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0:53:38

한국 역사상 일본을 공격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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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실현
2.1.1. 남북국시대
2.1.1.1. 신라구 해적의 일본 약탈
2.1.2. 고려시대2.1.3. 조선시대2.1.4. 대한민국
2.1.4.1. 정부 차원의 테러시도
2.2. 미실현
2.2.1. 신라시대
2.2.1.1. 실성 마립간 시기 신라의 대마도 공격시도
2.2.2. 조선시대
2.2.2.1.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 내 일본 정벌 움직임
2.2.2.1.1. 임진왜란 이전2.2.2.1.2. 임진왜란 이후
2.3. 불확실
2.3.1. 삼국시대
2.3.1.1. 고구려
2.3.1.1.1. 고구려왜국 변경 약탈
2.3.1.2. 백제
2.3.1.2.1. 백제가 '소가'와 '모노노베' 양측 가문의 전쟁에 개입한 의혹2.3.1.2.2. 백제의 규슈 진출 시도
2.3.1.3. 신라2.3.1.4. 우산국
2.3.1.4.1. 우해왕 설화
2.3.2. 남북국시대
2.3.2.1. 백제 유민의 미야자키현 점거 및 신라의 미야자키현 침공 기록2.3.2.2. 신라의 서일본 침공 기록
2.3.3. 고려시대
2.3.3.1. 고려의 규슈 침공2.3.3.2. 고려 말 일본을 약탈한 고려 해적의 기록
3. 같이 보기

1. 개요

보통 한국사에서 대한민국일본한테 공격당하기만 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의외로(?) 한국이 일본을 선제 공격한 적도 있다. 비록 한국 고대사의 사료 부족으로 인해 교차검증이 힘들어 진위가 의심되는 사건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을 침공하기에는 많은 수고가 필요했으며 한반도 국가는 가진 국력에 비해 어느때나 이중전선을 강요 받았으므로 타국에 대규모 원정을 가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으며 이는 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의 요동정벌 시도에서도 고려는 왜구와의 이중전선을 강요받았고 전력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의 명분이 되기도 했고 실제로 이성계군이 원정을 간 사이 대비를 했음에도 왜구들이 개경 바로 밑 고을들을 쓸어버리고 있었고 이는 회군에 참여한 정지 장군이 토벌하고 나서야 끝났다.

2. 목록

2.1. 실현

2.1.1. 남북국시대

2.1.1.1. 신라구 해적의 일본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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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고려시대

2.1.2.1.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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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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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조선시대

2.1.3.1. 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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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대한민국

2.1.4.1. 정부 차원의 테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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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미실현

2.2.1. 신라시대

2.2.1.1. 실성 마립간 시기 신라의 대마도 공격시도
은 왜인이 쓰시마 섬(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미사품은,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만약 우리 쪽이 이로우면 나아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유인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유인당하는 것은 가장 나쁘다는 교훈으로 가장 좋은 계책인가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옳다 하였다.

14년(서기 415년) 7월, 왕이 친히 혈성원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나아가서 군사들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해 8월에 풍도에서 왜병과 싸워 이겼다.
삼국사기 실성 마립간

비록 미사품의 반대로 대마도 침공 계획은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후 풍도에서 왜군을 격파하면서 왜구들의 침략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2.2.2. 조선시대

