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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99호 | |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新元寺 盧舍那佛 掛佛幀 |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동길 1, 신원사 (양화리) |
분류 | 유물 / 불교회화 / 괘불화 / 노사나불도 |
수량/면적 | 1폭 |
지정연도 | 1997년 9월 22일 |
제작시기 | 조선 인조 22년(1644) |
<colbgcolor=#315288>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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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新元寺 盧舍那佛 掛佛幀.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은 조선시대 1664년[1]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가로 6.88m, 세로 11.18m의 거대한 크기의 삼베에 그린 탱화(幀畵)이다. 탱화란 불교의 가르침이나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이미지화 하여 표현한 그림인데, 문화재명에 나오는 괘불탱은 탱화 가운데서도 야외에서 행해지는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초대형 탱화를 뜻한다.[2] 본 괘불탱은 노사나불이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이 있는 신원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의 계룡산 산자락에 위치하는데,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로 손꼽히는 절로, 백제 의자왕 11년(651년)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인 보덕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은 1997년에 국보 제29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신원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은 거대한 괘불 탱화로 중앙에 자리잡은 노사나불의 상하좌우로 수많은 존상들이 대칭하여 위치하고 있다. 노사나불(盧舍那佛)은 부처의 참된 모습이 발현된 형상을 말하는데, 비로자나불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3] 노사나불 주변의 존상들은 십대보살[4]과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비천상 등이 있다.특이할만한 부분은 노사나불이 쓰고 있는 보관(寶冠)에도 9명이나 되는 화불(化佛)이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다.[5] 이 중 노사나불(≒비로자나불)의 화불은 보관의 정가운데에 위치하여 지권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존상들의 채색은 적색과 녹색 위주로 되어 있지만, 이외에도 흰색, 청색, 살색을 표현한 황색 등의 다양한 색들로 화려하게 치장됐다. 괘불탱의 배경은 노사나불 몸체로부터 뻗어나와 물결치는 4색의 광선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어지럽힐 정도로 현란하다.
괘불탱의 정가운데에 화려하고 거대한 본존불로 묘사된 노사나불은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화불들이 올라가 있는 보관을 쓰고는 양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두 손은 모두 크게 표현되어 있다. 노사나불의 표정은 근엄하며 엄숙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노사나불이 입고 있는 법의의 장식은 대단히 화려하며 여기에 달린 장신구들로 빼곡하게 치장해 놨는데 빈 공간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노사나불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뒤로는 녹색의 광배가 있으며, 광배의 테두리 바로 안쪽에는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라 적혀 있어서 이를 통해 본존불이 노사나불임이 확인된다. 노사나불의 몸체 뒤로도 광배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 광배는 모란꽃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붉은 테두리에는 8명의 화불이 또 배치되어 있다.
십대보살과 제척선과 범천, 사천왕 등은 노사나불 몸체 상반신부터 하반신까지의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데 각각의 존상들은 모두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6]
노사나불 우측에 위치한 관세음보살 |
이 중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의 표현이 특기할 만 하다. 지장보살은 지팡이와 보주를 들고 노사나불 왼쪽 어깨 부근에 있고, 관세음보살은 흰 옷을 입고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쪽 어깨 부근에 있는데, 본 괘불탱에 그려진 거의 대부분의 존상들의 광배가 녹색 또는 투명한 것에 비해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의 광배는 붉은 색으로 되어 있다. 이는 본 괘불탱을 그린 응열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흔히 나타나는 불화 표현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7]
