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박물관과 비교
1. 개요
箭幣(전폐).조선시대 세조가 만들어 유통시키려 했던 화살형의 금속 화폐이다.
2. 상세
'팔방통화(八方通貨)', '팔방통보(八方通寶)'이라고도 부른다. 하단의 기사에 근거하면 실물은 촉의 길이는 55mm 정도고 슴베 57mm에 위와 같이 양쪽에 팔방통보라고 적은 듯 하다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문헌 기록상으로 자모전, 무문전, 금, 은전 등이 언급되기는 하나 일단 이를 입증할 유물이 전혀 없으며, 문헌에 언급되더라도 본격적인 화폐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쌀이나 포목 등을 곡화(穀貨), 미화(米貨), 포화(布貨)라 부르며 물물교환하다가 가끔 한두번씩 사용된 정도로만 확인되고 있다. 다만 예외적으로 덩이쇠같은 경우는 매우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는 건원중보, 은병, 해동통보, 쇄은 등이 나오지만 역시 당시 미포(米布)라 불리던 쌀과 삼베포를 주로 이용하고 화폐는 귀족 등의 상위층이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했으며, 그마저도 고려 후기에 가면 당시 화폐로 사용되던 은에 동을 섞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거래할 때마다 일일이 순도를 검사하고 중량을 달아봐야 하게 되면서 모두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조선이 들어선 후 초기엔 고려시대의 해동통보, 은병, 쇄은을 사용하다 앞과 같은 문제로 모두 사용을 금지하고 태종 2년에 저화라는 것을 만들었다. 최초의 지폐, 즉 종이돈으로 닥나무 껍질을 엮어 종이를 만든 후 도장을 찍고 품질과 길이를 규격화하여 만든 것으로 성종 때까지 약 100여년간 유통된다. 그러나 조정에서 현물을 받고 저화를 주었으나 정작 조정 측에서는 현물로 저화를 태환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화의 가치는 폭락하였고, 저화로 받기로 규정했던 세금들은 실제로는 쌀로 받는 등 조정 측에서도 저화의 유통 정책에 이중잣대를 적용하여 신뢰를 잃었다. 때문에 세종대왕이 동전인 조선통보를 발행하여 저화를 고액거래, 조선통보를 소액거래에 사용토록 하게 하였으나, 조선통보는 유통에 실패했다.
이때 세조는 대군시절 아버지인 세종대왕 곁에서 화폐개혁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을 돕고 있었는데 훗날 본인이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며 만들게 한 것이 바로 이 전폐였다.
3. 특징
기존 화폐들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실용성이다. 전폐는 유엽전의 촉을 본따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평상시에는 화폐로 사용하다 전쟁시에는 화살촉으로 사용할 수 있게 고안되었다.또한 조선통보가 당시 동전의 주요 원료였던 구리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는 처지여서 40만개밖에 만들지 못해 전국적인 유통 화폐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찍어낼 수 없었던 문제점을 파악하고 주요 소재를 철로 삼았다.
4. 유통 실패
세조는 신하들이 화살촉(箭鏃)은 항상 사용하는 물건인데, 화폐(貨幣)로 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거두어서 돈으로 쓸것을 우려해 반대하였지만 역대 임금마다 전폐(錢幣)이 다르게 제조하였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결국 전폐(箭幣)를1464년 11월부터 10만개씩 제조하도록 명을 내렸다.이후 이영은이 당시에 유통되던 저폐, 전폐(錢幣)를 비판하며 포폐와 전폐만을 사용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이는 저폐는 내구도가 약해서, 전폐(錢幣)는 구리라 그릇으로 주조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에 반해 전폐는 평시에는 화폐로 쓰다가 멀쩡하면 본래 의도대로 화살촉으로, 망가지면 농경기구로 사용할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만 유통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세조 13년에 새롭게 전촉을 꺼내서 사섬시로 하여금 전폐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을 끝으로 나오지 않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