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2:23:08

전두환 대통령 일본국 공식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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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계기3. 일정4. 성과
4.1. 일본 정부의 사과4.2. 공동성명
5. 기타

1. 개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기인 1984년 9월 6일, 당시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일본에 공식 국빈방문하여 일본의 제124대 천황이자 국가원수인 쇼와 덴노와 만남을 가진 역사를 일컫는다.

2. 계기

공산권 견제를 위해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한 미국, 자국 기업들이 한국에 재진출하길 바란 일본,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원한 박정희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1965년 한일수교가 이뤄졌지만 과거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던 터라 민간 교류는커녕 국가간 공식적인 교류조차 지지부진했다. 1970년대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터지면서 한일관계는 당시의 한미관계 못지 않게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1]

그렇게 단단히 엉켜 버린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하여[2] 점진적으로 서로 대표단을 보내면서 한일관계를 회복시키기 시작했고 이러한 결과로 1983년 1월 11일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공식 방문했으며 전두환 대통령은 일본에 초청을 받아 1984년 9월 6일에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3]

3. 일정

  • 1일차 (9월 6일)
    • 하네다공항에서 아베 신타로[4] 외무대신을 비롯한 일본측 인사들에게 영접을 받았다.
    • 아카사카 이궁에서 국빈 방문 의전을 받고 쇼와 덴노를 접견하고 당시 황태자였던 현 상황 아키히토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내외를 접견했다.[5] 반면 고준 황후는 병으로 나오지 못했다.
    • 고쿄에서 쇼와 덴노와 접견하는 자리에서 과거의 일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다.[이]
    • 아카사카 이궁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제1차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 고쿄에서 쇼와 덴노가 주최한 저녁 만찬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쇼와 덴노는 "한국은 일본의 국가 형성시대에 있어서 학문, 문화, 기술 등을 일깨워준 나라"라고 지적하면서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 양국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며 일본의 과거 한반도 식민통치에 대해 사과했다.
  • 2일차 (9월 7일)
    • 아카사카 이궁에서 한일의원연맹 위원을 접견했다.
    • 일본수상관저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제2차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 일본수상관저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오찬식에서 "한일역사 속에 한국은 스승이였고 일본은 제자였다"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으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사과한다" 라고 사과했다.
    • 아카사카 이궁에서 재일동포들을 접견했다.
  • 3일차 (9월 8일)
    • 아카사카 이궁에서 쇼와 덴노의 작별 예방을 받고 12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 성과

정치 외교적인 것과 한일관계의 이미지, 그리고 국제정세로만 본다면 매우 성공한 한일간 외교적인 이벤트였다. 양국의 입장에서는 서로 간에 큰 수출시장이 열렸고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자유진영간에 유대를 강화했으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재일 한국인 문제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한시름 놓게 되었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입지를 세계로 더욱 견고히 하면서 각종 국제대회나 국제회의가 개최되었고 유엔 가입에 관하여 일본의 지지를 얻게 됨과 동시에 일본과의 경제 협력과 각종 문화 민간교류 등이 시작되면서 경제개발이 가속화되었다.

4.1. 일본 정부의 사과

「今世紀の一時期において両国の間に不幸な過去が存在したことはまことに遺憾であり、繰り返されてはならない」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간의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쇼와 덴노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면 기원 후 6, 7세기에 우리 나라가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귀국의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쇼와 덴노 국가기록원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9월 6일(첫째날) 저녁 만찬에서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 양국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7]이며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지난날 자신의 치하에서 일본이 한국을 괴롭힌 것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한국과 관련된 과거사 발언과 사과는 이때가 한일 국교 수립 이후 처음이었다.

다음날인 9월 7일 나카소네 총리는 총리 관저에서 베푼 오찬 석상에서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사과를 했다.
“일본은 한국에 숱한 고난을 겪게 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이 과오에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장래를 위하여 엄숙히 계심(戒心)하려고 결의하고 있음을 밝힌다”

4.2. 공동성명

1.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 및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 일본국 국빈으로서 1984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에는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원경 외무부 장관, 배명인 법무부 장관, 금진호 상공부 장관,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 최경록 주일본 대사, 강경식 대통령비서실장, 허청일 민주정의당 총재비서실장, 이기백 합참의장 및 기타 대한민국 정부 고위 인사들이 수행했다.

2.전두환 대통령 각하 및 영부인은 도착 후 영빈관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천황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황궁에서 천황 폐하를 만났다.