2.2.2.1.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 내 일본 정벌 움직임
2.2.2.1.1. 임진왜란 이전
1591년 임진왜란이 발발되기 1년전에 겐소(玄蘇)는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가도입명[1]의 의사를 조선에 밝혔고, 당시 재야에 있던 뒷날 의병장이 되는 조헌은 3일간 지부상소[2]를 올리며, 비왜책을 선조에게 바쳤는데, 그 내용에는 사신으로 온 겐소와 대마도주 평의지를 베고, 일본이 공격해오기 전에 허점을 노려 수도(교토)를 공격하고, 대마도에 항복을 권고하라는 다소 공격적인 비책이 담겨 있었다. 이는 조헌이 십만양성론을 주창한 서인의 대표적 대일주전론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였던 사실과 무관치 않다. 당시에 이러한 계획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대의 문헌인 심노숭의 '자저실기'에서는 도리어 임금 앞에서 도끼 들고 함부로 설치는 못된 풍조가 생겨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
2.2.2.1.2. 임진왜란 이후
1598년 12월 노량 해전으로 왜란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군이 철수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당시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상소로 대마주에 대한 보복전을 건의하였다. 왜란 중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황신은 대마주가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구원하기 어려운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명군과의 연합작전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조헌의 지부상소 때와 달리 다년간의 왜란으로 시달려서 일본에 이를 갈고 있던 선조는 이번엔 이 상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비변사에 진지하게 논의하게끔 한다. 특히 당시 선조가 하루 안에 이 안을 논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공격전에 상당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변사는 왜란으로 인해 조선군이 손실이 커서 병력이 부족하고, 황신의 견해와 달리 대마주 일본 본토에서의 구원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우의정 이덕형은 명군과 상의했는데, 명군 역시 점령 후에 지켜내야 하는 문제가 있고, 황신이 봤을 때와 달리 전황이 달라져서 대마도에 방어 병력을 두었을거라며 역시 난색을 표하고, 점령 후 수성이 아닌 단순 응징차원의 공격이라면, 선 정탐 후 움직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마도와 대마주를 직접 정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실록의 기록 상, 조정차원에서 논의한 기사가 없기에 그 사이에 진행되던 명군의 철군이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중앙 조정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움직임은 없었다. 물론 항왜 소운대를 일본에 첩자로 보낸다거나, 정벌 목적의 정탐 움직임은 있었던 정도였다.

다만 지방 차원에서는 이 작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이후 1599년 4월에 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김경립 등 10인을 시켜 일본 내에서 배를 탈취하는 등의 작은 전과를 기록하며, 정탐한 결과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특히 대마주에서 조명연합군의 응징 공격이 두려워 겁을 먹고 성을 쌓고 밤낮을 쉬지 못한다고 했다는 보고 내용으로 보면, 당시 일본 측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보복 공격에 대한 방어 의도가 확실히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김응서는 이 치계(보고서)에서 명군에 통보해서 같이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마무리지었으나, 실록에서는 이 치계에 대해서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김응서 부대의 작은 전과는 민간에도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소설 임진록에서는 일본을 응징한다는 가상 이야기에서 김응서가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2.3. 불확실

2.3.1. 삼국시대

2.3.1.1. 고구려
2.3.1.1.1. 고구려왜국 변경 약탈
야마토 왕권의 왜5왕 정권이 중국 남조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구려가 무도하여 '변예'를 약탈했다고 나와있다. 여기서 변예는 변방 정도로 해석되는데, 문제는 고구려가 변예를 약탈했다고 하는 것을 두고 1) 야마토가 백제를 자국의 변경으로 인식해서[4]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것을 곡해하여 자국의 변경을 약탈했다고 한 것인지, 2) 말 그대로 일본 열도 변경을 약탈한 것인지 해석이 좀 갈린다.
2.3.1.2. 백제
2.3.1.2.1. 백제가 '소가'와 '모노노베' 양측 가문의 전쟁에 개입한 의혹
백제사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이도학 교수의 주장이나 기록이 등장한 시기가 다소 늦다.
2.3.1.2.2. 백제의 규슈 진출 시도
군사적인 공격은 못했지만 어쨌든 백제규슈에 거점을 확보하려 한 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왜국과의 충돌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점령은 무리였고 백제계 관료인 니치라팀킬로 실패로 끝났다. 다만 삼국사기 등의 한국사서에선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2.3.1.3. 신라
2.3.1.3.1. 신라의 일본정벌 관련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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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4. 우산국
2.3.1.4.1. 우해왕 설화
우산국의 왕 우해왕에 대한 설화에 따르면 우해왕이 대마도를 공격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한 우해왕의 왕비는 당시 대마도를 다스리던 사람의 딸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설화 단계에 머물러 있다.

