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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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 | |
이름 | 검용(黔用) | |
생몰연도 | ? ~ ? |
1. 개요
후삼국시대의 군웅이자, 호족. 한자음를 다르게 읽어서 유금필을 유검필로도 읽는 것처럼 금용이라고도 한다.2. 상세
남북국시대 신라 진성여왕 대에 전국에서 호족과 도적떼가 들고 일어나 난세가 시작될 즈음에(발해 기준으론 현석왕, 위해왕 대) 검용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의 직위에 있었거나 그걸 자칭하고 있었다.궁예가 한참 사방으로 땅을 넓힐 때 평양과 인접한 패서의 왕륭, 박지윤, 황보제공, 류천궁 등의 유력 호족들에게 항복을 싹 받아내고 905년에는 패서 13진(鎭)을 만드는 등 태봉의 기반을 다지자 바로 인접하게 된 검용도 궁예에게 항복해왔다. 같은 시기 인근 증성(甑城, 지금의 남포시 강서군)의 적의적(赤衣賊), 황의적(黃衣賊), 명귀(明貴) 등이 항복하고 염주 지역에서 대항하던 류긍순을 무너뜨리면서 궁예는 대동강 이북까지 세력을 뻗치게 된다.
평양이라는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검용의 세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많은 주민들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나당전쟁이 벌어지자 자연스레 옛 고구려 영토가 다시 전쟁터가 되는데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많은 유민들이 신라가 설치한 보덕국으로도 이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삼국시대에 고구려 유민들의 중심지가 현 황해도 일대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의 피해를 훨씬 덜 입었던 부수도 한성 일대로 전쟁을 피해 도망친 인구가 가장 많이 유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인구가 유출되면서 평양 주변은 인구 이탈이 꽤 심각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삼국시대 당대에 아마 평양성 출신이었을 안승이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면서 속민들을 끌고가기 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탈한 평양성을 보며 슬퍼한 기록이 남아있다.
안동도호부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을때 평양은 당나라의 영향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150여년 동안 평양성 인근은 신라와 발해 양쪽 다 그다지 재건할 마음이 없이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던걸로 보인다. 패서지역 호족들은 궁예 측에 합류하기 전의 세력 규모나 합류한 뒤의 관직 기록들이 있지만, 검용은 세력규모나 항복한 이후의 관련 기록들이 없다. 고려 건국 초기 수십년 동안 평양성 재건 공사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기록들이 나오는걸로 봐서는 평양이 도시로써 기능을 회복하는 건 고려 정종 시기 이후고, 검용이 있던 시기에는 폐허를 점거한 작은 세력에 가까웠을듯 하다.
3. 정체
검용이 신라에 복속하던 변방의 호족인지, 발해에 복속하던 변방의 호족인지,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원래부터 독립적이던(심하게는 아예 말갈계) 호족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기 어렵다. 이전까지는 남북국시대 지도에서 발해의 중심지가 평양에서 매우 먼 상경용천부였더라도, 발해가 평안도 일대는 물론 평양성을 접수한 것으로 표시해 왔다. 하지만 신라 또한 발해가 점거하지 못한 부분을 꾸준히 접수하면서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 일대는 오히려 신라의 영향권이었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2]또 평안북도라면 몰라도 평안남도가 과연 발해의 영역권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의견이 많다. 당장 통일신라의 경우 평양 바로 건너편인 중화군, 상원군에는 확실하게 군현을 설치했다. 중화군과 상원군은 현대에 평양시에 편입된 적도 한때 있었을 정도로 평양 중심지와 거리가 가까운 지역인데다가 2010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떨어져나왔다. 당시 신라는 평양성 대동강 맞은편에 송현현(松峴縣)을 설치했다. 따라서 평양성 지역은 신라 군현의 주변부거나, 최소한 국경선 위에 있었을 것이다. 발해의 요동점거 여부에 대한 논쟁과 비슷하지만, 이 부분에선 확실히 신라쪽의 손을 들어주는 기록들이 더 많다.
