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흥사 디지털 복원 출처 |
1. 개요
목탑(木塔)은 나무로 만들어진 탑을 말한다. 주로 불교 건축을 의미한다.본래 인도에서 석재 스투파(Stupa)로 시작한 탑이 중국에 건너오면서 궁중건축과 결합하여 한국에도 4세기 무렵 전파됐다. 목탑은 화재에 약해 수백 수천 년 남기 힘든 목재로 만들기에 현대 한국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목탑이 제법 많았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된 탓에 새로운 대형 목탑을 만들 재정적 지원을 할 주체가 없어졌고,[1] 원래 있던 목탑들도 관리 소홀로 조선 500년 동안 하나하나 소실됐다. 일반적으로 목탑은 석탑과 달리 사람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축물에 가깝고, 석탑들보다 훨씬 규모도 컸다. 현대인 관점으로는 석탑과 같은 탑이라기보다는 사리를 모신 다층구조 목조 건축물로 보인다. 집 짓는 것과 유사하니... 동양의 석탑으로는 힘든 일이다. 이 덕분에 관광객 눈에 쓱 둘러볼 뿐인 석탑과는 달리 목탑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예를 들어, 법주사 팔상전의 포인트는 안에 그려진 '팔상도'다). 다만 모든 목탑이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람이 올라갈 수 없거나 중간까지만 올라가는 목탑도 많다.
한국에서는 석탑이 대세가 되면서 목탑이 별로 남지 않았지만 일본에는 지금도 목탑이 많이 남았다. 고대 한국의 양식을 보존한 목탑도 많이 남아 현대에는 역으로 참고가 되기도 한다.
경상북도에서는 황룡사 9층 목탑을 2035년 안에 복원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복원의 구체적인 방법을 두고 논란이 있다. 황룡사 문서 참고.관련기사
한국이나 일본의 목탑은 주로 사각꼴이지만, 중국에서는 팔각꼴인 경우가 많다. 중국의 8 선호사상이랑 연관이 있을지도...
2. 역사
불교가 한중일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전파된 뒤 수많은 사람들이 숱하게 탑을 쌓았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석탑,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이라 할 정도로, 현존하는 목탑은 일본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본래 한반도 지역은 7세기 전반부터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목탑의 나라였지만, 수많은 전쟁과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겪으며 화재에 취약한 목탑은 거의 사라졌고, 튼튼한 화강암이나 벽돌로 만든 석탑과 모전석탑만 많이 남았다. 참고로 한반도의 전탑은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양식을 수입해온 것이라 경상북도에 집중분포한다.상기했듯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목탑이 많았기에, 한국에선 고대부터 여러 대형 목탑들이 건축되어왔었다. 삼국 시대 때는 고구려 청암리 사지의 목탑(약 80m)[2] 백제 미륵사의 목탑(약 60 m)과 그 유명한 신라 황룡사 9층목탑(약 80 m[3])과 같이 거대한 목탑들이 지어졌었으며 고려 시대에도 보제사의 목탑(약 60 m), 연복사 목탑(약 60 m) 등등 여러 목탑들이 축조되어 기록에도 남아있는데 지금까지 그것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목탑은 현대에 새로 절을 중축하면서 지은 것들을 제외하면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 둘뿐이다. 이것들도 그나마 조선 중후기(법주사 팔상전은 17세기, 쌍봉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개조되었다는 것을 빼면 연대미상)에 지어진 것이다. 그나마 있던 두 탑 중에서도 쌍봉사 대웅전은 현대에 불에 타 전소된 것을 재건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보여준 호국정신으로 인해 핍박이 누그러진 것이 이 정도 결과고, 조선 전기까진 목탑들이 남아있었더라도 유생들의 반달리즘을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커보인다.
3. 목탑의 구조
일본 호류지의 목탑 구조
호류지의 목탑과 금당(부처상이 있는 건물)은 백제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4]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기둥과 지붕 사이에 비스듬하게 내려가는 '하앙'이라는 목재를 통해 처마를 길게 뺀 점이 특이한데, 앞서 말한 호류지나 백제 청동탑편 유물에서 공통적으로 하앙이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백제에서도 주요한 구조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다만 한국에 남아있는 건물 중에서는 하앙을 사용한 건물이 단 한 채가 존재할 뿐이다.
