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6:26:14

박제순

<colbgcolor=#c0c0c0><colcolor=#000,#ddd> 대한제국 매국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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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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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개화파
溫乾開化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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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고종
( ~ 1897)
김가진 김기수 김윤식 김홍집 민영익
박정양 신기선 조희연 어윤중 장석주
대한제국
(1897 ~ 1910)
<rowcolor=#000> 친일파 (개화당) 친청파
김종한 김춘희 안경수* 김성근 김윤식
유길준* 윤웅렬* 이두황 민영익 박제순
이지용 이진호 장석주 성기운 신기선
조민희 조중응 조희연 심순택 이용직
* 급진개화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친청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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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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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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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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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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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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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박영효 · 윤택영 · 이재각 · 이재완 · 이해승 · 이해창
백작
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자작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남작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김사준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이항구[5]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 조동희[6] · 조희연 · 최석민 · 한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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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한규설 · 홍순형
습작 공작
-
후작
박찬범 · 윤의섭 ·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이병길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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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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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작 백작 → 후작
이완용
자작 → 백작
고희경 · 송병준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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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제2대

미즈노
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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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요시
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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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오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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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사
구라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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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가미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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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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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이다
기요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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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로쿠이치로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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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장
초대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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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제3대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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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제5대

윤덕영
제6대

이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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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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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colbgcolor=#fff,#1f2023> 고영희 권중현 민상호 박제순 송병준
이근상 이근택 이완용 이재곤 이지용
이하영 임선준 장석주 조중응 조희연
조민희 한창수
찬의
강경희 권봉수 김만수 김사묵 김영한
남규희 민상호 박경양 박승봉 박제빈
박중양 염중모 유맹 유정수 윤치오
이건춘 이겸제 이재정 이준상 정인흥
조영희 조희문 한창수 홍승목 홍종억
부찬의
고원식 구희서 권태환 김교성 김낙헌
김명규 김명수 김준용 김필희 김한규
김한목 나수연 민건식 민원식 박제환
박희양 서상훈 서회보 성하국 송지헌
송헌빈 신우선 신태유 어윤적 엄태영
오재풍 오제영 윤치오 이도익 이만규
이봉로 이원용 이항직 정동식 정병조
정진홍 조병건 조재영 조제환 조원성
최상돈 한동이 허진 홍우철 홍운표
홍재하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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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고희경 권중현 민병석 민영기 박영효
송병준 이하영 윤덕영 이윤용
부찬의
김현수
칙임 참의
김영진 김영한 김한목 남규희 민상호
민영찬 민형식 박승봉 박이양 박기양
박상준 박승봉 박의병 박제빈 박중양
백인기 상호 서상훈 신석린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맹 유성준
유정수 유혁로 이건춘 이겸제 정진홍
조민희 조진태 조영희 조희문 한상룡
한진창
주임 참의
강병옥 고원훈 권태환 김갑순 김교성
김기태 김명규 김명준 김상설 김상섭
김연상 김영무 김정태 김준용 김창한
김필희 김현수 나수연 노창안 박경석
민건식 민영은 박기동 박기순 박봉주
박이양 박제환 박종렬 박흥규 박희양
방인혁 서병조 선우순 송종헌 송지헌
신석우 신태유 신창휴 심준택 심환진
안병길 양재홍 오재풍 오태환 원덕상
유기호 유빈겸 유익환 유흥세 윤치소
이강원 이근우 이기승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병렬 이병학 이택규 이택현
이항직 이흥재 이희덕 장대익 장도
장상철 장응상 장직상 장인원 전석영
정동식 정란교 정병조 정순현 정재학
정태균 정호봉 조병건 천장욱 최석하
피성호 한영원 한상봉 한창동 허명훈
홍성연 현은
참의
구연수 김윤정 김춘희 김한목 김희작
남규희 민병석 박기순 원응상 윤갑병
윤정현 장헌식 정건유 현기봉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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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서규 김영진
김윤정 남궁영 민상호 박두영 박상준
박영철 박용구 박중양 서상훈 신석린
어담 엄준원 염중모 유정수 유진순
유혁로 윤갑병 이겸제 이범익 이진호
장헌식 정교원 조경하 조성근 조희문
주영환 최린 한규복 한상룡 한진창
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 강번 고일청 김경진 김기수
김기홍 김도현 김두찬 김병규 김사연
김상설 김상형 김상회 김신석 김영택
김정석 김정호 김종흡 김진수 김창수
김한규 김한목 김한승 남백우 노영환
문종구 민병덕 박기석 박종렬 박보양
박봉진 박철희 박희옥 방의석 방태영
서병조 서병주 석명선 선우순 성원경
손재하 손조봉 송지헌 신희련 안종철
오세호 오태환 원덕상 유승흠 유태설
이경식 이교식 이근수 이근우 이기찬
이기승 이동우 이명구 이방협 이승우
이병렬 이선호 이은우 이종섭 이충건
이진호 이택규 이희덕 이희적 인창환
장대익 장석원 장직상 장헌근 정관조
정란교 정대현 정석모 정석용 정해붕
조병상 주영환 지희열 최남선 최양호
최연국 최윤 최윤주 최준집 최지환
최창조 하준석 한영원 현준호 현헌
홍치업 황종국
참의
강필성 김병원 김성규 김제하 박상준
어윤적 유만겸 유성준 진희규 홍정철
}}}}}}}}}
[ 1940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1000><bgcolor=#062861><-5> 고문 ||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 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란교 정연기 진학문
최린 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집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 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
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룡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한정석 현준호 황종국
참의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
||
†- 재직 중 사망.
}}}}}}}}}}}}}}}}}} ||
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대한제국 참정대신
박제순
朴齊純 | Park Che-so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Park_Che-soon.jpg
출생 1858년 (철종 9) 12월 7일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現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사망 1916년 6월 20일 (향년 57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본관 반남 박씨[1]
재임 기간 의정부 참정대신
1905년 11월 28일 ~ 1907년 5월 22일
임시서리 내각총리대신 사무[2]
1910년 5월 20일 ~ 1910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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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헌평(憲平)
평재(平齋)
작위 조선귀족 자작
부모 부: 박홍수
모: 창원 황씨
배우자 대구 서씨[3]
자녀 슬하 1남 1녀
장녀 - 전의 이씨 이민세(李敏世)의 처
장남 - 박부양
직업 정치인, 외교관, 법조인
종교 유교 (성리학)
주요 경력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전라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비고 을사오적, 경술국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 개요2. 약력3. 생애4. 평가5. 기타6. 가족 관계7. 어록8. 대중매체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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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4]
대한제국의 참정대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인,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 후기의 친청 개화파로 활동하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했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는 외부대신(현재의 외교부장관)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나는 모르겠오,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등의 자포자기한 태도를 보여주며 을사오적 중 1명이 되었고[5] 이후 1910년 경술국치내부대신(현재의 행정안전부장관)으로서 또다시 한일병합조약에 동의하며 경술국적이 되었다.

