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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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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번역4. 외부 링크5. 같이보기

1. 개요

太平廣記詳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임(成任, 1421-1484)이 세조의 명을 받아 세조 8년(1462)에 중국의 ≪태평광기≫를 국내 최초로 발간한 책. 총 50권이었으나 26권만 현존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옥산서원,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이 소장 중이다.

2. 내용


태평광기한나라 때부터 북송 때까지 중국에서 떠돌던 설화 및 야사들을 모아 978년에 총 500권으로 완성한 중국의 대표 설화집이다.#, # 중국 고대 문학의 금자탑이자 집성체로 간주된다.

한국에서는 고려 문종 때부터 반드시 완독해야 할 대표 설화집으로 지식인들에게 애호받았다. 그러나 조선 세조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직접 판목을 만들어 인쇄하지 못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비싼 가격을 지불하여 수입해와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체적인 판목을 만들고 한국의 사정에 맞게 내용을 손본 것은 조선 세조 8년(1462)에 왕의 명을 받아 성임이 태평광기상절을 만들면서부터이다. 당대의 유명한 학자 서거정[1]이 서문을 쓰고 태평광기의 내용을 총 50권으로 축약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 필기(筆記) 저술 문화가 유행하였고, 야담이라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식 전설이나 민담, 야사나 설화 등을 모은 단편 모음집이 나타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이 태평광기라 지칭한 책은 중국의 원본 태평광기가 아니라, ≪태평광기상절≫이나 역시 성임이 지은 ≪태평통재(太平通載)≫ 둘 중 하나였다.

원래는 총 50권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26권이다. 총 26권에 143개 편목, 839편 고사를 모았다.

태평광기상절은 중국 학계에서 매우 유명한 서적이다. 이는 태평광기상절이 현재 중국이 자랑하는 고전 중국문학의 금자탑, 태평광기의 현존하는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특히 중국 내에서는 완전히 멸실된 고전 6종이 온전히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북송 때 이방(李昉) 외 12명이 만들어 태청루(太淸樓)에 보관했던 송판(宋板) 원본은 소실되었다. 이후 명나라의 담개(談愷), 허자창(許自昌)이 1566년에 교각(校刻) 출판한 것이 현 중국의 태평광기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이고, 이후 간행된 중국의 태평광기들도 전부 1566년본을 저본으로 한다. 조선에서 세조의 명으로 처음 발간한 태평광기상절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판본인 1566년본보다 100여 년 정도 이전에 만들어진 판본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태평광기이다.연합뉴스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 태평광기에 대한 논문이나 칼럼이 나올 때마다 한국의 태평광기상절이 반드시 언급된다고 한다.

오직 한국에만 남아 있는 태평광기 6문은 다음과 같다. 蕃中六畜[2], 耶孤兒[3], 胡王[4], 王陟[5], 侯泳[6], 陳延美[7]

또한 중국의 태평광기와 한국의 태평광기상절은 수록된 이야기의 출전이 다르게 표기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張嘉貞은 중국 판본에서는 定命錄을 출전이라, 태평광기상절에서는 明皇雜錄을 출전이라 적었다. 현재 중국학계와 한국학계 모두 태평광기상절에 표기된 출전이 맞다고 본다.