2.3.2. 남북국시대

2.3.2.1. 백제 유민의 미야자키현 점거 및 신라의 미야자키현 침공 기록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서 전해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부여풍(扶餘豊)[5]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가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로 추정되는 정가왕(禎嘉王)은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현 일대로 이주한 뒤, 백제왕이라고 자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하였다. 당시 정가왕은 미야자키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과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718년 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현을 침공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들과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3.2.2. 신라의 서일본 침공 기록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20년에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원정 천황(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성덕왕 14년)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해동제국기

또한 일본 육국사 중 하나인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870년 2월 12일 대마도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麿呂)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개인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당시 신라 경문왕 정권이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대마도 정벌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 발발까지 20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혹은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혔고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기지였을 수도 있다.

2.3.3. 고려시대

2.3.3.1. 고려의 규슈 침공
일본의 역사서 소우기(小右記)와 백련초(百練抄)의 기록에는 고려규슈를 침입하고 공격한 기록들이 나오며 이를 일본에선 ‘조토쿠(장덕)[6]의 입구(長徳の入寇)'라 부르는데 실제로 고려가 일본을 침공했는지 여부에 대해서 학계에선 의견이 분분하다.

997년 6월 고려에서 일본으로 하여금 수호관계를 맺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다자이후(太宰府, 태재부)의 일본인을 시켜 일본국완(日本國宛) · 쓰시마도사완(對馬島司宛) · 쓰시마완(對馬宛) 등 세 통의 첩장을 일본 측에 전달한다. 첩장의 내용에 대해선 현재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으나 고려가 ‘계림부에 이르러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을 비난하며 금압을 요구’하는 등 항의성 내용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상당히 강경한 어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받은 일본은 첩장의 내용이 이전과 달리 상당히 비례(非禮)하다며, 배후에는 송나라의 모략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여 다자이후에서 아래와 같은 4개 조항을 서둘러 시행하여 고려의 침입에 대한 방위태세를 갖춘다.

1. 규슈의 각 고쿠시(国司)들에게 무기와 무구를 수리하고 보수하게 할 것.
2. 다자이후 관내의 여러 신들의 위계를 1계씩 승급시킬 것.
3. 가시이 묘(香推廟)에 봉호를 25호 더 증진시킬 것.
4. 나약한 쓰시마노카미 다카하시노 나카타마(高橋仲堪) 대신 다자이노다이칸(大宰大監) 다이라노 나카카타(平中方)에게 쓰시마 섬의 경비를 맡길 것.

이러한 대비 이후 얼마 뒤인 997년 10월 1일, 일본 조정은 고려군이 쓰시마, 히젠, 이키, 히고, 사쓰마, 오스미 등 규슈 전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조정 남전(南殿)에서 덴노와 좌우 내대신 이하 조신들이 참석해 의례를 마치고 연회를 여는 와중에 좌근진관(左近陣官)이 달려와 큰 목소리로 "고려국 사람이 쓰시마와 이키를 치고 비젠에 도착하였으며, 이곳까지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외치자 장내에 있던 대신들이 모두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고, 세 대신이 선례도 잊은 채 동쪽 계단으로 황급히 내려갔다.
『소우기(小右記)』 997년 10월 1일

당시 기록을 보면 이 같은 고려군의 침공 소식에 일본 조정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일 만큼 고려를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고려인들은 규슈에 와서 민가를 불태우며 재산을 수탈하고 남녀 3백 명을 납치해갔다.
『백련초(百練抄)』 장덕(長徳,조토쿠) 3년(997년) 10월 1일
규슈 지역에서 고려국인이 그 지역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피해규모가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사쓰마(薩摩), 이키(壱岐), 쓰시마(対馬)에 이르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납치 당하고 죽었다.
『백련초(百練抄)』 장보(長保,조호) 3년(1001년)

백련초 기록에선 고려군이 쓰시마, 히젠, 이키, 히고, 사쓰마, 오스미를 쳐들어와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수탈했으며 남녀 3백 명을 납치해갔다는 내용이 있고 소우기 기록에선 '고려국 병선 500척'이 침공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규슈다자이후일본 조정에 급보로 올렸다는 소식 등이 전해졌다.

