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4A2D5B><tablebgcolor=#4A2D5B> | 진성여왕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4A2D5B,#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 <colbgcolor=#fff,#1f2023>생애 | |
관련 문서 | 삼대목 · 북궁 | ||
설화 | 효녀 지은 |
1. 개요
삼대목(三代目)은 신라 후기 진성여왕 2년(888년), 각간 위홍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편찬했다는 한국 최고(最古)의 향가집이다. 현재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 진성여왕 본기에 삼대목이란 가집이 편찬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仍命與大矩和尚, 修集郷歌, 謂之三代目云.
이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더불어 향가를 모아 수집하라 명하고 이를 삼대목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진성왕(眞聖王) 2년 국사편찬위원회
이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더불어 향가를 모아 수집하라 명하고 이를 삼대목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진성왕(眞聖王) 2년 국사편찬위원회
2. 특징
"신라 시대의 향가를 3등분하여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해 삼대목이라 한다."는 설이 있으나, 편찬 당시에는 신라가 존속했으므로 그러한 구분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 김부식 대에 와서야 '삼대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고 처음 편찬했을 때부터 삼대목이라 하였기(운云) 때문에 그러한 구분은 너무 미래 시점에서 생각했다는 지적이 있다. 자기 나라를 곧 망할 나라로 보아 '하대'라는 명칭을 썼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상대, 중대, 하대가 아닌 성골 시대, 무열왕계 진골 시대, 내물왕계 진골 시대 등으로 구분했을 가능성도 있다. 삼대목의 뜻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삼대목에 어떤 향가가 실려 있었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짓도록 명한 승려 대구화상은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서도 등장하는데, 대구화상은 요원랑 등 여러 화랑들의 부탁을 받아 경문왕을 칭송하는 향가를 지은 적이 있다. 이 노래 제목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었는데 이 노래들의 내용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중 문군곡의 문군(問群)은 '무리에게 묻는다.'는 뜻이므로, 이 음악은 국왕과 백성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음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대구화상이 삼대목을 편찬한 만큼 저 세 노래는 분명히 수록되었을 것이다. 또 경문왕은 화랑 출신이고, 향가 중에는 모죽지랑가나 찬기파랑가처럼 화랑을 칭송하는 노래가 있다.
이를 통해 삼대목의 편찬 목적이 경문왕부터 진성여왕까지 이어지는 경문왕가 신성화 작업[1], 왕권 강화의 일환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즉 훗날 조선에서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과 같은 목적. 이렇게 보면 단순히 문화적 동기로 향가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하대 왕권을 다잡아보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던 셈이다.
3. 기타
- 만약 오늘날 발견된다면 경제적, 문학적, 역사적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특히 고대 한국어는 남아있는 자료가 매우 부실해서[2] 재구할 수 있는 단어가 고작 수십여 개일 정도이므로, 이렇게 통시적으로 정리된 문집이 발견된다면 고대 한국어 연구는 발견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도 있다.
합성 사진. 어딘가에서 냄비받침으로 쓰이고 있을 거라는 농담이 있다[3]. |
[1] 마침 금석문상 하대의 경문왕가를 중고기와 같은 성골로 칭한 기록이 나타난다.[2] 현대에 와서는 목간이 발굴되어 고대 한국어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진척되긴 하지만, 목간이라고 해도 그 양이 많지 않으므로 한계는 뚜렷하다.[3] 사실 이게 절대 농담이 아닌게, 6,70년대까지는 수많은 고문헌들이 그 가치를 모르는 무학자들에 의해 땔감이나 벽지로 쓰이면서 소실된 경우가 한두 건도 아니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도 고용인이 불을 때기 위해 아궁이 옆에 쌓아놓은 종이무더기에서 고서적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종이무더기에 섞여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사라질 뻔한 고서적을 건져냈으니 천만다행인 셈. 그러니 현전하지 않는 고서적들이 지금도 이렇게 헛되이 사라지고 있는게 아닌지, 학계에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4] 이런 이야기를 하는 교수님의 세부전공은 고전문학, 고전시가, 국어사 혹은 고대사 전공일 가능성이 높다.[5] 물론 효녀 지은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에게 곡식을 내리고 지은을 지원해준 화랑 효종을 오빠인 헌강왕의 딸과 결혼시켜주기는 했다. 이 일을 보면 진성여왕은 무능하고 음란한 면이 있는 암군이라 문제지 폭군 수준으로 인격이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