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7:08:16

역대제왕도권


歷代帝王圖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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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그림의 주인공들

1. 개요

당나라 초기의 재상이자 유명한 화가인 염입본(閻立本)[1]의 작품으로 길이 531cm, 폭 51.3cm에 달하는 대작.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13명의 초상화를 두루마리 형식으로 그렸다. 여기에 선정된 모델들은 명군이나 암군 또는 폭군으로, 이들의 모습을 보고 후세가 본을 받거나 타산지석 삼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작품 속 인물들 중에서도 특히 남조 진나라, 북주, 수나라 황제들의 모습을 보고 실제와 흡사하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 나라가 망한 때가 염입본이 활동한 시대로부터 채 백 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 특히 북주 무제 우문옹의 경우에는 2024년에 무덤에서 발견된 두개골을 기반으로 제작된 복원도가 제왕도권에 묘사된 외모와 무척 빼닮아서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다. 한편 서진 무제 사마염의 초상화는 어째서인지 한 무제의 초상화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2. 그림의 주인공들

역대제왕도권에 등장하는 황제들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순서 제호 어진
01 전한 8대 황제
소황제 유불릉
(昭帝 劉弗陵)[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4px-HanZhaoDiLiuFuling.jpg
02 후한 초대 황제
세조 광무제 유수
(光武帝 劉秀)
파일:Han_Guangwu_Di.jpg
03 (조위) 초대 황제
고조/세조 문제 조비
(魏文帝 曹丕)
파일:Cao_Pi_Tang.jpg
04 주(동오 초대 황제
대제) 손권
(吳主 孫權)
파일:Sun_Quan_Tang.jpg
05 주(촉한 초대 황제
소열제) 유비
(蜀主 劉備)
파일:Liu_Bei_Tang.jpg
06 진(서진) 초대 황제
세조 무제 사마염
(晉武帝 司馬炎)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6px-Jin_Wu_Di.jpg
07 (남진) 4대 황제
선제 진욱
(陳宣帝 陳頊)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en_Xuandi_Tang.jpg
08 진 2대 황제
세조 문제 진천
(陳文帝陳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4px-Chen_Wendi_Tang.jpg
09 진 3대 황제
폐제(임해왕) 진백종
(陳廢帝 陳伯宗)
파일:external/l.paipaitxt.com/88_8596186_d222f31ab1151ca.jpg
10 진 말대 황제
후주 진숙보
(陳後主 陳叔寶)
파일:external/lh3.ggpht.com/%E9%99%B3%E5%BE%8C%E4%B8%BB-%E6%AD%B7%E4%BB%A3%E5%B8%9D%E7%8E%8B%E5%9C%96-10-%E5%94%90%E9%96%BB%E7%AB%8B%E6%9C%AC.jpg&filename=IMG_0695.jpg
11 주나라(북주) 3대 황제
고조 무제 우문옹
(後周武帝 宇文邕)
파일:북주무제어진.jpg
12 수나라 초대 황제
고조 문제 양견
(隋文帝 楊堅)
파일:Sui_Wendi_Tang.jpg
13 수 2대 황제
세조 명제[3]
양광
(隋煬帝 楊廣)
파일:수양제어진.jpg

[1] 참고로 삼국시대 장로의 공조였던 염포의 11대손이다.[2] 후한 광무제가 전한 한경제 이후 황제들의 묘호를 없앴다. 왜냐하면 광무제가 경제의 후손이기 때문이라 자신과 별 상관이 없는 무제 이후의 황제들의 정통성을 없애기 위해 묘호를 삭제했다. 하지만 물론 원래부터 묘호가 없는 황제들도 있었는데 그중 소제도 원래부터 묘호가 없었다.[3] 이게 정식 시호지만 방탕하고 음란하다는 뜻의 양제로 훨씬 많이 알려져 있다. 왜냐면은 수를 무너뜨린 당나라가 어떻게든 정통성을 위해 까야했기 때문이었을수도 있지만 이 사람 치세가 당시 인구를 반정도로 줄여놓을 정도로 개막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태종과 측천무후가 수습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