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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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호족 고려 태조의 장인 오다련 | 吳多憐 | |
봉호 | 다련(多憐) |
칭호 | 다련군(多憐君) |
본관 | 나주 오씨(羅州 吳氏) |
이름 | 희(禧) |
아버지 | 오부돈(吳富伅) |
딸 | 장화왕후[1] |
생몰연도 | 856년 ~ 9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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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의 호족.나주 오씨(羅州 吳氏)로 나주 일대인 금성군(錦城郡)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이다.
오부돈(吳富伅)의 아들로 딸인 장화왕후는 고려 태조의 제2왕후다.
2. 생애
오늘날 전라남도 나주 일대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호족이었다. 오부돈(吳富伅)의 아들로 다련(多憐)은 봉호(封號)이며 이름은 희(禧)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 곳은 통일신라의 서라벌과 당나라를 연안 항해로 오갈 때 반드시 지나는 길목인데다 영산강 하구이며 서해안에서 내려올 때도 만나는 교차점으로 상업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그는 지방 세력가로서 사간 관등을 가진 연위(連位)라는 자의 딸 덕교(德交)에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신라의 6두품 귀족인 연위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나주 오씨 가문이 지방 세력치고는 위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6두품이 비록 진골 아래지만 넓은 왕족 범위로 소수 특권층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6두품 정도만 되어도 통일신라 전국에서 손꼽히는 중견 명문가였다고 봐야 한다.[2] 그의 딸 장화왕후 오씨는 왕건이 아직 궁예 휘하 후고구려의 장군이던 시절인 903년 나주를 정벌할 당시 호족 유화책으로 결혼했으며 고려 2대 혜종의 어머니가 되었다. 다만 후백제의 침입으로 나주 땅을 오랫동안 빼앗긴 적이 있기 때문에 후백제 멸망 이후 되찾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오다련의 지역 기반이 많이 무너졌으리라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려 2대 혜종은 장남임에도 그의 치세에 왕권이 불안정했고 결국 충주의 대호족 유긍달의 딸을 어머니로 둔 이복동생들에게 왕위가 넘어간다.3. 대중매체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배우 이일웅이 연기했다. 초중반 왕건의 나주 공방전 직전 처음 등장한다.[3] 마침 견훤이 1차 대야성 전투에서 처음으로 뼈저린 패배를 맛본 뒤, 독기를 품고 대 신라 원정을 또 무리하게 지속하자 그로 인해 과도한 세금을 물게되어 험악해진 금성 지방 호족들의 민심을 대변하지만 설득에 실패한다. 결국 자신의 딸인 오도영과 왕식렴의 설득으로 종례 태수까지 끌어들여 왕건 일행과 내통해 왕건의 군대를 맞아들이고,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한다. 이후로는 비중이 그렇게 크진 않고, 매번 깨알같은 조연 역할을 수행하는데 후반부 노령의 나이에도 고려로 귀순하기 위해 나주로 도망친 견훤을 맞이하고 그가 송악으로 떠날 때 배웅해주는데 견훤과는 안면이 꽤 있다보니 견훤이 직접 이를 언급한다.
- 2007년 경 매주 연재되었던 조선일보의 한자교육 만화 맛있는 한자 태조 왕건 편에서는 졸지에 시골 촌부로 격하되었다.
[1] 태조의 제2비[2] 반면에 왕건이 장화왕후와 동침할 때 그 집안이 한미하여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질외사정을 한 것을 장화왕후가 정액을 집어넣어 혜종이 태어났다는 야사를 근거로 오다련의 세력이 한미하거나 아예 평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임용한은 자신의 저서 '한국고대전쟁사'에서 그냥 물긷던 평민 딸인 장화왕후를 왕건이 원나잇을 위해 끌고가 동침했는데 본래 야심이 있던 장화왕후가 임신이 되자 왕건에게 달라붙어 제2부인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주류 역사학자들은 혜종을 축출한 유씨와 남궁씨 세력 등에 의해 혜종을 폄하하려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평가한다. 그 정도로 한미한 가문이 딸이었으면 혼인을 철저히 정략적으로 사용했던 왕건이 애초에 왕후까지 만들어줬을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3] 초반부에는 오다"린"이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