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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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承생몰연도 미상
서진, 동진 시대의 인물. 왕담의 아들. 성정이 청허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말할 때 문장을 가식적으로 꾸미지 않아,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믿을 만한 인물로 통했다.
2. 생애
약관의 나이에 명성을 얻었고, 태위 왕연은 그를 남양(南陽)의 명사 악광에 견줄만 하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영녕 원년(301년), 장사왕 표기장군 사마예의 부름을 받고 그의 막료로 들어가 참군이 되었다. 이후 팔왕의 난이 점점 격렬해지자, 왕승은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동해왕 사공 사마월은 도망온 왕승을 맞아들여 종사중랑으로 삼았다.광희 원년(306년) 6월, 혜제 사마충이 낙양으로 환궁할 때, 혜제의 대가(大駕)를 영접한 공으로 남전현후(藍田縣侯)에 봉해졌다. 또, 조정에서 그를 상서랑으로 삼으려 했지만, 왕승이 사양했다.
영가 원년(307년) 3월, 동해왕 태부 사마월이 허창에 진수하자, 왕승은 기실참군에 임명되어 그를 따라갔다. 사마월은 왕승을 중히 여겨, 그에게 자신의 적자 사마비(司馬毗)의 교육을 맡겼다. 그렇게 사마월을 섬긴 지 수 년이 지나고, 어머니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사마월이 불허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동해태수에 임명되어 그곳으로 부임했다. 왕승은 청렴결백하게 지역을 다스렸고, 세세한 일에 구애받지 않아 간소하면서 관용적인 정치를 펼쳤다. 한번은 말단 관리가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걸려서 잡혀오니, 왕승은
"문왕(文王)의 동산은 모두의 것인데, 연못의 물고기 따위가 어찌 아까울 수 있겠는가!"
라며 해당 관리를 용서했다.오래지 않아, 서진의 관직을 버린 뒤, 하비(下邳)를 거쳐 장강을 건너고, 건업에 이르렀다. 낭야왕 진동장군 사마예는 그를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왕승의 명성은 강동에서도 드높아, 똑같이 북에서 도망쳐온 왕도, 위개(衛玠), 주의, 유량 등 쟁쟁한 명사들을 제치고 '중흥제일(中興第一)'이라 칭송받았다. 이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겼다. 아들 왕술이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