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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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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명3. 금속활자의 역사4. 한국에서의 금속활자의 의의와 한계
4.1. 기술적 한계4.2. 문자의 한계4.3. 구하기 어려운 재료4.4. 비활성화
5. 유럽6. 기타7. 관련 문서

1. 개요

금속활자()는 말 그대로 금속으로 주조활자를 가리킨다.

2. 발명

금속활자 이전에는 나무를 통째로 판을 만드는 목판, 그 후에는 목활자인쇄했다.[1] 그러다 금속활자는 고려 숙종 때인 1102년에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정설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상정고금예문을 1234년에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공민왕 때인 1372년, 직지심체요절이 고승 백운화상에게서 써졌고, 1377년의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되었으며, 직지심체요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어 있고, 그 한 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3. 금속활자의 역사

중국에 교니활자라고 불린 것이 있었는데, 아교처럼 점성이 강한 진흙을 반죽해 구워낸 후 글자모양을 깎아 만드는 것으로, 재료가 흙이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부스러져 곧 사장되었다. 하지만 목판을 통째로 일일이 깎아야하는 데 비해 활자를 한 번 만들면 활판을 짜서 출판한다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서지학계에서는 상당히 중시한다. 외에도 나무, 도자기 등 내구성이 좋지 않은 재료로 활자를 만들었기에 쉽게 파손되었으며 특히 목제 활자는 값이 싸지만 먹을 먹다 보면 쩍쩍 갈라지기 일쑤였다. 이때 고려에선 금속으로 만들어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금속 활자를 개발하였다. 목제 활자보다 제작 과정이 어려웠지만 혁신적인 내구도로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속활자는 일본, 중국 등으로 수출되었다.

4. 한국에서의 금속활자의 의의와 한계

상정고금예문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13세기)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최근 연구 결과 기존에 목판본으로 알고 있었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보물 제758-2호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증거가 나왔다.#.

또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와 직지심체요절(14세기) 등의 사례를 보아, 적어도 고려는 인류역사에서 금속활자인쇄술을 개척한 대표적인 선도국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팔만대장경 등 엄청난 스케일의 목판인쇄술을 수행하는 측면에서 나타난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조선의 태종은 “성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자소를 만들어(1403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정해자’<-계미자)를 제작했고(1407년), 세종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를 창조했다.(1434년) 그 어떤 경우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의 금속활자 발명(1447년 무렵)보다 앞선 발명품이다. 하지만 한국의 금속활자는 아래 이유들 때문에 성행하지 못했다.

4.1. 기술적 한계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는 기술적으로 미흡하여 생산성이 목판 인쇄에 비해서도 심하게 낮았다.

금속활자가 최초로 발명된 13세기까지는 활자끼리 맞물리게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미흡했기 때문에 밀랍으로 두 활자를 붙여서 찍어내는 불완전한 방식을 채택했으므로 한번에 통째로 찍어내는데 무리가 많았다. 금속 주조 능력의 부족으로 글자의 모양이 바르지 못하고 획의 굵기가 불안정했으며, 인쇄 중에 흔들림이 많아서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많은 양을 찍지 못하고 중간중간마다 밀랍을 부어서 재조립해야했다. 이때까지도 금속활자 한 판 가지고 하루에 찍어낼 수 있는 양은 하루에 열장도 채 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시대 직전까지 비슷한 방식이 유지되었으며, 민간이 아닌 국가 주도의 개발 덕분에 금속 주조 능력 자체는 발전하여 활자의 맞물림이 비교적 발전되었으나 여전히 하루에 20장 인쇄 정도가 한계였다. 세종 시대에 갑인자가 개발되어서 활자를 조립식으로 바꾸고, 활자의 틈새를 대나무로 메꾸는 등 더 발전했음에도 하루에 40장 정도가 한계였다. 이것은 조판 과정을 제외한 인쇄 속도를 말하는 것이라서, 한자의 복잡성과는 무관하다.