따라서 원래는 검용이 발해계 호족이었다는 견해가 많았지만 갈수록 신라계 호족이었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참고로 발해계 호족이었다 해도 886년 지금의 함경도에 있던 말갈 소국인 보로국이 발해 중앙정부를 무시하고 멋대로 헌강왕 대의 신라와 통교하려 했던 기록을 보면, 발해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변방에서부터 통제력이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궁예가 이전 894년 10월 명주에서 군대를 14대(隊)로 편성하고, 금대(金大)·검모(黔毛)·흔장(昕長)·귀평(貴平) 등을 군대 사상(부장部長)으로 삼을 때 검모(黔毛)라는 이름이 비슷한 자가 있던 것+말갈계였을 경우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았을 가능성이 높은 걸로 봐서는[3] 말갈계보단 한국계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다만, 발해나 신라나 같은 한국계로서 같은 체계의 한자식 인명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4] 이것만 가지고 발해계인지 신라계인지 구분 짓는 건 불가능하다. 당장 박어나 박승, 김신처럼 아예 신라계 발해인들로 추정되는 이들 또한 있었다. 다만 '黔'이라는 한자가 주로 신라계 인물에게서 발견되는거 보면 아무래도 신라쪽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예상은 가능하다.[5]
마찬가지로 이때부터 다시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고구려계나 백제계 호족들 또한 인명체계는 대동소이하다. 어차피 발해계든 신라계든 삼국시대부터 유사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한국계인 건 매한가지였고 무엇보다도 검용의 세력은 위치상 바로 옆에 있던 왕건을 위시한 고구려계 패서호족들과 문화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라 추정되긴 힘들기 때문에 발해계나 신라계라는 딱 떨어지는 구분보다는 난세에 등장한 변방의 독립적인 한국계 호족 중 하나로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1] 신라 또한 나당전쟁에서 모자라는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들을 굳이 탄압하거나 강제로 보덕국으로 보내거나 하진 않았다. 이후 산발적으로 당나라에서 탈출한 인구 또한 발해로 가지 않은 이상은 이쪽으로 이동했던 걸로 추정된다.[2] 참고로 이러한 과정에서 발해와 신라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적어도 기록상으론 전혀 없다. 유일하게 충돌할 뻔한 적은 당나라가 신라에 발해를 협공하자고 요청할 때였는데 신라의 소극적인 태도와 험한 기후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다.[3] 예를 들어 무슨무슨 추장이라는 식으로 기록이 남는 경우가 많았다.[4] 고유식을 음차한 경우라도 형태가 크게 다르진 않았다.[5] 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신라계로 뭉뚱그려서 싸매기에는 고구려계나 백제계의 인명 또한 신라 본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인명과는 종종 차이가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 단순히 삼국계로 구분짓기 힘든 지역별 차이 또한 얼마든지 나타난다. 당장 수도 금성의 권역에 있었다 해도 성씨 사용의 유무 등 귀족과 평민의 인명도 차이가 난다. 따라서 굳이 그렇게까지 따질 거면 단순한 신라계보다는 범신라계로 볼 수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단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발해계와 신라계는 애초부터 문화적 차이가 당시 기준으로 그닥 크지 않은 같은 한국계였기 때문에 사소한 차이를 아득바득 물고늘어지며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삼국전쟁이 끝나며 남북국시대로 넘어갔다곤 하지만 전근대에는 지구 어디에서나 지역별 차이가 꽤 심했을 정도로 완전한 문화적 통일까지 이뤘던 국가 자체가 전무한데, 심지어 남북국시대는 그 중에서도 고대에 해당한다. 정복만 해냈다고 일률적인 문화적 통일 또한 갑자기 되었다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는 수많은 방언이나 소수민족들은 물론이고 중동이나 발칸반도, 우크라이나 등의 분쟁지대는 존재 자체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와 신라 또한 각각 영토 내에서의 차이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배제하고 예외를 둘 이유가 없으며(당장 신라가 후삼국으로 갈라진 이유 또한 이질적인 인구를 대거 흡수하면서 생긴 영토 내 사회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함경도와 제주도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을 정도로 방언 차이가 심했던 것은 물론이고 생활상에서도 차이가 컸던 것처럼 일일이 찾아내 세밀하게 구분을 두자면 정말 끝도 없어진다. 어차피 검용의 정치적 성향은 비록 이후의 행보까지는 알 수 없긴 하지만, 일단은 발해도 신라도 아닌 고구려계인 태봉에 충성을 바친 태봉계 인사에 해당한다. 상기한 박어, 박승, 김신의 경우나 조선계 명나라인으로 임진왜란 때 지원군 사령관으로 조선에 왔지만 명나라 장수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던 이성룡의 경우, 아버지 한명련의 죽음에 큰 반감을 품고 정묘호란 때 청나라에 귀화해 적극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장섰던 한윤의 경우처럼 정체성은 단순히 이름만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