記)'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도 남아 있어 전래경위가 명확하다.[8][9]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일단 모델인 실존 인물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조사상으로는 한반도에 현전하는 유일무이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뿐만 아니라 1000년 이상된 오래된 작품이고, 전래경위가 명확하며, 보존 상태도 온전한데다, 제작 수준이 최고 경지에 달해 고승의 내적 정신세계를 형상화하는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전해지는 초상 작품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는 가치 등을 인정받아 1989년 4월 10일에 보물 제999호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10월 21일에 국보 제333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해인사 목조희랑대사상
- 시사상식사전: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 두산백과: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4. 국보 제333호
국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신라 말∼고려 초에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希朗大師, 10세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초상조각[祖師像;僧像]으로서, 고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高僧)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을 많이 제작했으나,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으며 이 작품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남아 있다. 희랑대사는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學僧)으로,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하며 태조 왕건(王建)의 스승이자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도움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희랑대사좌상’은 조선시대 문헌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奉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가야산기(伽倻山記)」등 조선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남아 있어 전래경위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든 당시 제작기술이 잘 남아 있고 뛰어난 조형성을 지닌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아 왔다. 이렇듯 앞면과 뒷면을 결합한 방식은 보물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의 예처럼 신라∼고려 초에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조각에서 확인되는 제작기법이다. 건칠기법이 적용된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신륵사 조사당 목조나옹화상’(神勒寺 祖師堂 木造懶翁和尙, 1636년), ‘부석사 조사당 소조의상대사상(浮石寺 祖師堂 塑造義湘大師像, 고려 말∼조선 초)’, ‘괴산 각연사 유일대사상(槐山 覺淵寺 有一大師像, 조선 후기)’ 등 다른 조사상들과 달리,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의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매우 생동감이 넘쳐 마치 살아생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가슴에는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는 그의 별칭을 상징하듯,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흉혈(胸穴)은 해인사에 전래된 설화에 의해 희랑대사가 다른 수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고승의 흉혈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며 유사한 사례를 ‘북한산 승가사 승가대사상’(1024년, 보물)에서도 볼 수 있다. 이상 서술한 바와 같이 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지금까지 ‘희랑대사좌상’이 거의 유일하게 알려져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실제 인물처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희소성ㆍ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자, 희랑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인류문화사적으로 의의가 높고 역사적ㆍ예술적ㆍ학술적 가치가 탁월하므로 국보로 지정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ㆍ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과거 보물 제999호였을 때의 설명)
해인사 조사였던 고려시대 희랑대사의 진영상(眞影像)으로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에 모셔져 있다. 고려 건국 당시 해인사 승려들은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南岳派)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있었는데 희랑은 북악파의 종주(宗主)였다. 이 상은 화엄종 북악파의 진면목을 적절하게 묘사하여 화엄종의 진리를 무언(無言)의 형상을 통해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는 우리나라 초상의 최고 걸작이다.
앞쪽은 건칠기법으로 뒷쪽은 나무로 제작한 이 상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노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서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초인 930년경 이전으로 추정되며, 진영 조각의 진수를 가장 잘 묘사함으로써 10세기 중엽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승려의 진영 조각이라는 점에서도 미술사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앞쪽은 건칠기법으로 뒷쪽은 나무로 제작한 이 상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노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서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초인 930년경 이전으로 추정되며, 진영 조각의 진수를 가장 잘 묘사함으로써 10세기 중엽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승려의 진영 조각이라는 점에서도 미술사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1] 이외에도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과도 연이 있어서, 최치원이 희랑대사에게 지어준 시 6수가 '고운집(孤雲集)'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2]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희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희랑 대사[3] 조사는 덕망이 높은 고승을 뜻하는 말이고, 진영은 얼굴을 묘사한 그림 또는 사진을 말하는데 대체로 승려의 초상을 가리킨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사상[4] 고승들의 초상화인 진영은 그래도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 여럿 있다. 송광사의 십육조사진영(본래 16개가 있었지만 1995년에 13개를 도난당하여 행방을 알 수 없고 송광사에는 현재 3개만 남아있다.), 선암사의 대각국사진영과 선각국사진영, 동화사의 사명당진영과 보조국사진영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5] 출처: 문화재청 - 고려 고승 초상조각‘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로 지정 예정 보도자료[6] 출처: 문화재청 - 고려 고승 초상조각‘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로 지정 예정 보도자료[7]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해인사 목조희랑대사상[8] 출처: 문화재청 - 고려 고승 초상조각‘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로 지정 예정 보도자료[9]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 정은우(2020): 陜川 海印寺 希朗大師像의 특징과 제작 의미. In: 美術資料 vol.98., pp.54-77. 중 p.61-62. 논문 다운로드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