탑의 가운데에 거대한 심주(기둥)이 있어, 주위의 각 층마다 분절된 구조물들이 심주와 결합되어 받쳐지고 있다. 다만 대부분의 목탑에 있어서 심주는 탑 꼭대기의 금속 장식물을 받치기 위함일 뿐 탑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탑의 무게는 각 층에 쌓은 각각의 기둥들이 지지한다. 이를 적층구조라고 하는데, 법주사 팔상전은 1층부터 윗층까지 통으로 된 기둥으로 지지하는 연속된 구조라서 다른 목탑들과는 좀 다르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목탑은 내부에 사람이 올라갈 수는 없다. 오히려 올라갈 수 있는 누각 구조가 드문 편.
4. 역사적인 목탑들
[5]
역사속에 등장한 목탑을 모아놓은 비교표.
오른쪽 가장 높은 탑은 중국의 뤄양(낙양)의 영녕사 구층 목탑[6]이다. 높이가 무려 273 m에 달한다고 알려진 역사상 목구조로 세운 가장 높은 탑이다.[7] 그러나 구조공학적으로 나무로 저 정도의 높이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저 도표와 달리 조사 결과 134 m 정도였다는 설도 있다. 이 쪽도 현재 남은 터 등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남아 있는 터를 봤을 때 그 어떤 목탑보다 기단이 넓었다. 그러나 영녕사 탑은 흙으로 내부를 채워넣고 겉을 나무로 세운 순수한 목조건축물이 아니어서 진정한 목탑이라고 하기 어렵다.
두 번째로 표시된 것은 높이가 80 m 정도인 황룡사 구층 목탑이며, 그 다음은 60 m 높이의 미륵사 목탑이다.[8]
그 다음 네 개의 목탑들은 전부 일본의 목탑으로, 네 번째가 현재는 사라진 높이 70 m 정도인 대관대사(大官大寺) 목탑, 다섯 번째가 현존하는 일본 목탑 중 가장 높은 55m의 도지(동사) 목탑이다. 교토역 근처에 있으며, 사람이 올라갈 수는 없다. 도다이지의 쌍 목탑이 높이가 100m를 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기단의 한 변이 불과 15 m 남짓이라 정말로 그만한 높이를 올리기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신빙성 부족으로 이 도표에서는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일본에서 일본서기에 조메이 덴노 11년에 백제대사와 구층탑을 지었다고 기록된 백제대사의 탑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아스카에서 나라로 천도한 이후 폐사되어 오랫동안 나라현 吉備池 연못에 잠겨있던 폐사지로, 심초석구덩이 외에 초석 등이 제대로 남이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라문화재연구소 측은 첫 발견 당시 탑 한변을 23m, 높이를 100m 라고 추정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추정 밑변 크기에 현재 일본 5층 목탑에 일반적인 비례에 따른 체감율을 9층에 그대로 적용하여 산출한 것에 불과하여 신빙성이 부족하며 80m로 낮춰 추정하기도 하다가 현재는 구체적인 높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 편이다. 이 탑은 몇십년 만에 금방 폐사되어, 약 600년간 경주 시내 한복판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 황룡사탑에 비하면 역사적 실체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백제대사는 이름 그대로 백제인과 관련된 사찰로, 마찬가지로 백제인이 건축설계에 참여한 황룡사탑과 유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기단의 조성방법은 황룡사 목탑과 같다. 황룡사 목탑은 일단 높이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것 외에도 초석이 전부 제 위치에 남아있는 등 유구가 확실하고 그 목탑의 비례를 유추할 수 있는 부조 조각이나 청동제 모형탑 등이 남아 있어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현존하는 가장 높은 목탑이자 누각인 중국 잉쉬앤(응현)의 포어꽁쓰(불궁사) 5층 목탑이 빠져있다. 아마도 해외 목탑 중 일본 목탑양식에 근원이 된 4각형 평면의 목탑만 비교해서 그런듯 하다. 불궁사 목탑은 높이가 67.31 m이고 평면은 8각형으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누각구조다. 최근 기울기 시작해서 해체 수리를 검토중에 있다.