조선 시대에 활자의 내구성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이상할 정도로 낮은 것은 다름 아닌 인쇄 방법의 문제였는데, 활자 위에 먹물을 바른 다음 종이를 그 위에 덮고 문지르는, 말하자면 탁본과 비슷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손으로 하다보니 종이가 흔들리거나 문지르는 강도가 잘못되거나 먹의 농도가 잘못되면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졌다. 실제 인쇄본 유물을 보면 그렇게 망친 페이지가 여럿 있다.

4.2. 문자의 한계

한국의 금속활자는 주로 한자로 된 활자였기 때문에 아무리 글자당 한 개씩만 만들더라도 수천수만 가지 종류의 활자가 나오는데 이걸 일일이 맞춰서 인쇄를 하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더욱이 인쇄과정에서 중복되는 글자도 있으므로 대량인쇄는 사실상 어려웠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부터 한글 활자도 제작되어 여러 책들의 언해본들도 간행됐지만, 높은 수준의 학문서는 대부분 한자만으로 쓰인 것이 많았다.

더욱이 한자를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충분했던 지배층이나 거상, 부농같은 소수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서양에서 활자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보편화된 시기는 문자교육이 확대되면서 피지배층내에서도 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수요자체가 지배층에 국한되면 굳이 책을 대량생산할 필요가없으니 필사정도로도 충분히 그 수요가 만족된것이다.

고려나 조선 당시 평민층들도 법적으로 과거시험에 응시 할 수는 있었지만 과거에 응시 할 수 있다고 해봐야 조선후기 이전에는 문과, 무과, 잡과 초시 합격자수를 합쳐봐야 1000명 이하였기 때문에 합격률이 극히 낮았다. 게다가 책의 가격도 비싸고, 생업을 제쳐두고 글자 하나하나 외우는 데 시간을 보내야 하니 경제적으로 크게 부담이 된다는 문제가 있었고, 또한 과거에 응시한다고 해도 조선후기 이전에는 메리트가 적었고 조선후기에는 양란에 의한 무인수급이 큰 문제가 되면서 무과 합격자수를 크게 늘렸다. 그래서 천자문이나 소학같은 기초 교육서적을 제외하면 서민층에서 수요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경서언해류는 어떤 왕이든 간에 꾸준히 찍어냈다. 문제는 어떤 책이든 인쇄한 양이 적어 필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조선이 한자를 폐기하였더라도 한글패치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글은 음소문자임에도 마치 음절문자처럼 초성+중성+종성을 한 글자에 모아쓰기 때문이다. 즉 만드는 활자의 수는 줄일 수 있지만 그 뒤에는 문자조합이라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ㅣㄹㅓㅎㄱㅔ ㅍㅜㄹㅓㅆㅡㅁㅕㄴ(이렇게 풀어쓰면)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런 장점들 때문에[2] 구한말-일제강점기에는 풀어쓰기를 전면 도입하자는 주장을 주시경 선생 등이 하기도 했다. 다른 방법으로 직결식 글꼴에서 보이는 대로 어떤 조합에서든 글자의 모양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다만 한글의 조합 문제는 대량생산을 고려했을 경우에 문제가 되지만 조선시대의 인쇄물은 한 번 조립하고 찍어내는 양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 병용한글자들의 경우 글자를 분리한 것이 아니라 유니코드처럼 완성형 글자로 하나하나 만드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풀어쓰기는 장점이 많음에도 난점 역시 많아 모아쓰기 기계화가 성공하면서 도태됐고, 직결식 글꼴 형태의 글꼴은 안 예뻐서 도태됐다. 이렇든 저렇든 한자보다 만드는 활자의 종류를 확연하게 줄이고 낭비되는 활자를 최소화 시킨다는 장점을 가지기 때문에 한자보다는 낫다.

한글은 유니코드에서 11172자를 차지한다. 여기에 조선시대때 쓰였던 옛한글 표기까지 감안하면 더욱 늘어난다. 물론 거의 안쓰이는 문자들을 생략하면 줄여버릴 수는 있으나, 아무리 적게 잡아도 4자리수가 필요하다.

