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26 22:55:01

동군 전투

1. 배경2. 발단3. 전개4. 결과

1. 배경

후한 중기 이후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전국 도처에서 잇달았다. 비록 황건적의 최초 주력군은 진압되었지만 잔존 세력을 비롯한여 이전에 봉기한 무리와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새로 일어난 봉기군이 여전히 폭풍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로 거세게 일어났다. 후한 전역에서는 장각이 난을 일으켜 중국을 뒤흔들자 각지에서 도적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박릉(博陵)의 장우각(張牛角), 상산(常山)의 저비연(褚飛燕), 황룡(黃龍), 좌교(左校), 우저근(于氐根), 홍농(弘農)의 장백기(張白騎), 유석(劉石), 좌자장팔(左髭丈八), 평한대계(平漢大計), 사예연성(司隷緣城), 뇌공(雷公), 부운(浮雲), 백작(白雀), 양봉(楊鳳), 우독(于毒), 오록(五鹿), 이대목(李大目), 백요(白嶢), 수고(畦固), 고추(苦㵵)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세력이 큰 무리는 2~3만 명에 이르렀고, 세력이 작으면 6000~7000명에 이르렀다.

특히 장우각과 저비연 두 세력이 제일 강했다. 그들은 연합하여 영도(癭陶)를 공격했다. 장우각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무리들에게 "비연을 우두머리로 받들라."라고 명했다. 이후 저비연은 성을 장(張)으로 바꿨다. 비연은 본명이 연(燕)이다. 그가 용맹하고 민첩하여 군중이 그를 비연(飛燕)이라고 불렀다.그리고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도 대부분 비연을 따랐다. 그가 이끄는 무리는 금세 100만에 달했다. 비연은 하북과 산서 일대의 산간 계곡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흑산(黑山)'으로도 불렸다. 당시 하북의 여러 군은 모두 피해를 입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대처하지 못했다. 이에 장연은 사자를 도성으로 보내 투항을 요청했고, 장연은 평난중낭장(平難中郞將)에 임명되어 하북 지역 산간의 일을 맡았다.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장연은 천하의 호걸들과 연합했던 적도 있었다. 장연은 원소와는 적대적이었다.

2. 발단

191년(초평 2년) 가을에 흑산군의 우독, 백요, 수고 등 군사 10만여 명이 위군(魏郡)과 동군(東郡)을 공략하고 아울러 동군 태수 왕굉(王肱)을 크게 무찔렀다. 당시 원소한복의 수중에서 기주를 빼앗은 뒤 스스로 기주목이 되어 있었다. 위군은 기주에 속했고, 흑산군은 숙적이었다. 원소는 그들을 반드시 없애고자 했고, 이에 조조에게 흑산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조조가 황하의 남쪽을 도모함으로써 변화를 기다려 얻을 수 없었던 곳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조조는 병사를 이끌고 동군으로 들어가 복양에서 백요의 부대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이 전쟁이 전개된 양상은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 조조가 소수로 다수를 격파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조조가 흑산군 백요의 부대를 격파하자 원소는 조조를 추천하여 동군 태수로 삼고 동무양(東武陽)을 치소(治所)로 하여 다스리게 했다. 조조는 이로써 근거지가 생긴 셈이 되었다. 조조는 농민 봉기군을 진압하면서 성장해왔는데 이것이 첫 걸음이었던 것이다.

3. 전개

물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2년(초평 3년) 좀, 조조는 군사를 돈구(頓丘)에 주둔시켰다. 흑산군의 우독 등이 이를 틈타 동무양을 공격하자 조조는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우독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우독은 이 소식을 듣고 동무양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할 때 장수들은 모두 군사를 되돌려 일단 스스로의 근거지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조조는

"손빈조(趙)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魏)나라를 공격했고, 경엄은 서안으로 달아나기 위해 임치를 공격했소. 우리가 서쪽을 공략한다고 적군에게 소문을 내고 회군하면 포위된 동무양은 저절로 포위가 풀릴 것이오. 만역 회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적의 본거지를 격파할 수 있으니, 분명 동무양은 잃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조조의 말은 현실이 되어 우독은 동무양을 포기하고 본거지를 구하기 위해 돌아갔고, 동무양은 포위에서 풀려났다. 조조는 승세를 타고 군사를 움직여 수고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당시 흉노의 남선우(南騸于)의 아들 어부라(於夫羅)가 한나라를 도와 봉기를 진압하고 내지에 머물러 있었는데, 천하가 소란해지자 마침내 흑산군과 연합해 태원(太原)을 정벌하고 하내를 공격하여 도성을 약탈하였다. 조조는 수고를 격파하고, 다시 내황(內黃)에서 어부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4. 결과

조조는 일련의 전투에서 흑산군에게 크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적으로 토착 지주 계층의 이익을 완강하게 지키려 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동군 일대에서 벌어진 흑산군과의 전투는 조조가 지닌 비범한 군사적 재능을 드러낸 계기였다. 조조는 병법을 숙독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적용할 기회를 얻자 실전에서 활용했던 것이다. 조조는 적은 군사력으로 우독, 백요, 수고 등이 이끄는 10만 군사를 일거에 무너뜨렸으며, 손빈이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한 계책을 사용하여 군의 치소(治所)인 동무양의 포위망을 풀었다. 또한 조조는 '요격(要擊)' 전술을 이용하여 산대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행군 중인 수고의 군사를 중도에서 가로막아 습격했고, 아울러 적이 미처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내황에서 어부라를 크게 무찔렀다. 이 모든 승리는 조조가 병법에 뛰어났으며, 아울러 고대 병법에도 정통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조조는 흑산군의 우독, 백요, 수고 등을 격파했지만 흑산군과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건안 초년에 조조가 하북의 원소 부자를 토벌할 때 흑산군은 망설임 없이 조조 편에 섰고, 장연은 평북장군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자 장연은 무리를 이끌고 업현(業縣)으로 와서 안국정후(安國停侯)에 봉해지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이는 곧 장연이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했다는 뜻이다. 흑산군은 황건군 기반의 청주병과 더불어 조조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