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의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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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音汁伐國음질국(音質國)이라고도 한다.[1] 원삼국시대 진한(경상도) 지역의 소국들 중 하나.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일대에 위치했다.[2] 경주에서 시작한 초기 신라(사로국)의 성장 과정에서 조연에 해당한다.
그러나 후대의 군현 편제 및 개편 과정에서 현재 안강읍 쪽이 붙으면서 음즙벌국이 마치 안강에 있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음즙벌국은 안강읍을 중심지로 하는 나라가 아니라 안강 동쪽의 일부분에 걸치면서, 현재의 포항 시가지, 북쪽으로는 흥해읍과 울진군 일부분, 남쪽으로는 경주 감포읍을 지나 울산에 접하는 지역까지 동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국가로 보기도 한다(이희준, 2007년).
신라 하대의 일이긴 하지만 안강읍 일대는 사실상 국내(國內), 즉 원(原) 신라국으로 여겨졌다. 현재 안강읍 한복판에 있는 흥덕왕릉이 이를 방증한다. 신라의 경우 마지막 경순왕을 제외하면[3] 신라왕릉들은 모두 지금의 경주시 권역 이내, 즉 원 신라 영역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4]
사실 이렇게 보는 것이 해석에도 자연스러운데, 강원도 삼척 근방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실직곡국과 안강읍에 있는 음즙벌국이 영토 분쟁을 했다는 것은 두 나라가 너무 떨어져 위치하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 발전 정도를 보면 어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즙벌국이 포항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안강읍, 북쪽으로 영덕군으로 본다면 영토가 길게 뻗어있게 보이고, 실직곡국도 삼척으로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울진, 북쪽은 동예와 국경을 마주하는 강릉 일대 뻗어있는 나라라고 본다면, 영덕과 울진의 경계 지점에서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고 보면, 두 나라의 영토 분쟁 기사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2. 역사
신라 파사 이사금 23년(서기 102년)에 음즙벌국과 북쪽의 실직곡국(悉直谷國,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삼척시)과 대강 영덕군이나 울진군쯤에서 영토 분쟁이 일어났는데, 당시 이 지역에서 잘 나가던 제3자인 신라[5]에 찾아와 파사 이사금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파사 이사금은 귀찮은 문제에 휘말리자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라고 떠밀었고, 금관국의 왕 김수로는 신라를 방문하여, 관련 국가의 입장을 듣고 의논 끝에 분쟁지역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했다.이후 파사이사금이 김수로를 위한 연회를 개최하고 신라 6부에 명해 모이게 했는데, 나머지 5부는 이찬[6]을 접대 주인으로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가야왕 수로가 노하여[7] 종(奴) 탐하리(耽下里)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암살했다. 그 종은 음즙벌국의 왕 타추간(陁鄒干)의 집에 도망가 의지하고 있었는데, 파사이사금이 종을 벌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요구했으나 타추(陁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파사이사금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침공했고, 결국 타추간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음즙벌국이 본보기로 당하자 위에서 음즙벌국과 땅따먹기 다툼을 했던 실직국(悉直國)에 추가로 압독국(押督國) 두 나라의 왕까지 알아서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 때까지는 금관국(가야)의 국력이 꽤 강했는데 죽 쒀서 개 준 꼴. 수로왕이 영토 분쟁에서 음즙벌국 편을 들어준 것이나 수로왕의 자객을 보호해 준 것 등 음즙벌국과 금관국은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정작 신라가 음즙벌국을 공격할 때 가야는 별다른 개입도 하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신라는 진한의 맹주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정작 이 때 파사 이사금이 주범 금관국을 침공하지 못한 거 보면 신라도 당시 국력은 주변 소국들과 도긴개긴이긴 했다.
신라에 합병된 이후 이 지역은 음즙화현(音汁火縣)으로 개명됐고,[8] 지금의 이름인 안강은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시대에 지어졌다.
3. 역대 군주
대수 | 이름 | 재위기간 |
말대 | 타추간 | ? ~ 102년 |
[1] 이 때문에 음즙벌국의 즙(汁)은 질(質)과 발음이 비슷한 칠(柒)의 간략화된 형태 氵七을 잘못 옮겨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경덕왕이 백제 지명 상칠현(上柒縣)을 상질현(尙質縣)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질(質)과 칠(柒)이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 국명은 음칠벌국(音柒伐國)이었던 것이다.[2] 지금 경주시 시가지 바로 북쪽이라는 위치에서 알 수 있듯 극초창기에는 신라 역시 지금의 경주시 면적도 다 지배하지 못한 아주 작은 나라였다. 조금씩 면적을 넓힌 것.[3] 경순왕릉은 연천에 위치한다.[4] 원(原) 신라국은 사로 6촌 등 처음부터 함께해왔던 사로국 그 자체를 뜻한다. 경주와 울산 사이의 관문성이라는 성 이름처럼 신라 하대에도 원 신라국과 그렇지 않은 지방들을 구분하려는 사상이 분명히 남아있었는데, 안강읍이 원 신라 영역의 일부로 분류된 것은 의미심장하다.[5] 다만 이 시기까지 신라(사로국)가 강력한 영토국가였던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 일대에서 좀 잘 나가던 정도였다.[6] 파사 이사금 당시 이찬은 이벌찬이 없었기에 신라 최고위 관등이었다.[7] 이는 노할만 한 사유가 되는 것이, 파사 이사금이 수로왕한테 분쟁 해결을 떠밀고 신라로 초청했으면 외국 국왕에 걸맞은 의전 대우를 했어야 한다. 다른 부는 걸맞은 대우를 했으나 한기부만 그렇지 않은것이 충분한 명분은 되는 것이다.[8] 고대 한국의 국명이나 지명에 곧잘 등장하는 '불 화(火)'자는 당대에 '불'로 훈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벌판을 의미하는 벌(伐)과 불은 음운상 공통점이 크므로 따라서 음즙벌과 음즙화는 같은 음가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름은 그대로고 나라 국 자만 고을 현 자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