금속활자 자체가 목판본처럼 대량생산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글자를 하나하나 심고 소량 인쇄한 뒤 털어내는 방식으로 필요한 만큼만 활자를 만들었다. 활자인쇄는 글자를 심고 나서 필요한 만큼 인쇄한 뒤 글자를 다 털어낸다. 목판본은 한번 새기고 나면 글자가 깨지거나 닳아서 판독하기 힘들 때까지 얼마든지 찍어냈다.

보통 어조사처럼 많이 쓰는 단어는 한 판에서 충분히 쓸 수 있도록 많이 만들고 인쇄가 끝나면 털어냈다. 한글 서적은 경서언해류, 외국어 학습서적 등 수요는 꾸준히 있었지만, 인쇄물의 양이 적고 책값도 상당히 비싸서 이를 빌려 필사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활자 수가 부족한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4.3. 구하기 어려운 재료

원래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으로 주조했는데, 납은 물러서 오래 쓰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3] 그래서 세종 때부터 활자의 재료가 구리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구리는 한반도에서는 중국, 일본과 달리 생산량이 너무 적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명나라를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15세기경에는 명과 일본에서 구리를 어려움 없이 대량으로 수입하여 이용할 수 있었다. 위키백과의 '조선의 활자' 항목에 따르면, 세종 때 하루에 주조하는 활자 수는 약 3,500자로, 구텐베르크가 주조한 활자수의 약 10배에 달했다고 한다. 하루에 3,500자를 주조한 활자는 갑인자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정조때까지 주조되었을 정도로 조선의 표준 서체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6세기부터 명이 주변 민족으로부터 갖은 침략을 당하고, 조선에서도 왜구가 극성을 부려 대일 외교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조선에서 구리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에도 침략에 대한 조선의 보복을 염려한 청과 일본의 불안감 때문에 구리가 조선 전기만큼 충분히 수입되지 못했다. 강철이 대량생산되기 전에는 대포는 화약의 폭발반동을 받아낼수 있게 탄성이 좋은 구리합금인 청동으로 만들었다. 상평통보 등 화폐 주조에 사용할 구리도 부족하다는 원성에 사찰의 구리 범종까지 징발해 녹여서 화폐로 만들던 시절이라 활자를 구리로 만들 여유는 전혀 없었다.

구리 가격이 비싸다 보니 저렴한 목판인쇄가 성행했다. 흔히 고서를 분류할 때 경판본(京板本), 완판본(完板本) 등으로 구분하는데, 경판본은 한양에서, 완판본은 완산, 즉 전주에서 목판본으로 인쇄되었다는 뜻이다. 이 외에도 안성과 대구에서도 목판인쇄가 성행하였다. 금속활자는 만들어진 해의 60갑자를 쓰지만 목판본은 주로 만들어진 지방이나 책 이름을 붙인다. 금속활자의 경우 중앙관청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중앙에서 만들어진 서적은 각 도로 전해져 목판을 새겨 다시 보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로 책 수요가 늘어나 훈련도감에서 책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나 활자가 부족해 훈련도감자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이전에 있던 활자들을 섞어야 할 정도로 물자가 부족했다. 그 덕에 훈련도감에서 제작된 책에는 각종 활자들이 뒤섞여 있다. 물론 활자를 만들고 책을 찍어내는 것은 사병의 몫이었다. 훈련도감자 제작 원인이 잉여가 되어버린 병사들을 어떻게 써먹을까 하다 나온 것이다. 그만큼 활자 제작과 인쇄에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는 증거이다.