이 도표에 수록되지 않은 목탑으로는 한국의 고구려 청암리 사지 목탑, 정릉사지 목탑, 신라 실상사 목탑이 있다. 백제에서 밑변이 가장 컸던 목탑은 미륵사 목탑이 아니라 왕궁리 유적의 동쪽에 위치한 제석사 목탑이다. 미륵사지 목탑지 한 변의 길이는 18.56m이나 제석사지 목탑지는 21.2m이다. 만약 두 탑의 층 수가 같았다면 제석사지 목탑이 미륵사지 목탑보다 훨씬 높았을 가능성이 많다.
5. 문제점
재질이 나무다 보니 대부분 석탑이나 전탑보다 훨씬 크게 만든다. 그래서 '유지/보수비용'이 석탑에 비해 많이 든다. 또한 현재 국내 산림은 곧고 큰 나무가 많았던 고대 한반도 환경과 달리 소나무의 비중이 높아져있어 대규모 목탑을 건설할 수 있는 곧고 큰 목재를 얻기 힘듦 또한 문제다.[9] 이런 점에서 소나무보다 훨씬 곧고 굵은 삼나무 위주인 일본은 목자재 조달이 훨씬 유리한 편이다. 아무튼 이러한 점에서 목탑은 불에 약해서 전소되기가 쉬우며, 전소되면 남아있는 재료도 없기에 새로 세우기가 힘들다. 심지어 황룡사 목탑은 벼락을 맞아서 불탄 후 다시 짓기도 했지만, 몽골군의 침략으로 거의 전소된다.그리고 대부분의 목탑이 있던 절들은 상기했듯 몽골의 침략 등 전란이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사라진 곳이 많아서 원래 목탑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거기다 복원해야할 전통 분야 직업군들의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기에 복원하기 위해서 일본이나 중국의 전문가에게 부탁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고, 복원해도 안하느니만 못한 어색하다는 의견과 비판도 많이 오간다.
6. 한국 목탑 목록
6.1. 과거 주요 목탑
6.2. 국내 현존 목탑
6.2.1. 역사적 목탑
- 보은군 법주사 팔상전: 쌍봉사 대웅전이 전소된 뒤로 세워질 당시(17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목탑이다.
- 화순군 쌍봉사 대웅전(복원): 17세기에 세워졌다. 1984년 4월 3일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다행히 원형 그대로 다시 복원되었다. 상세한 실측도면을 미리 제작해둔 덕분이다. 불타기 전에는 팔작 지붕이었으나, 조사 결과 원래는 사모지붕이었음이 밝혀졌고, 복원 때 사모지붕으로 고쳐 복원했다. 법주사 목탑과 달리 날씬하여 좀 더 '탑'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 부여군 백제문화단지의 능산리사지 5층목탑: 능산리사지 목탑의 원형을 추측해 지은 것으로 완벽한 재현은 아니다. 구조적으로는 하앙식 치마를 적용하는 등 고증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나, 한국의 고대 건축물 복원물이 다 그렇듯, 단청이 조선시대 방식인 것이 문제.
- 문경 봉암사의 건축물인 '극락전': 목탑의 형태를 띄고 있는 건축물이다[11]. '한국민족문화재백과'에서는 아예 '목탑'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탈의 설명은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이라고 표현하여 목탑은 커녕 '외견상 2층인 1층 건물'로 보고 있다. 여튼 우리나라 목탑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1년에 한번 개방을 하는 봉암사의 눈물나는 접근성 덕분에 인지도는 매우 낮은 건축물이다. 근래에 지어진 성주 심원사의 '약사전'이 봉암사 극락전과 매우 비슷하다.
6.2.2. 현대 목탑
- 진천군 보탑사 통일대탑(52m). 3층 목탑의 형태로, 현대목조건축 중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 김천시 사명대사공원 평화의탑(41m).
- 청주시 용화대미륵선도 천계탑(27m). 법주사 팔상전을 본떠 만들었다. 대순진리회의 분파인 용화대미륵선도가 소유하고 있다.#
- 합천군 법연사 황금사리쌍탑.
- 부산광역시 해운정사 관음보궁(15 m).
- 구례군 문수사 대웅전. 쌍봉사 대웅전을 본떠 만들었다.
