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15 08:16:29

무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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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록3. 윤회설과의 모순 논쟁

1. 개요

무아론(無我論)은 제법무아를 다루는 불교의 근간 사상이다.

2. 기록

그러면 영원하지 않으며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며, 이것이 자아며,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따라서, 물질이 과거나 미래, 현재의 것이든, 거칠든 미묘하든,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열등하든 훌륭하든, 멀든 가깝든,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니며, 자아가 아니며, 나 자신이 아닌 것입니다. 느낌과 지각과 형성작용과 식(오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상경
나는 이 집을 짓는 자를 찾으려고 여러 생(生)을 보냈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그동안 자꾸 되풀이 하였다. 이제 집을 짓는 자[1], 너를 찾았다. 너는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 조각이 났다.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소멸되어 버렸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 후의 부르짖음, 법구경, 153~154 게송[2]
영원불변의 아트만이 오온 중의 하나라면 우리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무상이라는 것도 없고, 거기에서 오는 슬픔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슬픔과 괴로움은 끊임없이 따라다닌다는 것은 만인이 인정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오온 중의 어떤 것도 아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의는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역시 경험적인 사실을 출발점으로 한 논의이다. 부처는 여기에서도 경험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도 아트만이 아니다, 저것도 아트만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사실 우파니샤드의 철학자 야즈냐발키야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그에 따르면 참된 아트만을 언어적,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가 아니다, ~가 아니다’(neti neti,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는 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부처와 달리 언어적, 개념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참된 아트만의 탐구에 대단히 정열을 불태웠지만.
‘불교는 무아입니다’라고 옛날부터 일컬어지고 있으나, 최초기의 불교에서는 무아설이 아니라 비아설이 설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아설은 애초에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부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야모토 케이이치, <불교의 탄생> 190~191[3]

부처가 깨달음 후 2번째로 설법한 것이 무아론에 관한 무아상경이다.[4] 부처는 '통제 불가능한, 영원하지 않은, 괴로운' 특성을 가진 '나'를 본질적 실체로 인정하지 말 것을 설하였다. 초기불교의 맥락에서 무아론은 말그대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완전하지 않고 괴로운 특성을 가진 자아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인식전환의 촉구였다. 당시 힌두교의 철학에서의 자아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신적 브라흐만(아트만)의 표현이였다. 부처는 자아의 근본적 특성을 근거로 이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조사선과 현대 불이일원론에서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무아론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승불교의 관점으로 초전법륜과 초기불교의 수행에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말한 무아와는 거리가 있다. 초기불교는 자아를 욕망과 동일한 것으로, 욕망은 괴로움의 근원으로 윤회를 지속시키는 동인으로 보았다. 팔정도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 즉 사성제가 초기불교 수행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삶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는 전제가 있으므로, 초기불교를 반출생주의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강병균과 같은 과학자들은 진화론이 플라톤 철학을 전복시키기 이전에 이미 무아론이 이러한 함의를 지녔다고 본다. 무아론은 본질주의에 반하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무신론, 실존주의 등 많은 철학사조와 연결되어 해석된다.

3. 윤회설과의 모순 논쟁

불교의 출발점은 세상에 윤회가 있으며 윤회는 고통이기에 깨달음을 통해 이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아론에 따르면,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고 오온의 변화에 의해 그때그때 생겨날 뿐이다. 따라서 무아론에서 주장하는 대로 진정한 나[5]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는 동일한 존재가 아닐 것이고, 전생의 내가 저지른 업을 현생의 내가 받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즉, 무아론과 윤회설은 서로 모순적인 관계에 있으며, 어느 한쪽이 성립한다면 어느 한쪽은 사실일 수 없다. 그러나 두 사상 모두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의 중심 사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이 양립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무아론 자체가 윤회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붓다가 주장한 것이므로 두 이론이 충돌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이 '윤회에서 내 전생의 업을 현생의 내가 받는다'와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내가 다르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방법이 고려되었다.
  • 연기설 : 초기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오온이 변동되어 현재의 나를 형성할 때, 이 오온에 전생의 인과가 붙어 내가 형성된다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다만 이 경우 내 전생의 각각의 오온에 전생의 내가 저지른 업이 100% 다 붙는지, 분산되어 붙어 가는지, 그리고 전생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이 내가 형성될 때 붙어 오는지 등등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 유식론 : 유식학파에선 위 오온 중 식(識)에 좀더 집중하여 식을 점점 더 세분화했고, 최초 유식론을 주창한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에선 식을 쪼개어서 이안의비설신 6가지 식의 6식을 만들어냈는데, 대승불교 유식유가행파에서 거기에 말나식, 아뢰야식을 추가해 8식을 만들었으며 그 중 윤회의 주체로서 8식인 아뢰야식이 개인의 모든 경험과 업의 씨앗(종자)을 저장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의식으로, 죽음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다음 생으로 이어져 새로운 존재를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고 설명하는 등 좀더 심화된 '자신'을 생각해내게 되었고, 다만 그러다 보니 점점 무아설을 벗어나 불교에서 부정하는 아트만의 요소가 많이 삽입되게 되었다.
  • 여래장 사상 : 대승불교 중기에는 석가모니가 주창한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는 말에서 착안해 모든 중생에게 '깨달음의 씨앗'인 불성, 즉 여래장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초기에는 이 여래장 사상과 윤회는 별 상관이 없었는데, '능가경'이라는 대승불교 경전에서 이 여래장과 아뢰야식이 동일한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여서# 연관관계가 생겼다.
  • 중관학파 : 공(空) 사상을 주로 주장하는 중관학파에선 마찬가지로 무아설도, 윤회설도 부정하지 않고 그저 아무런 고정된 실체 없이 연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메커니즘 따질 거 없이 두 요소는 모순되는데 그냥 존재한다고 본 것. 깔끔하게 모순을 해결하진 못했고 그저 문제를 방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무아설과 윤회설[6]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 모순되기에 많은 해석과 논쟁들이 있어왔고 현대에 와서도 해결되지 못했다. 잊을 만 하면 논쟁거리로 튀어나오는 주제기도 하다.## 특히 논리 따지기 좋아하는 동서양 철학자들과 무조건 불교를 까고 싶어하는 기독교에서 자주 불을 지피는 편이다.

석가모니는 이 모순에 대해 단순히 윤회가 연기설의 오온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만 언급하였고, 이후 제자인 말룽꺄뿟따의 '정말로 나 또는 부처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가', '영혼과 몸은 다른가', '세계는 영원한가'등의 10가지 질문과, 왓차곳따의 '정말로 자아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예 답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이후 자신이 침묵한 이유를 '화살을 맞았는데 화살을 어디서 누가 왜 쏘았는지 등의 현실과 관계없는 근본원리만 따지면 사람은 죽는다. 일단 치료부터 해라' 즉 현실의 고통이 더 중요하지 그 근본을 따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즉 불교의 입장은 굳이 전생의 내가 지은 업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을 내가 대신 받든 상관없이 '현생의 내가 윤회로 고통 받고 있다' 는 사실이 제일 중요한 것이므로, 논쟁보단 일단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이 제일 우선인 것이다.
[1] '집을 짓는 자'를 욕망으로도 해석하며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생각(분별적 사고)으로 설명한다.[2] 부처되면 생사 문제 해결 - 현대불교신문[3] 알라딘 - 불교의 탄생[4] 첫번째는 팔정도이다.[5] 힌두교의 아트만[6] 사실 불교에서 주창한 설은 아니지만, 현상으로서 존재한다고 인정했고 불교의 주적(主敵)이라 부를 만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현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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