4.4. 비활성화

조선 전기 당시는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서적 간행이 거의 없을 정도로 출판물 시장의 형성이 미비했으며, 조선 조정 역시 국영제 수공업을 위주로 운용하여 국가가 필요한 만큼의 생산을 하는 체계로 제도를 정비하였기 때문에 유럽 같은 민간 시장 주도에 의한 활성화를 바라기는 무리였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은 인쇄술로 이어졌지만 한국의 금속활자는 활자본의 교체 주기를 늘린 정도에 불과했다. 갑인자 이후로 기술혁신도 거의 없었으며, 국가에서 사용하는 인쇄도 목판과 금속활자판 기술이 계속 병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민간 출판물 시장 활성화 이후에도 목판인쇄를 주로 사용하였지, 금속활자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을 봐도 금속활자라는 단편적인 기술은 비용 대비 생산성 혁신을 늘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국 국가에서 일부 인쇄물을 제작할 때만 쓰이는 수준에서만 유지되었다.

5. 유럽

한국에서는 흔히 유럽 쪽 금속활자의 첫 개발자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로 알려져 있으며, 구텐베르크의 발명과 고려의 금속활자를 비교하는 식의 교양 수준의 상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려-조선의 금속활자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1대 1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의 글씨를 종이에 찍어주는[4]인쇄기와 인쇄술의 발명가이다. 구텐베르크가 자신의 인쇄기에 사용할 금속활자 규격도 같이 만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쇄기를 사용하기 위해 금속활자를 같이 고안한 것으로 금속활자는 인쇄기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서구 사학계는 구텐베르크를 인쇄기의 발명가라고 하지 금속활자의 발명가라고 부르지 않으며,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에 대해선 관심도 별로 가지지 않는다.

기존 인쇄술에서 재료를 금속으로 바꾼 거에 지나지 않아 생산성의 혁신이 없었던 고려의 금속활자와 달리,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기존의 활자 단독 사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간편한 인쇄를 가능하게 하였다. 1분에 2~10장 인쇄가 가능했다. 활자 자체도 구텐베르크의 금속 세공업 경험 덕분에 주조 수준에서 매우 진보한 것이었고, 인쇄용 서체와 끈적하고 퍽퍽한 인쇄용 잉크도 따로 개발한 등, 여러모로 구텐베르크 이전의 활자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다.

이후에 유발된 사회, 문화적 변화 측면으로 비교해 봐도, 고려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동등한 비교의 여지가 없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대해 설명하는 책 중 많은 것이 종교개혁과 연관을 시키는 바람에 종교개혁 덕분에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퍼졌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정 반대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1450년으로부터 67년이 지난 1517년에야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이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사용하는 인쇄소는 온 유럽에 240개나 세워져 있었으며, 그 동안 인쇄소에서는 2000만 권에 달하는 서책을 생산하였으며, 이것은 이전까지 인류가 생산한 책의 총량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책을 찍어낼 수 있었던 경제적인 목판 인쇄가 이전부터 쓰였으며, 명청 시대 및 일본 에도 시대에는 상업적 민간 인쇄는 대부분 목판 인쇄에 의존했다. 조선에서도 민간만이 아니라 국가 주도의 서적 인쇄에서도 대량 생산에는 그냥 목판을 계속 사용했다. 그 유명한 동의보감조차 대량으로 발부하는데에 목판이 사용되었지 금속활자는 딱히 사용되지 않았다.

