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의 국가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록 | |
사로국 | 이저국 | 불사국 | 근기국 | 난미리미동국 | 염해국 | 군미국 | 여담국 | 호로국 | 주선국 | 마연국 | 우유국 | |
삼국사기 기록 | |
감문국 | 골벌국 | 다벌국 | 비지국 | 소문국 | 실직국 | 압독국 | 우시산국 | 음즙벌국 | 이서국 | 초팔국 | 사벌국 | |
}}} }}}}}} |
于尸山國
1. 개요
원삼국시대 진한(경상도) 지역의 소국들 중 하나.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과 양산시 웅상 일대에 위치했다.[1]2. 명칭
현재의 울산광역시의 이름이 이 우시산국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시대의 이두 표기에서 나온 명칭으로서 우(于)+ㄹ(尸)+뫼/산(山)+나라/국(國)으로 풀이된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고대 향찰식 표기에서 尸는 이두에서 'ㄹ' 받침으로 많이 표기되었으므로 고대에 이미 울산 / 울뫼 등으로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울은 울타리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2] 즉, 울산은 산들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지역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 동안군 우풍현, 나말여초 때 흥례부, 고려시대에서는 울주, 조선시대에 들어와 다시 울산으로 표기되었다.양산시 웅상에 우불산(于佛山/亐弗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우시산(于尸山) → 우화(于火)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이 곳에 있는 우불산 신사는 신라 때 소사(小祀)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과거부터 울산에서 중요하게 모시던 곳이었으며, 우불산성은 삼국시대 때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 장산이 옛날에는 상산으로 불렸는데 우시산국에서 '웃뫼', '웃산'의 의미를 거쳐 상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거칠산국이 장산국으로도 불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아닐 가능성이 크다.
3. 역사
신라가 우시산국에 쳐들어간 내용은 삼국사기 본기가 아닌 석탈해 때의 장군 거도(居道) 열전에만 나온다.우시산국과 그 옆의 거칠산국[3]은 초창기 신라[4]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국경 지대에 위협이 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석탈해왕 시기, 신라의 장군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두 나라를 병합할 계획을 짰다. 마침 이 당시 진한에는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노는 정기적 행사 마숙(馬叔)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도는 이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위장해 군사를 동원했고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두 나라 사람들도 마숙 행사를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가 평소 하던 대로라고만 생각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거도는 두 나라를 기습 공격해 멸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상에서 신라가 경주 바깥의 다른 나라를 병합한 첫 사례고, 이 때쯤부터 신라가 진한 안에서 약간씩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선 다툼이 해결되지 않자 신라에 중재를 요청한 것도 신라의 신장된 국격을 반영한 듯. 적어도 신라 초기까지는 이 지역에 국가형태의 집단이 살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우시산국의 대외적인 위치를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로는 1991년 하대 유적 23호 덧널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세발솥[동정(銅鼎)[5]]'이 있다. 해당 동정은 기원 전후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낙랑을 거쳐 영남 지방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진 지역인 낙랑을 경유한 중국의 문물이 유입되었다는 것은 우시산국의 대외적인 위치가 국제적인 수준에서 발휘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유적지
울산과 양산의 경계선 회야강가에 있는 웅촌 대대리[6]에는 상대마을부터 하대마을까지 구릉을 따라 2세기부터 6세기까지 고대 여러 시대의 고분이 밀집해 있는데 특히 23호 덧널무덤에서는 2세기 중반부터 비정되는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한 청동솥을 비롯해 대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은 남부지방에서 발견된 덧널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부장품의 질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진한 12국 중 하나에 충분히 들어갈만한 강대한 정치세력이 여기 있었고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우시산국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고 있다.삼한시대 후기의 토광묘(목곽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주거흔적까지도 발견됐다. 따라서 해당 유적은 삼한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당시의 문화는 물론 고대 국가의 형성과정과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1] 다른 설로는 울산 지역이 아닌 영덕군 영해면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2] 현재도 울은 울타리의 또 다른 표현이다.[3] 지금의 부산광역시.[4] 사로국, 지금의 경주시.[5] 동정은 중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왕릉 등에서 출토되며 최고 지배자들만이 소장하는 의기성 유물로 알려져 있다. 주요한 제사 용구의 하나로, 신분이나 정치적 권위를 상징한다.[6] 웅촌 권역에는 3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단리 집단거주 유적과 고구려 사람들의 흔적으로 보이는 은현리 적석총 등이 있다. 신라불교의 융성을 보여주는 거찰인 운흥사의 부도와 각종 유구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