3. 나카소네총리대신과 전두환대통령은 매우 정중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동아시아 정세를 포함한 국제정세, 양국관계 및 기타 공통관심사항에 관해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양국 정상은 1983년 1월 나카소네 총리의 한국 공식방문에 이어 이번에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한국국가원수로는 첫 일본공식방문이 열린 것은 한일 양국관계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으로 양국간의 선린우호협력관계 발전에 매우 큰 의의가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양국 정상은 전두환 대통령의 역사적 방일을 계기로 후손손손에 걸친 한일선린우호협력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고 공고히 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양국 정상은 자유, 평화 및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이념을 추구하는 한일 양국이 이러한 협력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양국 국민의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나아가 세계 평화에도 기여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양국 정상은 1965년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기초 위에 한일 양국이 호혜평등, 상호 이해와 존경에 입각하면서, 상호 성숙한 우방으로 영원한 선린우호협력관계를 세계적인 시야에서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4.총리대신과 대통령은 지난해 총리대신의 방한을 계기로 경제협력문제가 타결되어 실시되고 있고, 양국간 정기장관회의, 외무장관회담 및 과학기술장관회담을 비롯한 각 분야에 걸친 정부간 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이 양국간 우호협력관계의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 대해 만족의 뜻을 표명하고, 앞으로도 이러한 양국정부간의 협의를 더욱 긴밀히 유지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양국 정상은 또 양국 국회의원 간 및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양국간 우호협력관계가 증진되고 있다는 데 만족한다는 뜻을 표명하고, 이러한 활동이 앞으로도 유지 발전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양국 의원연맹 간의 노력으로 문화교류기금이 설립된 것을 환영했다.

5.총리대신과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긴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및 번영을 위해 앞으로도 서로 노력해 나간다는 결의를 재확인했다.

양국 정상은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북 당사자간 직접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총리장관은 이와 관련, 대통령이 제창한 남북당국 최고책임자 회담 개최제안, 민족화합 민주통일제안 등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의 대화노력을 지지하는 일본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계속적인 정세 속에서 한국정부의 방위노력이 이러한 대화노력과 맞물려 한반도 평화유지에 기여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했다.

대통령은 남북한의 유엔가입이 통일에 이르는 과정의 하나의 조치로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의 영속에 기여하게 된다는 취지를 설명했고 총리는 일본정부로서 긴장완화 및 유엔의 보편성을 높이는 것으로서 그러한 조치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6.총리대신과 대통령은 작년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랑군 테러사건을 상기하고, 이러한 무력행사 및 국제테러행위의 방지를 위해 계속 노력할 결의를 새롭게 했다.

7.총리대신과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상대국의 경제성장과 번영이 자국의 경제성장과 번영에도 기여한다는 점에 유의하고, 양국간 폭넓은 경제면에서의 협력관계를 증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양국 정상은 양국간 무역을 확대균형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정기 각료회의와 무역회의 등을 통해 향후 무역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긴밀한 협의를 계속해 나가기로 합의했다.이와 관련해 양국 정상은 올해 9월 말부터 서울에서 개최되는 국제무역박람회 때 일본의 수입 촉진 미션이 한국에 파견되게 된 것을 평가했다.

양국 정상은 양국 산업기술 협력확대가 바람직하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정부 차원의 기술협력을 촉진해 나가기로 했으며, 민간부문의 교류와 협력증진을 위한 환경정비에 관한 협의를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이와 관련해 양국 정상은 한국 기술자의 일본 내 연수 계획이 올가을경부터 실시됐다고 평가했다.

양국 정상은 투자 확대가 양국 간 산업기술 협력 등 경제적 협력 강화를 위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양국 정상은 올해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6회 한일 과학기술장관회담의 성과에 만족한다는 뜻을 표명하고, 양국 정부기관 및 공공기관 간 과학기술 협력을 더욱 촉진해 나가기로 했다.양국 정상은 양국간 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조속히 개시하기로 합의했다.

이 밖에 양국 정상은 세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보호주의 강화 움직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자유무역 유지 강화를 위해 국제장 내에서 앞으로도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또 양국 정상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서의 새로운 다자간 무역협상 개시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8.총리대신과 대통령은 양국이 각각의 민족적 전통과 자주성을 존중하면서 국민적 기반에 입각한 교류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한일 선린우호협력관계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위한 방도로서 학술, 교육, 스포츠 등의 문화교류를 점차 확대해 나갈 것임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특히 21세기를 향해 젊은 세대간의 상호이해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양국간 청소년교류의 촉진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또 양국 정상은 특히 내년이 양국 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인 점을 감안해 현재 양국에서 검토되고 있는 기념행사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9.총리대신과 대통령은 재일한국인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그 법적지위 및 대우문제가 양국 국민간의 우호관계 증진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에 유의하였다.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취해 온 조치를 평가하면서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앞으로도 노력을 계속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총리는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10.총리대신과 대통령은 1988 서울 올림픽이 정치적 체제나 이념적 차이를 초월한 순수한 올림픽정신 아래 개최됨으로써 인류의 화합과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세계 모든 국가의 참가하에 이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명했다.