다만, 이후 소우기 기록에서 일본 조정은 이러한 약탈 행위들을 류큐 제도의 아마미 섬(奄美島) 사람들의 행위로 간주하고 997년 11월에 남만(南蠻)의 토벌과 다음해 998년 9월에 기카이 섬(喜界島)에 남만인들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였으며 소우기 기록을 채택한 일본기략(日本紀略)에서도 일괄적으로 아마미인들의 행위로 기록했고 권기(権記)의 기록 역시도 침략 주체를 아마미인들로 표기했기에 실제로 고려가 규슈를 침공했는지에 대해선 상당히 묘연해진다.

침공의 주체를 고려라 보는 측의 주장으로는 당시 고려는 요나라에게 책봉을 받은 상태라 일본에게 우호관계를 맺을 이유가 희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무력시위를 펼쳤고 이 같은 행위로 인해 고려의 막강한 국력이 알려지자 고려사 목종 2년(999년) 10월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와 현종 3년(1012년) 일본인 35명 등이 고려로 내투(來投)한 사실과 일본 상인 왕측정(王則貞)이 성씨를 고려 국성(國姓)인 왕씨로 바꾼 사례 등 고려의 강력한 국력 앞에 일본 내에서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집단들이 나타났다 보았고 또 설령 아마미인들이 침공에 참가했어도 아마미 세력만으로는 저러한 광범위한 규모의 피해를 입힐 수 없을 것이라는 시각과 일본 조정의 아마미 군도 토벌 이후인 1001년 백련초(百練抄) 기록에서 고려가 다시 침략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게다가 11세기 고려인 도공이 아마미 군도에서 도자기 생산에 관여했다는 학설이 있어 당시 한일 해양패권을 고려가 쥐고 있었기에 고려의 요청에 의해서 아마미인들 역시 이 같은 침공에 참가했을 수 있으며 1014년 3월에도 일본과 고려(高麗[新羅])가 전투(戰鬪)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고 1019년 여진 해적의 일본 침입 사건 때 고려가 도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태도가 극히 냉랭했던 점[7]규슈 침공 사건에 대한 소우기의 기사 제목도 고려국의 적(高麗国の賊)이라 한 만큼 결국 나중에 고려의 소행으로 판명 났기에 저러한 제목이 붙었다는 관점이 존재한다.

반면, 침공 주체가 고려가 아니라고 보는 입장에선 해당 사건 이후 고려로 일본인들이 귀화한 사례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왕래의 일환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양국 상인들간의 왕래는 이후로도 별 탈 없이 지속되었다 볼 수 있으며 사건을 기록한 소우기(小右記)와 일본기략(日本紀略), 권기(権記) 등의 기록들에서 침공 주체를 아마미인들로 명시하고 있고 고려국의 적(高麗国の賊)이라는 소우기의 기사 제목 역시도 고작 아마미인들의 약탈에 일본 조정이 호들갑을 떨며 패닉에 빠진 것을 볼썽사납다고 비꼬는 의미로 지었다는 시각과 여진 해적 습격이 있던 1019년의 바로 다음해인 1020년 12월에 사쓰마가 아마미인들에게 피해를 입었기에 적어도 아마미인들이 해적질에 참여한 점 자체는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고 무엇보다 해당 사건이 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의 한국 측 기록엔 보이지 않으므로 종합적으로 볼 때 고려가 규슈를 침공한 것은 명백한 오보(誤報)라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일본의 관계는 크게 경직되었고 이후 여진 해적에게 사로잡혔던 일본인 포로의 송환이 이루어지는 현종 10년(1020년) 이후부터는 일본이 고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비교적 활발한 사절의 입국이 계속되었다.
2.3.3.2. 고려 말 일본을 약탈한 고려 해적의 기록
일본국이 알리기를, 고려의 도적들이 바다를 지나다니면서 약탈행위를 일삼으면서 스스로 섬에 거주하는 백성들이라고 한다. 고려 국왕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가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소탕하고 있다고 해서 금구요(金口腰) 1개와 초(鈔,지폐) 2천 정을 하사했다.
『원사』 권42, 지정 12년(1352년) 8월 7일
원나라가 직성사인 보사니를 보내어 왕에게 금띠와 초(鈔,지폐) 2천 정을 주었다.
『고려사』 공민왕 원년(1352년) 8월

