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유형문화재 사진전 -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
1. 개요
奉化 鷲棲寺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및 木造光背. 현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한 신라시대 고찰 축서사(鷲棲寺)에 봉안된 9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 현재 봉화 축서사(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월계길 739)에 소재 중이며, 보물 제995호로 지정되었다.2. 내용
사진 출처 : 봉화 축서사 공식 홈페이지
불상 높이 108㎝, 대좌 높이 96㎝.
현재 봉화 축서사의 보광전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으로, 축서사 기록에 의하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하여 사리를 봉안하는 원탑의 건립과 함께 조성된 불상이다. 본 불상을 제작한 축서사는 신라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고신라 시대 사찰 중 하나로 알려졌다.
본 불상에 대한 내용은 당시 신라인들이 축서사 삼층석탑에 기록한 석탑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구한말 경내의 삼층석탑에서 납석제 사리호(舍利壺)가 발견되었는데, 표면과 밑면에는 탑을 세운 발원자와 건립연대, 장인 등과 관련된 내용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정작 이 사리호는 석탑에서 발견된 이후 1912년경에 이 절의 노승이 가지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는 위기를 겪었고, 이를 조선총독부가 다시 사들인 후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 사리호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 시중(侍中)을 지냈던 김양종의 막내딸인 명단이 부모님을 위하여 867년(신라 경문왕 7년)에 축서사에 석탑과 석불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중인 축서사 납석제 사리호의 모습.사진 출처 1, 사진 출처 2
학계 연구자에 의하면 신라시대 당시 최고 권위자였던 신라 왕실 측근의 진골가문에서 후원한 불상으로, 당시 신라 왕실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왕권강화라는 측면에서 원탑과 함께 이 비로자나불상을 제작했다고 여긴다. 법보신문 :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시중을 역임했던 신라 진골귀족의 손길이 묻어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이 불상을 포함해 다양하고 귀중한 신라시대 유물들이 축서사에 있었지만 구한말~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축서사를 불태우면서 거의 모든 유물들이 소실되었고, 대웅전 1동과 이 불상, 그리고 사리호를 도굴맞은 삼층석탑만 남은 채 한동안 폐사지로 남아있었다.
본 불상 또한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일부가 파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먼저 불상 전체에 백분(白粉)이 발렸는데, 대좌에는 없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근현대 들어 누군가가 발랐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불상의 뒤에 있었던 석조광배 또한 대부분 파괴되어 원래의 석조 광배는 상단부 일부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 재질로 부착되어 있는 목조 광배는 근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불상과 같은 사건을 겪은 축서사 삼층석탑 또한 사리호가 도굴된 것 외에도 기단부 하대, 3층 옥신과 개석, 상륜부가 소실된 상태이다.
867년 제작된 이 불상의 전체적인 모습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65년, 경문왕 5년 제작),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59년, 헌안왕 2년 제작),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863년, 경문왕 3년 제작)과 거의 흡사하며, 그 중에서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상당히 닮았다. 이에 대해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축서사(鷲棲寺) 불상은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여러 면에서 관련이 깊다. 먼저 동화사 상과 마찬가지로 축서사의 석탑에서도 『석탑조성기(石塔造成記)』가 새겨진 사리호(舍利壺)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호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경에 석탑에서 반출되어 이 절의 승려가 소유하고 있다가, 1929년 일본인의 소유가 된 것을 총독부 박물관이 사들인 것이다. 전체 형태와 크기 및 표면에 글자를 새겨 넣는 방법 등이 동화사 민애대왕사리호와 거의 유사하다.