6. 기타

  •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으로 공식 인정을 받자 가장 반발하던 게 중국이었다. 최대의 떡밥은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이라는 부분이다. 이규보(1168 ~ 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1234년,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28부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39년 이전에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활자본이나 유물이 없어 인정 받지 못하고 있었다. 2010년 고려시대 활자라는 '증도가자'가 공개됐으나 위조 논란이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존에 있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판본 중 하나가 금속활자본으로 밝혀 졌기에 증도가자에 대한 논란도 다시금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 2015년 11월 30일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개성 만월대 발굴 조사에서 고려시대 금속활자를 발굴했다. 이 활자는 정확한 출토지와 발굴 경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활자 제작시기는 만월대가 소실된 1361년 이전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비파괴 검사나 성분 분석 등을 거쳐 정확한 제작 연도가 확인되면 1377년 제작된 직지심체요절은 콩라인으로 밀려난다.
  •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직지심체요절 이전의 금속활자본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이는 단순한 중국 측의 일방적인 역사왜곡 시도는 아니고, 주류 학계에서도 중국이 한국보다 앞서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한 나라로 유력하게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수많은 유물들이 소실된 탓에 고려보다 더 빨리 금속활자를 제작했다는 증거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1103년 발행된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을 금속활자본으로 주장했으나 금속활자가 아니라 찰흙활자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1341∼1345년 사이에 인쇄된 어시책(御試策)이 금속활자본이라 주장했으나 일본 정가당(靜嘉堂) 문고에 소장된 어시책의 원본을 확인한 결과 1341년 편찬된 목판본으로 확인됐다. 원(元)나라의 왕정(王禎)이 1298년에 발간한 목판본 조활자인서법(造活字印書法)에 있는 '근세에 주석으로 활자가 기록되었다'라는 기록으로 이를 남송(南宋) 시기의 금속활자에 관한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근세가 정말 남송을 가리키는지도 불분명하고 실제 유물과 원판이 확인된 적이 없어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국에선 자기들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고 교과서로 배운다. 대체로 1154년부터 지폐 인쇄에 사용됐다는 동활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실증되는 중국의 금속활자 활인본은 1490년 화씨회통관에서 간행한 송제신주의라는 책이다.# #
  • 어린이 드라마 점프에선 금속활자를 다루고 금속활자를 지키는 에피소드가 있다.
  • 2020년 4월 21일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제758-2호)이 그전까지의 해석인 목판본 인쇄가 아닌 금속활자본 인쇄임이 밝혀졌다. 직지보다 무려 138년이 앞선 셈이다. 소장자 원진스님은 이 책이 금속활자본이라는 확신을 갖고 박상국 교수에게 재감정을 요청했고, 박상국 교수는 이에 비판적 검토를 실시했다. 그런데 금속활자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글자 모습이 나왔고, 책에 등장하는 최이의 발문 중 ‘중조주자본(於是募工 重彫鑄字本)’ 구절을 한학자 이정섭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정섭 선생은 한치의 주저없이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다시 주조한다’고 해석했다. 즉 90년간 잘못 번역한 셈이다.#
  • 2021년 6월 2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인 인사동 79번지에서 15~16세기 조선 전기에 사용된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자 활자 1000여 점과 한글 활자 600여 점이 출토됐다.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출토품들 가운데 가장 시기가 늦은 유물이 1588년을 뜻하는 만력 무자년 간기가 새겨진 소승자총통이어서 일러도 1588년 이후에 묻힌 것이 확실하다. 인사동 피맛골 재개발 지구 유적을 발굴하던 수도문물연구원 오경택 연구원장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가까워 당시 전란을 맞으면서 유물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두고 피난을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1 #2 #3 #4

7. 관련 문서


[1]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마침 우리나라 문화재다보니, 암기 레벨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직지심체요절과 간혹 헷갈리기도 하지만, 목판이 금속활자보다 이전 테크기 때문에 시대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신라시대고, 직지심체요절이 500여년 이후 고려시대의 문화재다.[2] 특히 근대에는 타자기의 존재 때문에 풀어쓰기의 실용성이 더욱 돋보였다. 공병우 타자기가 모아쓰기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이후 컴퓨터마저 보급된 현대에 와서는 관련 주장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다.[3] 다만, 이게 무조건 금속활자 사용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다. 발상을 전환하여 쓰다가 녹여서 활자제조용 틀에 붓고 굳히면 재활용이 가능한데, 유럽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특성 덕에 효율성이 높아져서 널리 쓰였다. #구텐베르크식 금속 활자의 장점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와 조선 금속활자는 방식이 다름[4] 그래서 Printing Press다. 활자판에 잉크를 바르고 인쇄기에 종이를 넣고 레버를 돌려 활자를 종이에 눌러주고 그대로 당기기만 하면 글씨가 찍혀 나오는 물건으로 기존 활자의 문제점인 필사 보다 별로 뛰어나지 못한 생산성 문제를 싸그리 해결해 버린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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