중국 기록과 한국 기록에서 일부 교차 검증되기에 신뢰성이 어느 정도 있다 보여지나 고려사 기록에는 일본을 약탈하던 고려 해적들을 공민왕이 소탕했다는 구절이 보이지 않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과연 고려 해적들이 왜구로 득실대던 시기의 일본에서 약탈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 등을 두고 해석상의 의견이 갈린다.

1352년에는 아직 왜구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대규모로 커지기 이전 시기이긴 하지만 1350년~1351년에 이루어진 왜구 침입의 규모를 보면 그래도 상당한 규모라 고려 해적들이 일본을 역으로 침입해 약탈 행위가 가능한지에 대해선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으나 치고 빠지는 해적질의 특성상 마냥 불가능한 것까진 아닐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이에 대해 현재 일본 학계에선 고려 말에 발생한 왜구가 다민족·복합적 해적이라는 설이 유력 학설이고 이 기사를 토대로 고려인 역시 한반도와 일본 및 중국 연안을 침략한 전기 왜구들에 상당 부분 참가하고 있었다는 논지로 위의 원사의 기사를 근거로 들고 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선 고려 말 왜구의 배후가 ‘다자이쇼니(大宰少弐)’ 요리히사(頼尚)인 것으로 보고 원사의 기사에서 가리키는 일본국은 당시 일본조정이 원나라와 교섭할 여건이 안되었으므로 공식적인 외교 문서를 지참할 수 있는 다자이후 정도쯤 돼야 외교관계에 어울리는 대표성이 인정되므로 결국 기사 내용상의 일본국은 다자이후를 지칭했다 보이며 고려의 도적들이 일본을 약탈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요리히사가 원나라에 보낸 의도도 향후 왜구의 약탈을 이어감에 있어 과연 이전처럼 원나라가 일본에 병력을 파견할지에 대한 탐색 작전 성격으로 고려인의 소행이라고 거짓 보고를 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일본 학계에선 13세기 전반까지 왜구 토벌에 노력하였던 쇼니씨(少弐氏)가 경인년(庚寅年,1350년)이후 갑자기 왜구의 두목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설사 쇼니씨가 왜구들을 조종했다 하더라도 모든 왜구들이 쇼니씨의 지시를 따르진 않았다고 반박하는 등 양측의 의견에 교집합이 없는 상반된 관점이 존재하기에 현재 양국 학계간 의견이 일치하여 확답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같이 보기



[1] 명을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2]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리는 행위로,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쳐달라는 간곡한 상소[3] 관련 조선왕조 기사[4] 임나일본부설 항목에도 나오지만, 일본은 중국의 남조에 대고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 이라는 거창한 작위를 요구했다. 한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왕이라는 의미인데, 실제 지배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영토를 두고 자신의 땅이라고 허세를 부린 것. 참고로 남조에서는 저 관직을 수여할 때 백제 부분은 제외하고 줬다. 다른 지역은 자신들도 잘 모르는 땅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백제만큼은 중국 입장에서도 오랫동안 교류한지라 일본보다도 더 가깝게 지냈기 때문.[5]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6] 이치조 덴노의 연호[7] 다만 이는 통일신라 후기~후삼국 시대를 거치며 신라구의 일본 약탈로 인해 생긴 일본의 신라에 대한 적국 인식과 소우기의 기록에서 여진 해적의 일본 침입 사건 때 신라(고려)인도 해적질에 가담했다는 내용의 영향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