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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13호 | |
<colbgcolor=#315288> 금동탑 金銅塔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 장엄구 / 장엄구 |
수량/면적 | 1점 |
지정연도 | 1984년 8월 6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 초기 |
<colbgcolor=#315288> 금동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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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銅塔. 금동대탑 또는 개태사 금동대탑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동탑은 고려시대 전기인 10~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55cm의 금속제 탑 형태로 된 공예품으로 개태사지[1]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고려시대에는 금속으로 작은 불탑을 만들어 절에 바치는 풍습이 있었고, 이렇게 절에 공양된 금속제 탑들은 대개는 크기가 크지 않다.[2] 하지만 본 금동탑은 현존하는 금속제 소형 불탑들 중에서 크기면에서나 미적인 수준에서나 단연 백미로 꼽힌다. 또한 금동탑은 비단 금속 불탑에 한해서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고려 미술의 정수라고도 평가 된다.
금동탑은 1984년 국보 제213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삼성 리움이 소유 및 소장전시 중이다.
2. 내용
2.1. 상세
금동탑은 2층으로 된 기단과 그 위에 올려진 5층탑으로 구성된다. 본래는 두어 개 층이 더 있었으리라 추정하므로 높이도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3] 금동탑은 청동으로 만들고 위에 도금을 입혔기에, 만들어진 지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는 금빛이 다소 바래긴 하였지만 여전히 화려한 본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탑의 각 층은 각각 따로 주조한 뒤 합친 것 같다.[4] 금동탑에서는 고려시대 목탑과 석탑 양식이 모두 있다. 기단과 머리장식에서는 석탑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고 난간이나 지붕 등 탑의 전반적인 형태에서는 목탑의 형태가 나타난다.[5]<colbgcolor=#315288> 금동탑 탑신부와 금동탑 기단부 |
금동탑이 고려 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것은 이 탑에서 드러나는 정교한 금속공예 기술 때문이다. 본래의 개태사가 폐사되고 땅 속에 파묻히면서 여기저기 손상을 입긴 하였지만, 금동탑에 있는 장식들은 세밀하고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아래층 기단에는 연꽃잎을 새겼고 상층 기단은 난간으로 둘렀으며 1층 탑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놓았다. 탑의 1층에는 문과 창을 세밀하게 조형했다. 그 상층부터는 지붕 위에 놓인 난간의 안쪽에 있는 탑신에 불상을 새겼다. 2층의 각 면에는 부처 4좌를, 3층과 4층에는 3좌를, 5층에는 2좌를 새겨서 각 층의 크기에 맞게 불상의 숫자도 줄어든다. 각 층의 지붕에는 기와와 처마, 추녀마루 위에 놓인 잡상 등을 묘사했다. 추녀의 끝에는 몇 군데에 풍경이 달렸고 5층 지붕의 한쪽 면에는 용머리 두 개가 있다. 원래는 모든 층의 추녀 끝에 용머리와 풍경이 달렸을 테지만, 현재는 풍경과 용머리가 일부만 남았다. 탑의 머리장식 역시도 일부만이 남았다.[6]
금동탑은 고려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수준이 상당하였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장식된 금속 조형물들의 수준과 그 세밀한 묘사 정도가 대단히 높아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현재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 중 남은 것이 거의 없고, 목탑은 아예 단 한 개도 없으므로 금동탑은 당시 목조 건축의 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다. 금동탑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8월 6일 국보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2.2. 소유권 분쟁
하지만 금동탑에 관한 논의에서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이 유물이 정식적인 학술 발굴로 출토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금동탑은 1960년대 충남 논산의 개태사 옛터에서 도굴꾼이 몰래 도굴했다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서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이 얻었고, 이후 이 전 회장이 리움미술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호암미술관에 1987년 기증하였다고 한다. 리움에서도 개태사 옛터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소장품 전집에서 밝힌다.
이 때문에 개태사 측이 리움 측에 지속적으로 반환요구를 하는 중이다. 현재도 개태사를 방문하면 삼성을 규탄하는 플래카드를 볼 수 있다. 2010년 반환소송을 하기도 했으나 탑의 제작연도, 제작자, 소유자, 보관 장소 등에 관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2011년 대법원에서 최종패소하였다. 리움 측에서는 이병철 전 회장에게 기증받아 정당하게 소유했노라 주장한다. # 하지만 이병철의 골동품 사랑과 전력을 고려해 본다면 아마도 도굴을 지시했거나 도굴된 것을 매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기타
<colbgcolor=#315288> 2000원 보통우표 |
4. 외부 링크
5. 국보 제213호
이 금동탑은 의장이 화려하고 정교한 면에서 법당 내에 모셔둔 사리탑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동탑은 대개 높이가 20∼30㎝ 정도이고, 50㎝가 넘는 것이 극히 드문데, 이 탑은 현재 높이만도 155㎝로 규모가 큰 편이다. 더구나 현재 남아있는 탑신은 5층이지만 원래는 7층 정도였을 것으로 보이고, 머리장식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원래 높이는 지금보다도 더 높았을 듯하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꾸민 탑으로, 석탑의 일반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각 면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모양을 가지런히 새겨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근 테를 두른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탑신을 세웠으며, 1층 탑신에 출입문과 기둥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5층의 탑신에는 모두 불상을 새겼지만 조각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지붕의 모서리마다 풍탁(風鐸)을 달았으나 일부는 결실되고 현재는 몇 군데에만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표면의 금칠은 거의 벗겨져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된 작품으로, 넓게 짜여진 기단에 비해 탑신은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각 부분에 꾸밈이 많은 점이나, 탑에 매달린 장식들이 많은 점 등에서 공예탑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목조 건물 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대형의 금속공예품이면서 세부표현이 정교한 점에서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꾸민 탑으로, 석탑의 일반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각 면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모양을 가지런히 새겨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근 테를 두른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탑신을 세웠으며, 1층 탑신에 출입문과 기둥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5층의 탑신에는 모두 불상을 새겼지만 조각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지붕의 모서리마다 풍탁(風鐸)을 달았으나 일부는 결실되고 현재는 몇 군데에만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표면의 금칠은 거의 벗겨져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된 작품으로, 넓게 짜여진 기단에 비해 탑신은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각 부분에 꾸밈이 많은 점이나, 탑에 매달린 장식들이 많은 점 등에서 공예탑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목조 건물 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대형의 금속공예품이면서 세부표현이 정교한 점에서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1] 현재 존재하는 개태사와 처음 창건시의 개태사는 위치가 다르다. 본래의 개태사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다.[2] 끽해야 20~30 cm 높이 정도되는 것이 대다수라고 한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금동탑 (金銅塔)[3] 출처: 두산백과 - 금동대탑[4]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개태사 금동대탑[5]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금속공예 - 금동대탑[6]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금동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