축서사 사리호의 명문은, 승려인 언전(彦傳)의 막내 누이동생이 그의 부모인 이찬(伊飡) 김양종(金亮宗) 부부를 위해 이 탑을 세우고 불사리 10과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한다는 내용이다. 사찰을 세운 해는 함통(咸通) 8년, 즉 경문왕 7년(867)이다. 그런데 민애왕(敏哀王)의 복권(復權)을 상징하는 동화사 비로암의 창건(863년) 직후에 이보다 약간 규모는 작지만 거의 같은 양식으로 원찰을 세웠다면, 이 원찰의 주인공인 이찬 김양종은 민애왕과 함께 왕위 쟁탈전 때 억울하게 죽었다가 복권된 민애왕의 측근 중신 중의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축서사는 동화사 비로암의 건립 방식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불상의 조각 양식은 사뭇 다르다. 화려한 대좌 위에 지권인을 맺은 비로자나불좌상이란 점을 제외하면, 얼굴 모양과 대의 착의 방법, 옷주름의 표현 방식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전체에 백분(白粉)이 발라져 있는데, 대좌에는 없는 점으로 미루어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찐 동화사 상에 비하여 살이 빠져 갸름하다. 옷주름의 표현도 규칙적인 평행선을 나열하여 매우 도식화되어 있고, 낮은 저부조로 조각하여 동화사 상에 비해 볼륨감이 크게 줄어들었다. 결가부좌한 양 다리 사이에 석굴암 이후 크게 유행한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을 표현했으나, 수직이 아닌 수평의 옷주름을 넣어 물결무늬로 처리하였다. 기본적인 대의 착의법은 동화사 비로자나불과 같으나, 오른쪽 어깨의 일부분을 한번 더 감쌌으며, 대의 끝단에 꽃무늬를 넣어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점은 다르다. 전반적으로 동화사 상에 비해 볼륨감이 감소하여 왜소해지고, 옷주름은 더욱 도식화된 반면에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왕실이 발원한 동화사 비로암 상이 긴장감과 더불어 생동감이 남아 있는 반면에 가냘프고 왜소한 축서사 상은 이를 화려한 장식성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내용 출처 : 한국 미의 재발견 -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축서사 사리호의 명문은, 승려인 언전(彦傳)의 막내 누이동생이 그의 부모인 이찬(伊飡) 김양종(金亮宗) 부부를 위해 이 탑을 세우고 불사리 10과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한다는 내용이다. 사찰을 세운 해는 함통(咸通) 8년, 즉 경문왕 7년(867)이다. 그런데 민애왕(敏哀王)의 복권(復權)을 상징하는 동화사 비로암의 창건(863년) 직후에 이보다 약간 규모는 작지만 거의 같은 양식으로 원찰을 세웠다면, 이 원찰의 주인공인 이찬 김양종은 민애왕과 함께 왕위 쟁탈전 때 억울하게 죽었다가 복권된 민애왕의 측근 중신 중의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축서사는 동화사 비로암의 건립 방식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불상의 조각 양식은 사뭇 다르다. 화려한 대좌 위에 지권인을 맺은 비로자나불좌상이란 점을 제외하면, 얼굴 모양과 대의 착의 방법, 옷주름의 표현 방식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전체에 백분(白粉)이 발라져 있는데, 대좌에는 없는 점으로 미루어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찐 동화사 상에 비하여 살이 빠져 갸름하다. 옷주름의 표현도 규칙적인 평행선을 나열하여 매우 도식화되어 있고, 낮은 저부조로 조각하여 동화사 상에 비해 볼륨감이 크게 줄어들었다. 결가부좌한 양 다리 사이에 석굴암 이후 크게 유행한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을 표현했으나, 수직이 아닌 수평의 옷주름을 넣어 물결무늬로 처리하였다. 기본적인 대의 착의법은 동화사 비로자나불과 같으나, 오른쪽 어깨의 일부분을 한번 더 감쌌으며, 대의 끝단에 꽃무늬를 넣어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점은 다르다. 전반적으로 동화사 상에 비해 볼륨감이 감소하여 왜소해지고, 옷주름은 더욱 도식화된 반면에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왕실이 발원한 동화사 비로암 상이 긴장감과 더불어 생동감이 남아 있는 반면에 가냘프고 왜소한 축서사 상은 이를 화려한 장식성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내용 출처 : 한국 미의 재발견 -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사진 출처 : 법보신문 - 외딴 곳에 방치된 채 잊혀진 석조비로자나불상들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상)
이와는 별개로 봉화 축서사의 적묵당 뒤편, 낮은 언덕 위에는 본 불상과 동일한 명칭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1구 더 있다. 똑같이 통일신라 867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불당 안에서 보존된 본 불상과는 달리 노천에 놓여 있었던 탓에 좀 더 마멸이 진행되어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으며, 머리 또한 참수되어 사라진 것을 근래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광배와 대좌 또한 사라지고 없다. 전반적으로 좁은 어깨와 빈약한 가슴으로 양감이 줄어들었지만 착의법이나 옷주름 표현, 손의 형태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보이며, 축서사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본 불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거의 같은 시기에 형제불로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중이다. 이 불상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9세기에 만들어진 한국의 석조 불상으로, 신라시대 경상북도 봉화 지역의 석조공예술 및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에 1989년 4월 15일 '봉화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奉化鷲棲寺石佛坐像附光背)'란 명칭으로 보물 제995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8월 25일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
- 두산백과: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
- 한국어 위키백과: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4. 보물 제995호
문수산(文殊山)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축서사에 모셔져 있지만,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어 다소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좌(臺座)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상 가운데 하나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어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반에 만들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어 다소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좌(臺座)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상 가운데 하나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어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반에 만들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