11.총리대신과 대통령은 태평양지역 내 여러 국가간에 심화되는 상호의존관계와 이 지역의 급속한 발전에 유의하면서, 태평양지역의 협력강화가 이 지역의 번영은 물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태평양 국가간 각종 교류확대를 통한 협력관계 증진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12.전두환 대통령 각하 및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 일행을 대표하여 이번 방일기간 중 일본 정부와 국민이 보여준 따뜻한 환대에 깊은 사의를 표명했다.
全斗煥大韓民国大統領の訪日に際しての中曽根総理大臣と全大統領との間の日本・韓国共同声明(84年9月8日)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 방일 시 나카소네 총리대신과 전 대통령 간 한·일 공동성명(84년 9월 8일)

5. 기타

  • 당시는 한국이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지 39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한일기본조약 당시만큼은 아니었지만 반대 의견도 있었고 일부에서는 각종 규탄대회나 시위를 열기도 했다. 이런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일환으로 건립한 건물이 바로 독립기념관이다.영상
  •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 도쿄의 지하철 공사현장을 시찰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땅굴 파는 것은 사실 일본보다 우리가 더 잘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북에 김일성이한테 땅굴 파는 기술을 배워 왔더라면 훨씬 더 빨리 지하철이 개통[8]됐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9]
  • 오시이 마모루가 패트레이버 2를 제작할 때 작중 도쿄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자위대가 진주하는 '정치 시뮬레이션' 상황을 그려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계엄령이라는 것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10] 고민하던 차에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이 벌어졌고 이를 모델로[11] 계엄령에 필요한 병력 수를[12] 계산해 냈다고 하며 작품 발표 때 굉장히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계엄은 머나먼 과거에 벌어진 극히 드문 사건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 나라의 이웃인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대부분 최근까지 계엄령 하에 있든지, 혹은 상시 계엄체제였다."


[1] 그나마 1970년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당시 김포공항에 착륙한 요도호에서 일본인 인질들이 모두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간 것이 있지만 당시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얼어붙은 관계를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2] 미국은 6.25 전쟁 휴전 직후부터 한일국교 정상화를 요구했고 어떻게든 한일관계를 정상화 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이러한 미국의 한일 달래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3] 이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1월 마크 W.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초청으로 비공식적으로 일본에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와 만난 적이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 역시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이케다 하야토와 만남을 가졌다.[4] 그의 차남은 이후 일본 최장기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아베 신조다.[5]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의 천황과 만나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이] 사과는 다음에 나올 만찬회 사과와는 무관하다.[7] 다만 "유감"이라는 표현이 한국 기준으로는 사과에 대한 제대로 된 표현이 아니라는 반응이 많다.[8] 사실 일본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철도 강국으로 에키벤 같은 문화가 발달하긴 했으나 지하철은 한국에 비하면 의외로 적다. 이 시절 한국은 1~2호선의 개통을 마치고 3~4호선의 개통을 목전에 둔 상태인데다 1호선 개통 10주년을 넘긴 상태이다. 반면 일본은 N호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9] 여담으로 전두환은 제1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재직 중에 제3땅굴의 발견 및 소탕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바 있다.[10] 일본의 평화헌법은 전쟁과 군대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군대가 비상시 치안을 유지하는 계엄이 규정됐을 리가 없다.[11] 당시 일본 정부는 도쿄 경시청은 산하 기동대는 물론이고 도쿄 근처 특수기동대와 관할기동대, 하다못해 파출소 근무 경찰관까지 차출해 임시로 제2기동대를 편성했는데 아무리 외국의 국빈 방문이라고는 하지만 전두환 방일 며칠 전부터 가스미가세키 근처의 라면집마저 영업 정지를 시킬 정도로 과잉 경호를 벌였다는 악명을 떨쳤다. 이때 투입된 총 예산은 8억 9,200만 엔(한화 약 10억원)이었다.[12] 완전무장한 2개 보통과연대(보병연대) 1,800명, 전차 90량, 장갑차 및 정찰차량 120량, 지휘차 및 특수차량 30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