3. 번역

2005년에 번역을 완료하였다. 연합뉴스 : 조선시대 출간된 축쇄본 '태평광기상절', 연합뉴스 : 조선판 '태평광기' 전8권으로 완간

4. 외부 링크

5. 같이보기




[1] 동국통감, 동문선, 동인시화, 필원잡기, 태평한화골계전, 사가집, 경국대전, 오행총괄 등을 저술했던 문신.[2] 後唐甲午乙未之歲, 西距吐蕃, 東連獫狁. 一二年間, 其蕃中駝馬牛羊, 無巨細, 皆頭南而臥. 乃有新産者, 目未開, 口未乳, 便南其頭. 戎人大惡之, 云: “我蕃中, 以此爲盛衰則候, 六畜頭南者, 北地將飢饉. 賤貨牛馬, 索食于漢家矣.” 則競加箠撻, 牽而向北, 旋又向南. 其華髮者歎曰: “不唯西蕃飢歉, 抑東夷亦有荐食中國之兆. 盖自數百年來, 相傳有准, 必恐鮮卑入華矣.” 至甲辰乙巳之歲, 果西蕃大飢, 地無寸草, 皆南奔. 賤貨畜馬, 携挈老幼, 丐食於秦隴之間, 殍踣者甚衆. 中國爲鬼方荐食. 盖六畜先南其首, 爲北戎之弊兆明矣.[3] 晉石高祖, 父事戎王, 禮分甚至. 此則以羅紈、玉帛、瑞錦、明珠, 竭中華之膏血以奉之, 彼則以貂皮、獸鞟、瘦馬、疲牛爲酬酢. 庚子歲, 遣使獻異獸十數頭, 巨於貆, 小於貉, 兎頭狐尾, 猱顙狖掌. 其名‘耶孤兒’, 北方異類, 華夏所無. 其肉鮮肥, 可登鼎俎. 晉祖不忍炮燔, 勅使寘於沙臺院, 穴而蓄之, 仍令山僧豢養. 自後蕃衍, 其數漸多, 沙臺爲其穿穴, 迨將半矣. 都下往而觀者, 冠盖相望. 司封郎中王仁裕, 爲其不祥之物, 因著歌行一篇, 題于沙臺院西垣以誌之, 其歌曰: “北方有獸生寒磧, 怪質奇形狀不得. 如貆如貉不貆貉, 狖指兎頭猴顙額. 善㧝攫, 能跳躑, 中華有眼未曾識. 天矯貴族用充庖, 鳳髓龍肝何所直? 彼中君長重歡盟, 藉手將通兩國情. 方木匣身皮鏁項, 萬里迢迢歸帝城. 黃龍殿前初放出, 乍對天威爭股慄. 形軀無復望生全, 相顧皆爲机上物. 懼鼎俎! 畏犧牲! 天子仁慈不忍烹. 送在沙臺深穴裏, 永敎閑處放生長. 郊外野僧諳物情, 朝晡豢養遵明聖. 澤廣羅踈天地寬, 從此不憂傷性命. 同華夷, 共胡越, 粒食陶居何快活? 雖感君王有密恩, 言語不通無所說. 鑿垣墻, 寘陵闕, 生子生孫更無歇. 如是孶蕃歲月多, 兼恐中原摠爲穴. 耶孤兒! 耶孤兒! 語淺義深安得知?” 愚嘗竊議之, 曰: “‘耶’者, 胡王也, ‘兒’者, 晉主也. 言‘耶孤兒’, 乃父辜其子也. 其後戎王犯闕, 劫晉主, 據神州, 四海百郡, 皆爲犬戎之窟穴. 耶孤兒先兆, 可謂明矣.”[4] 丙午歲十二月, 戎師犯闕. 明年三月十七日, 胡王自汴而北. 是日, 路次於赤岡, 日過晡, 忽於胡王廬帳之中, 有聲殷殷然. 若雷起於地下, 有頃乃止. 胡王懼, 召術數者, 占其吉匈, 占者紿曰: “此土地神所作.” 乃命祭禱焉. 四月中, 過邢州, 胡王遇疾. 嘗一日向夕, 有大星墜於穹廬之中, 胡王見而惡之, 但唾呪而已. 藩漢從官, 無不覩其異. 十六日, 行次欒城, 其疾遂亟, 二十一日, 乃殂. 訪其所殂之地, 則曰‘殺胡林’也. 初, 胡王之將南也, 下令陳鄭間數州, 悉使藏氷. 