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3:43:26

조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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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操墓 / 高陵

1. 개요2. 발굴?3. 의문점4. 진행 상황5. 기타 이야기거리

1. 개요

삼국시대의 인물인 조조(曹操)의 무덤. 정식명칭은 고릉(高陵)이다. 따라서 표제어가 고릉이 되어야 하나 발굴 내용에 대해 의문이 많기 때문에 표제어를 그냥 조조의 무덤을 가리키는 의미인 조조묘로 표기하였다.

조조(曹操)가 무덤 72기를 만들어 자신의 사후 무덤이 파헤쳐지짐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는 삼국지연의의 순수한 허구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파헤쳐지는 부장품 따위 묻지 말고 서문표(西門豹)[1]의 사당 곁에 묻어달라고 말하곤 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업중가(業中歌) 마지막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글줄 깨나 하는 자들아, 가볍게 무덤 속의 사람을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무덤 속의 그가 되려 그대들을 하찮다고 비웃으리라
연암 박지원의 저서 열하일기의 <구외이문(口外異聞)>에 이런 내용이 있다. #
1748년 청 황제(건륭제)가 장하(張河)에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헤엄치는 자가 별안간 허리가 끊어져 물 위에 떠올랐다. 황제가 군졸 수만 명을 풀어 그 냇물 옆을 파서 물을 돌리고 살펴보니, 물 속에는 수많은 쇠뇌에 살이 메워져 있고 그 밑에는 무덤이 있었다.

드디어 발굴하여 한 관(棺)을 얻었는데, 은해(銀海: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와 금부(金鳧: 물오리 모양 금도금 향로) 등 부장품도 있거니와 황제의 면류관(冕旒冠)과 옷차림을 갖추었으니, 곧 조조(曹操)의 시신이었다. 황제가 친히 관묘(關廟: 관우 사당) 소열(昭烈: 유비)의 소상(진흙상) 앞에 나아가 그 시신을 꿇리고 목을 잘랐다. 이는 비단 천고 신인(神人)의 분통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쾌히 70총(塚: 무덤)의 의안(疑案: 의심스럽거나 의혹에 싸인 안건)을 깨쳤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거기에만 있을 뿐이지. 청사(淸史)나 청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기록에 이런 내용이 없다.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기록을 왜 생략했을까? 동양사회에서 조조의 인기를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조는 높으신 분들의 변덕스러움과 기만 책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학자와 민간에서는 평판이 안 좋았음을 생각해보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포송령이 쓴 요재지이에 비슷한 내용의 조조묘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중국에서 비슷한 소문이 돌았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12월 말에 허난성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2. 발굴?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

위 내용을 요약하면, 조조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무덤규모가 왕후의 것이라는 점.
  2. 유물의 연대가 후한(後漢) ~ 북위(北魏) 시대라는 점.
  3. 고분의 위치가 문헌과 일치함.
  4. 조조의 유언대로 부장품이 대체로 소박하다는 점.
  5.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 주인의 연령이 60대 전후로, 사망 당시 조조의 나이(65세)와 거의 일치하고 유골 주인의 키가 150~160cm로 조조의 키(7척(161cm))와 거의 일치한다.
  6. 결정적으로, 무덤에서 '위무왕상소용OOO(위무왕이 평소에 쓰던 OOO)'라고 새겨진 명문이 발견됐다!

이 정도면 충분히 조조의 무덤이 맞는 듯하다고 하면 좋겠지만, 아래와 같이 의문점들이 나왔다.

3. 의문점

워낙 무덤 주인이 유명한 사람이고, 1800년 만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꽤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미 도굴꾼이 다녀갔다는 점, '가짜 무덤 72기설'이 널리 알려진 탓에 이것이 그 여러 가짜 중 하나가 아닌지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 학계에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72기 가짜 무덤설은 후대의 창작이 명백하다. 도굴을 막겠다고 가짜 무덤을 72기나 만듦은 무척 어리석은 짓이다.[2] 그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참고)

첫째, 아내 변씨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변씨는 태황태후가 된 후 사망하여 조조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따라서 조조의 무덤에서는 변씨의 유해와, 태황태후의 무덤에 당연히 들어갈 태황태후의 인새가 발견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해당 무덤에서는 변씨의 유해도 태황태후의 인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인새는 도굴당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해가 발견되지 않는 점은 치명적이다. 해당 무덤에서는 조조 이외에 40대 여자와 20대 여자가 발견되었는데, 이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맞는다는 쪽에서는 40대 여자가 바로 변씨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변씨는 사망 당시 70세였으므로 어불성설이다. 또한, 조조의 무덤에 다른 여성들이 합장되었다는 기록도 없으므로 40대 여자와 20대 여자의 정체도 알 수 없다.

둘째, 조조의 위무제로서의 인새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조비가 황제가 되고 조조를 위무제로 추존한 후, 조조의 무덤은 조조의 유언에 따라서 검소하게 만든 것이므로 조조의 무덤 자체를 다시 화려하게 꾸미거나 하지는 않고 다만 그 앞에 석실을 추가로 만들어 금으로 만든 인새를 보관했다고 한다. 금새 자체는 도굴되어 없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금새가 보관되어 있었을 석실조차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문제이다.