- 구례군 화엄사 금정암 극락보전. 쌍봉사 대웅전과 비슷한 3층 목탑이다.
- 가평군 현등사 만월보전. 보기드문 2층 목탑이다.
- 양구군 등운사 7층팔각목탑.
조계종에서 이천시에 위치한 백족산 선각사에 54 m에 이르는 팔각칠층목탑 건립을 추진중이다. 2025년 완공이 목표.
6.2.3. 목탑 양식의 석탑들
- 익산시 미륵사지 동서 구층석탑, 중원가람의 구층 목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 부여군 왕궁리 유적 오층석탑, 통일신라 혹은 고려 초기 고전풍 [12] 양식이며, 석탑 자리에 목탑이 존재했었다.
- 부여군 정림사지 오층석탑, 목탑을 본뜬 한반도 최초의 석탑이다.
그 외에도 고려시대 이후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본뜬 일명 "백제계 석탑"이 유행하였고, 목탑과 비슷한 처마내밀기 비율, 기둥 등 부조의 표현 등이 특징이나 직접적으로 목탑 양식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6.2.4. 목탑 외관을 본뜬 건물들
- 밀양시 영산정사 성보박물관. 7층 목탑 형식 콘크리트 건물이다.
- 영천군 만불사 범종각. 쌍봉사 목탑을 본떠 만들었다.
- 경주시 중도타워. 황룡사 9층 목탑을 콘크리트로 재현한 건물이다.
- 경주시 보문탑. 5층 6각형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 보문관광단지의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 태안군 안면암 7층탑과 부상탑. 부상탑은 태안 기름유출 사고를 계기로 호국의 뜻을 담아 건립되었으며, 밀물때에는 물위에 위치하게 되는 매우 독특한 탑이다
- 국립민속박물관 중앙건물(2전시실). 법주사 팔상전의 외관을 본뜬 콘크리트 건물이다.
7. 유명 목탑 사진
7.1. 한국
청암리 사지 팔각 목탑 복원 상상도. 평양민속공원에 콘크리트 재현복원되었지만, 평양민속공원 자체가 철거되면서 사진 속으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상상도.
미륵사 9층 목탑 복원 모형. 당연하지만, 미륵사지 석탑의 비율을 많이 참고하였다.
쌍봉사 대웅전 1984년 이전 모습. 본래 보물 제163호였으나, 1984년 4월 3일 화재로 같은 해 5월 30일 지정 해제되었다. 하지만 내부에 있던 금동불상은 원래 것 그대로다. 화재 당시 한 노인이 불난 것을 보고 재빨리 들쳐업고 나왔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불상은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간신히 들 정도로 무겁다고 한다.
쌍봉사 대웅전의 현재 모습. 조선시대에 개조되기 이전 모습은 이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의 모델이기도 하다.
백제문화단지의 능사 5층목탑. 현대에 복원된 것이다. 문제는 백제 양식이라면서 조선시대 건축 같은 면이 보여 어정쩡한 복원이라고 까인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진천군 보탑사 3층목탑. 보탑사 자체는 1996년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지는 곳에 비구니 스님인 지광, 묘순, 능현스님이 창건한 절로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부문의 장인들이 참여해 1996년 8월 3층목탑을 완공하였다.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만든 3층목탑의 높이는 42.71m로, 상륜부(9.99m)까지 더하면 총 높이가 무려 52.7m에 이르는데 이는 14층 아파트와 맞먹는 높이이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로 강원도산 소나무를 자재로 하여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지어졌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한국목탑과 다르게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게 지어진 목탑이다. 내부는 3층 구조로 1층은 중앙 4면에 불상을 모신 금당, 2층은 법화경을 모신 윤장대가 있는 법보전, 3층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현대목탑임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이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새로운 한국형 목탑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문화재도 아닌데, 답사가이드북의 바이블인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서도 보탑사가 소개될 정도이다. 세월이 상당히 흐르면 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영훈 대목수, 단청명인 한석성, 도편수 조희환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장인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7.2. 중국
중국 산서성 불궁사 응현목탑(應縣木塔). 현존하는 목탑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높다. 정식 명칭은 불궁사석가탑(佛宮寺釋迦塔)이다. 서기 1056년 요나라 때 건축된 이 목탑은 5층으로, 상륜부까지 포함한 높이가 67.31 m, 1층의 지름이 30.27 m이며 모든 건축 부재가 목재이고 쇠못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구조면에서 보면 겉모양은 5층인데 각 층 사이에 또 다른 층, 즉 암층이라는 것이 하나씩 숨어있다. 그래서 이런 구조를 중국학계에서는 명오암구옥(明五暗九屋)이라고 한다. 즉,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1층과 2층 사이, 2층과 3층 사이, 3층과 4층 사이, 그리고 4층과 5층 사이에 암층이 있어 안에서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모두 합하여 9층 목탑이 되는 것이다.