至是, 嬰疾熱作, 不勝其苦, 命近州輸氷, 於手足心腋之間, 皆多置氷, 已至於絶. 及其殂也, 左右破其腹, 損其腸胃, 用塩數斗以內之, 載而北去. 漢人目之, 爲‘帝羓’焉. 嘗試論之曰: “夷狄異類, 一氣所生, 歷代以來, 互興迭盛. 故周文王之時, 西有昆夷之患, 北有獫狁之難. 秦項之後, 匈奴始强, 控絃百萬, 抗衡中國. 後漢中葉, 患在諸羌, 桓靈之衰, 二虜尤熾. 魏晉已降, 衰亂弘多, 竊命盜國, 盖非一焉. 周隋之間, 吐渾爲暴, 大業之後, 突厥稱制. 皇唐受命, 頗患諸戎. 貞觀之初, 延陁內侮, 天后之際, 奚霫犯邊. 次則吐藩大興, 後則回紇作孽. 黃蔡之末, 沙陁得志, 爰及後世, 契丹最雄. 自非明主賢君, 神功聖德, 則不能攘猾夏亂華之類, 拯橫流熾㸑之災. 觀夫契丹, 自數十年以來, 頗有陵跨之意, 呑倂諸國, 奄有疆土. 淸泰之末, 橫行中原, 興晉滅唐, 假號稱帝. 幽燕雲朔, 盡入堤封, 玉帛綺紈, 悉盈沙漠. 石氏失馭, 奸臣賣國, 雄師毅卒, 束手送降, 赤子蒼生, 連頭受戮, 君父失守, 將相爲俘. 荊棘鞠於宮庭, 狐兎遊於寢廟. 雲昏日慘, 鬼哭神悲. 開闢已還, 未有若此之亂也. 豈非時鍾剝道, 天産奸雄? 不然則安得鉤爪鋸牙, 恣行呑噬, 氈裘左袵, 專爲桀驁? 且夫一女銜寃, 三年赤地, 一夫仰訴, 五月嚴霜. 豈有百萬黎庶, 膏鋒血刃, 而蕩蕩上帝, 竟無意於覆燾乎? 物不可以終否, 道不可以終窮. 天方啓漢, 眞人堀起, 渠魁殞斃, 腥穢自除. 詳其殷雷之怪, 藏氷之兆, 殺胡之讖, 星墜之妖, 則胡王之死也, 豈偶然哉? 豈偶然哉?”[5] 太原王陟, 貞元初應進士擧. 時京師宣陽里有善筮生, 常居此南垣之下, 俗號曰垣下生, 占事必中. 陟從筮焉, 生卦成, 久不復言, 又大嗟異. 陟心動, 謂己有算盡之兆, 啓問生: “豈非其祚促乎?” 生曰: “不然. 此卦, 郞君後二十三年及第. 是歲狀頭, 更兩年而生. 郞君待此人應擧, 然合同年及第. 某所以訝之, 有如此事.” 陟之筮, 貞元二年也. 陟密識之. 後擧, 累皆爲主司所絀. 陟遂五嶺之遊, 至廬陵郡, 謁太守馬該, 深爲該所知遇, 仍妻以幼女. 陟回翔嶺表, 凡十三四年. 元和初, 始復有意西上. 初至京, 陟不甚記垣下之所剋. 比張弘靖舍人知擧, 陟及第. 榜出後, 於禮部南院, 序列侯參主司, 各通姓氏. 及見首立者, 白晳如玉, 富有春秋, 卽韋瓘也. 陟忽記垣下之言, 試問其年, 韋公答云: “某春秋, 一十九年.” 陟遽應之: “先輩所隱, 秖二年, 何不誠也如是? 且先輩, 貞元四年生, 陟知之.” 瓘矍然. 乃取垣下生所記, 示於衆. 衆人大驚. 瓘由此, 以實告.[6] 唐咸通中, 擧子侯泳, 有聲彩, 亦士流也, 而闕恭愼. 豆盧琢罷相, 守僕射, 乘閑詣僧院, 放僕乘他適, 而於僧宇獨坐, 皤然一叟也. 泳自外入門, 殊不顧揖, 傲岸據榻, 謂叟曰: “大參長史乎?” 叟曰: “非也.” 又問曰: “令錄乎?” 曰: “非也.” “遠州刺史乎?” 亦曰: “稍高.” 又曰: “少卿監乎?” 答曰: “更向上.” 侯生矍然不安處, 疑是丞郞, 忽遽而出. 