노사나불 머리의 좌우측에는 십대제자가 다양한 포즈를 자연스레 취하며 각각 다섯 명씩 서 있고, 머리 위에는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네 분의 존상이 있으며 괘불탱 최상단 좌우측에는 비천상이 각각 한 분이 묘사되었다.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에는 그림에 관한 사안들을 남긴 화제(畵題)가 그림 하단에 적혀있는데, 본 괘불을 응열(應悅), 학전(學全), 일측(一測), 석능(釋能) 등의 다섯 명의 승려화가가 그렸다는 것과 함께 '대영산회탱(大靈山會幀)'이라는 명칭을 남겨서 본 그림이 영산회상도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노사나불이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설법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또한 이외에도 '갑진(甲辰)'이라는 육십갑자의 간지가 적혀 있어서, 이로 미루어보아 본 괘불탱은 166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의 제작자들인 응열(應悅), 학전(學全), 일측(一測), 석능(釋能) 등의 승려화가들 가운데 응열이 그 중심인물이었는데,[9] 응열은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1650년대경부터 1670년대경까지 약 20년간 활동하였다.[10] 본 괘불탱은 그가 작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보이는 시기인 1664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전성기에 이르렀을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은 보존상태가 좋고, 표현 기법과 묘사 정도가 뛰어나 승려화가인 응열을 중심으로 한 불화 제작 집단의 예술성이 확인되며, 17세기 중반의 불화 연구에 있어서 도움을 준다. 1997년 9월 22일, 문화재청은 괘불탱이 가지는 미적인 측면과 불교 미술사적인 중요성을 인정하여 칠장사, 안심사, 갑사, 장곡사, 화엄사, 청곡사에 전해지는 괘불탱들을 각각 국보 제296호부터 제302호까지 지정하였으며, 이와 함께 신원사의 노사나불 괘불탱은 국보 제299호로 지정하였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299호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노사나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길이 11.18m, 폭 6.88m 크기의 이 괘불은 노사나불이 단독으로 중생을 설법하는 모습으로,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10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다. 단독으로 그려진 노사나불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손은 신체에 비해 큰 편으로 손바닥을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녹색과 홍색, 분홍색 등을 이용하여 옷을 표현하였고, 5가지색으로 빛을 형상화하여 주변 배경을 표현하였다. 중심 불상의 좌우에는 각기 다른 물건과 두광이나 옷색의 차이 등을 이용해 10대보살들을 표현하고 있다. 보살 위의 10대제자들은 서로 다른 얼굴 방향과 표정, 각기 다른 옷과 물건, 자연스러운 동작과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인조 22년(1644)에 제작된 이 괘불은 짜임새있는 구도, 섬세한 표현, 밝게 표현된 색조 등이 세련된 솜씨로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17세기 대표적인 작품이다.
길이 11.18m, 폭 6.88m 크기의 이 괘불은 노사나불이 단독으로 중생을 설법하는 모습으로,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10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다. 단독으로 그려진 노사나불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손은 신체에 비해 큰 편으로 손바닥을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녹색과 홍색, 분홍색 등을 이용하여 옷을 표현하였고, 5가지색으로 빛을 형상화하여 주변 배경을 표현하였다. 중심 불상의 좌우에는 각기 다른 물건과 두광이나 옷색의 차이 등을 이용해 10대보살들을 표현하고 있다. 보살 위의 10대제자들은 서로 다른 얼굴 방향과 표정, 각기 다른 옷과 물건, 자연스러운 동작과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인조 22년(1644)에 제작된 이 괘불은 짜임새있는 구도, 섬세한 표현, 밝게 표현된 색조 등이 세련된 솜씨로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17세기 대표적인 작품이다.
[1] 인터넷 상에서 확인 가능한 참고문헌들에서 밝히는 본 괘불탱의 제작연대가 1644년과 1664년으로 서로 상이하다. 문화재청과 두산백과에서 밝히는 제작연대는 1644년(인조 22년)인 반면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밝히고 있는 제작연대는 1664년으로 현종시기이다. 참고문헌의 공신력은 일반적으로는 문화재청 쪽이 더 높다고 볼 수 있겠으나,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제작연대 추정에 있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밝히고 있는 제작연대 추정이 더 상세하며(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신원사노사나불괘불탱), 본 괘불탱의 화제에 갑진이 적혀 있는데 17세기의 간지 상 갑진년은 1604년과 '1664년'이라는 점(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갑진), 본 괘불탱의 제작자 중 한 명인 응열의 활동기간(1650년대~1670년대) 등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1644년보다는 1664년 쪽을 정확한 제작연대로 봄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본 문서 상단 국보틀에 표기된 제작연대는 문화재청 표기를 일단은 따르지만, 본 문서에서는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의 제작연대를 1664년으로 보도록 한다.[2] 소위 말하는 야단법석이 이 괘불탱이 걸리는 야외 불교 의식을 뜻한다.[3]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노사나불[4]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5] 참조: 미술대사전(용어편) - 화불[6] 이하에서 말하는 좌우는 본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한다.[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신원사노사나불괘불탱[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신원사노사나불괘불탱[9] 괘불탱은 크기가 크기인지라 화가 개인이 혼자 만드는 작품은 아니고 응열을 포함한 일종의 승려화가팀에 의해 만들어졌다.[10] 응열은 갑사 삼신불 괘불탱(1650년작)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