셋째, 조조는 공경과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는 포상의 의미로 자신의 무덤에 배장하도록 했다. 따라서 조조의 무덤 주변에는 공신들의 무덤 여러 기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무덤은 단일묘이며 주변에서 다른 공신들의 무덤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넷째, 조조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진주와 마노 등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조조의 무덤이 맞는다는 쪽에서는 그 정도의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충분히 검소한 무덤이라고 주장하지만, 기록에는 단순히 검소하게 장례를 지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조조의 유언에 따라 구슬 종류는 전혀 넣지 않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섯째, 해당 무덤은 구조 자체가 후한 시대의 천자나 왕의 무덤 양식과 맞지 않는다.(#) 이 점이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조조의 무덤이 진짜라고 주장한 쪽에서 조조가 천자의 예우로 안장되었다는 기록을 거론하며, 해당 무덤 양식이 후한말의 고등급의 묘장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의 무덤이라고 하는 벽돌무덤은 어디까지나 후한시대의 '고등급'의 묘장 형태이지 왕후에게 걸맞은 '최고등급'이 아니다. 무덤이나 그 부장품은 간소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덤의 구조를 낮은 등급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조조를 격하했다는 의미가 되므로 이해하기 어렵고, 조조가 천자의 예에 따라 안장되었다는 기록에도 어긋난다.

여섯째, 해당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석패 전부가 실제로 학자들이 조조의 무덤에서 발굴한 것은 아니다. 도굴범들에게서 이러한 석패를 압수하고 해당 무덤에서 도굴했다는 진술을 받았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들이 사실은 그들의 '영업 기밀'에 해당하는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거나 위조된 것이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조조의 무덤이라는 벽돌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위무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석비는 위조된 것이 분명하며 진품일 수 없다는 주장이 대두하여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조조의 무덤에서 위무왕이라는 이름의 석비가 출토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이는 조조가 위무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조조의 시호는 어디까지나 무왕이지 위무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조조는 살아생전에 위왕(魏王)이었지만 사후에는 무왕(武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므로 위왕에서 무왕으로 호칭이 변한 것이며, 더 이상 위왕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위왕이라는 작위는 엄연히 조비가 계승했다. 사망한 사람에게는 시호로 호칭하고 살아생전 명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생전에 위왕이라고 부름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 큰 결례이기 때문에 이름 대신 관직명 '위왕'으로 불렀을 뿐이고, 사후에는 공식적인 시호가 있기 때문에 시호로 칭해야 맞는다. 또한 후대에서는 살아 있는 다른 위왕과 혼동될 수 있다.[3] 따라서 무덤의 석비에서 위왕이라고 칭할 이유가 없다는 것. 참고에 잘 정리되었다.

후대에는 그를 위무제(魏武帝)라고 호칭하지만, 이는 조비가 위나라를 세운 후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무제가 아닌 위무제라고 부르는 것은 위나라가 멸망한 후에나 쓰이는 명칭이고 위나라 당시에는 그냥 무제라고만 호칭했다. 즉 한나라가 남아있을 때는 그는 무왕이고, 위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무제이며, 위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위무제가 된다는 것. 위무왕이라는 칭호는 어느 시대에도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위무왕이라는 명칭이 새겨진 석비는 후대의 조작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4]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해 조조를 '위무'라고 칭한 사례를 들며 이미 반박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조조를 칭하는 '위무'의 의미는 '위무제'이지 '위무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학문상 충분히 제기될 만한 의문점으로 보인다. 어쨌든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명확하게 밝혀질 듯하다. 하남에서 발견되었다는 무덤은 2기의 한묘이며, 그중에서 2호 묘만을 발굴한 상태이고 1호 묘는 열어보지 않았다.

4. 진행 상황

여러 의문점은 여전히 남았지만 결국 2010년 1월 29일, 중국 국가문물국이 조조의 무덤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2018년 3월 26일, 허난성 문화재고고연구원은 이 무덤에서 발굴된 유해와 부장품 등을 분석하여 60대 남성의 유해는 조조, 여성 유해 2구는 각각 무선황후 변씨유부인이라고 결론내렸다. 기사 보기

한국의 삼국지덕후 커뮤니티에는 조조의 진짜 묘라고 결론내리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있지만 진짜라고 우겨놓고서 이제와서 가짜라고 번복하기 창피하니 이대로 우격다짐으로 밀고나가려는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와중에 우금관우한테 싹싹 비는 그림 얘긴 없다 다만 그 그림은 순전히 인성질하려고 추가한 그림이므로 우금이 보고 난 뒤에 삭제되었을 수도 있다.

5. 기타 이야기거리

  • 조조는 도굴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아 평생 도굴에 신경썼고, 부장품으로 군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주요 수입원이기도 해서, 조조 휘하 부대에는 항상 도굴 전담 부대가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무덤을 만들 때도 도굴당할 것을 염려해 위나라 영토 각지에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니, 조조묘 관련 의문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1] 신사를 때려 부수고 착취를 막은 위(전국시대)의 관리.[2] 특히 조조는 유언으로 '아직 천하가 어지러우니 장례식은 3일만 치르라' 가 있었으니 장례식을 3일만 치르라고 한 사람이 가짜 무덤을 72기나 만들라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3] 즉 생전 위왕이었던 무왕 조조가 되는 것이다.[4] 물론 이 설명만으로는 조조의 무덤이 아닌 다른 시대의 위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은 있지만, 즉 다른 시대에 위무왕이라는 불리는 인물인 염위(冉魏)의 염민(冉閔)이나 후진(後秦)의 요양(姚襄)의 묘라고 가정을 하면 시대가 맞지 않아서 시대에 맞는 적당한 후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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