至門, 見僕御肩輿旋至, 方知是豆盧相公也. 歸去, 自咎悚惕, 貢一長牋首過. 賴曾有卷及門, 旣通入, 泳乃自陳乖失. 琢亦遜謝, 恕其不相識也. 留而命酒, 凡勸十盂, 乃小懲也. 仍云: “雖不奉訝, 然凡事更宜在意.” 侯慙灼, 無以自容. 先是, 豆盧家昆弟, 飮淸酒而已, 侯氏盛饌而飮. 此日每飮一杯, 回首摘席經咀之, 幾不濟, 所謂雅責也.[7] 有陳延美者, 世傳殺人, 人莫有知者. 淸泰朝, 僑居鄴下御河之東, 僦大第而處. 少年聰明, 衣着甚侈, 薰浥蘭麝, 韀馬華麗. 其居第內外張陳, 如公侯之家, 妻妾三兩人, 皆端嚴婉淑. 有妹曰李郞婦, 甚有顔色, 生一子, 未晬歲, 十指皆跰, 俱善音律. 延美亦能絃管, 常乘馬, 引一僕於街市, 或登樓, 或密室, 狎遊前接者, 皆是膏粱子弟, 曲盡譚笑章程. 或引朋儕, 至家, 則異禮延接, 出妻與妹, 令按絲吹竹, 以極其歡, 客則戀戀而不能已也. 時劉延皓帥鄴, 偶失一都將, 訪之經時, 卒無影響, 責其所由甚急. 陳密携家, 南渡, 詣大梁高頭街, 僦宅而居, 復華飾, 出入未涉. 因送客, 出封丘門, 餞賓之次, 鄴之捕逐者至, 擒之于座, 洎縶于黃砂以訊之, 具通除勦. 鄴中都將外, 經手者, 近百人. 居高頭宅, 未三五日, 陳不在家. 偶有盲僧, 丐食于門. 其妹怒其狘, 使我不利市, 召入勦之, 瘞于臥床之下. 及敗, 官中使人斸出之, 荷至鄴下, 搜其舊居, 果於床下及屋內, 積疊瘞屍, 更無容針之所. 以至隣家屋下, 每被傍探爲穴, 藏屍于內. 每客坐要殺者, 令啜湯一椀, 便矇然無所知. 或用繩縊, 或行鐵鎚, 然後截割盤屈之, 占地甚少. 蓋陳李與僕者一人, 妹及妻等, 爭下手屠割, 如是年月極深. 今偶記得者, 試略言之. 先有二人貨絲者, 相見於塼門之下, 誘之曰: “吾家織錦, 甚要此絲, 固不爭價矣.” 遂俱引至家, 雙斃而沒其貨. 又曾於內黃, 納一風聲人, 尋亦斃於此屋之下. 又有持鉢僧一人, 誘入而死之. 又於趙家菓園, 見一貧官人, 有破囊劣驢, 繫四跨銅帶. 哀而誘之, 至家, 亦斃于此屋. 又有二軍人, 言往定州, 去亦不廣, 有緇囊. 遂命入酒肆, 飮之, 告曰: “某有親情在彼, 欲達一緘.” 數內請, 一人同至其家, 取書, 至則點湯一甌, 啜呷未已, 繩菤已在項矣. 未及剉截之間, 其伴呼于門外, 急以布幕蓋屍于牆下, 令李郞出應之曰: “修書未了, 且屈入來.” 陳執鐵鎚, 於扉下候之. 後脚纔門限, 應鎚而殕于地, 後款曲剉斫而瘞之. 其膏粱子弟, 及富商之子, 死者甚衆, 不一一記之. 洎令所由發撅之, 則積屍不知其數. 有母在河東, 密差人就擒之. 老嫗聞之, 愕然嗟歎曰: “吾養此子大不肖, 渠父殺數千人, 擧世莫能有知者, 竟就枕而終. 此不肖子, 殺幾箇人, 便至敗露.” 遂搜索其家, 見大甕內, 鹽浥人膇數隻, 嫗恒啗之. 囚至鄴下, 見其子, 不顧而唾之, 自言: “其向來所殺, 不知其數, 此敗, 偶然耳.” 時盛夏, 一家竝釘于衙門外, 旬日于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