중국 절강성 항저우에 있는 육화탑(六和塔). 970년에 오월왕(吳越王) 전홍숙(錢弘俶, 948~978)이 전당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밖에서 보면 13층이지만 실제로는 7층에 높이가 59.89 m이다. 현 건물은 1165년 남송 시기 재건한 것이다.
중국 강소성 쑤저우의 북사탑. 동오의 손권이 모친 태부인의 장수를 빌며 세운 것을 송대에 와서 현재의 양식으로 지었다. 원의 남송 정복 시에 파괴되었으나 명대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7.3. 일본
일본 호류지의 5층 목탑.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이다. 백제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다이고지의 5층 목탑. 헤이안 시대의 탑으로 교토 내의 최고(最古) 건축물이다.
일본 루리코지(유리광사)의 5층 목탑.
일본 도지(동사)의 5층 목탑. 에도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현존 일본 최대의 5층 목탑이다.
8. 가상매체에서의 목탑
- 이소룡이 주연한 영화 사망유희는 원래 이소룡이 위의 법주사 팔상전이 모티프인 5층의 목탑에서 각 층의 고수들을 물리치고 보물을 찾는다는 내용이였다.
- 포켓몬스터의 성도 지방에는 도라지시티에 있는 모다피의 탑, 인주시티에 있는 불탄탑과 방울탑이 있으며, 금빛시티의 라디오탑도 원래는 칠색조 같은 전설의 포켓몬이 쉬어가는 목탑이였다고 한다.
[1] 일부 왕족이 간헐적으로 불교에 관심과 지원을 해 주기도 했지만, 목탑을 만들 정도로 파격적인 지원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2] 삼국시대 목탑 중 가장 인지도가 낮다. 하지만 발굴된 탑지의 규모가 황룡사와 비슷해 그에 맞먹는 높이였을 것으로 보이는 또다른 한국의 대형 목탑이었다. 또한 특이하게 이 탑은 팔각 형태였다.[3] 이정도 높이면 거의 20층대 아파트 수준이다.[4] 도래인, 아스카 시대 참고[5] 출처: 나라문화재연구소 문화재 도록 <아스카.후지와라쿄 전>, 아사히신문사, 2002[6]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가 감탄했다는 탑으로 516년에 지어졌지만 53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기록에는 탑이 소실될 때 우박와 뇌성이 있었다는데, 벼락에 맞아 불이 난 듯하다.[7] 높이로만 비교하면 63빌딩보다 높다. 63빌딩은 249 m(안테나 포함 시 274 m). 다만 영녕사 항목에는 정작 136.7 m였다고 서술되어 있다.[8] 단, 미륵사지 목탑의 추정 높이가 60m로 의견이 모아지기 전의 그림이라 높이가 55m인 도지 목탑보다도 낮게 그려져있다.[9] 또한, 최근 기후 변화로 기온이 상승하면서 소나무가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것 또한 문제이고, 소나무재선충이 극성인지라 목탑에 쓰일만큼 크고 곧은 소나무를 구하기란 거의 어렵다. 한국에서 쓰는 소나무가 절에서 쓰는 나무로 자랄려면 시간이 걸려서 그만큼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10] 삼국사기에 망덕사 목탑이 바람이 불자 서로 부딪쳤다는 기록이 있고 또 발굴되었다.[11] 문경 봉암사 극락전은 보물 제1574호로 지정되어 있다.[12] 고려 초기 삼국의 옛 영토에서 그 고대 국가풍의 고대 미술이 유행했으며, 봉정사 극락전도 그 일환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