2. 약력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박제순/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평가

강직하고 명예롭고 좋은 사람이다. 아이디어가 많다. 의지가 강하고 용기가 있다. 뛰어난 주청 공사였고, 중국어를 할 줄 안다. 다소 보수적이다.
호러스 뉴턴 알렌

을사오적경술국적에 속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을사조약에 찬성한 이후로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여 사후 오랫동안 지탄을 받았고 을사조약 당시의 무책임한 태도는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일설로는 을사조약 체결에 상당히 부정적이거나 반대하였던 입장으로도 알려졌다. 분명 처음에는 대세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반대한건 맞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약간의 겁을 주자 "마음대로 하라"라는 식으로 선회해서 결국 체결 도장을 찍어버렸다. 외교 담당인 외부대신이라는걸 생각하면[6] "마음대로 하라"라는 태도는 변명도 되지 못한다.[7] 이는 경술국치 때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계속 무책임으로 일관했고 그의 무책임은 그를 추악한 매국노로 만들었다.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장지연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박제순의 친손자 박승유[8]

1905년 10월 이전까지는 친일 인사보다는 반일 인사에 가까운 인물으로 수구파, 친청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을사조약 당시 강압에 못 이겨 찬성표를 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기 시작했으며 1905년 11월 22일 나라외교권을 박탈당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참정대신으로 승진하며 백성들이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장지연"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 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라며 박제순을 비롯한 을사오적들을 강하게 규탄하였다. 오병서 전 주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오적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성토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계속 올리고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많은 선비들은 자살까지 함으로써 노복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으니 저 무리들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함은 변론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습니다"라며 크게 비판했다. 거기다 이완용 당시 학부대신의 견제와 일진회를 필두로 한 탄핵 요구까지 이어지며 불명예스럽게 참정대신 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다만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완전한 친일파라고 보긴 어려운 것이, 고종이 이완용송병준 등 강성 친일파 세력에게 몰릴 때 그나마 고종의 편이 되어준 인물이다. 헤이그 특사 사건 전 박제순과 상의를 거쳤다는 증언이 있고, 이완용이 "고종을 그대로 두면 정부 대신을 빈번하게 경질해서 친일 내각이 붕괴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내각이 일치협력해 황제에게 대항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때 응하지 않았으며, 송병준을 필두로 한 일진회 세력은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다'며 박제순 내각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시기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대해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라고 하기도 했다. 본인의 무책임으로 인해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인해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민심에게는 을사오적 방조로 인해, 일본과 친일파 세력에게는 고종 편을 들었다는 것 때문에 사회 전반에서 압박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박제순이 사임하고 그 자리를 완전한 친일 내각이 채워지게 되며 대한제국은 완전히 끝나버리게 된다.

이 시기부터는 박제순 본인도 완전히 희망을 내려놓았는지 집에 들어박혀 은둔하다 경술국치 시기 내부대신으로써 무력하게 찬성표를 던졌고, 이후에는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친일파가 되어버린다.

경술국치 이전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점, 고종과의 관계, 독도문제 대응이나 박제순 내각 당시의 주장이나 평가 등, 그리고 손자인 박승유가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종합해봤을때 분명 을사오적 중 가장 나은 편은 맞으나 그는 공직자로서의 부작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하여도 손색 없다. 어쩌면 도장찍기를 끝까지 거부하여 직책을 내려놓는 행위를 보였더라면 차라리 대쪽같은, 못해도 무책임한 관리로 보였을지 언정 친일파로 분류되진 않았을 것이다.

5. 기타

  • 서예에 능했다고 한다.
  • 성균관 대사성직을 맡은 적이 있으며 이완용도 이 자리에 있었다. 이는 고종시대 고종과 왕비 민씨가 매관매직으로 한성부 판윤 부판윤, 성균관 대사성 같은 품급이 높은 직위들을 1년에 수십번씩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특히 삼정승 의정부 대신같은 직위는 실권이 없고 직제 개혁으로 6조판서직위도 유명무실해지나 내무 외무 협판 선혜청당상 포도대장직위는 민씨가 독점하고 외직인 지방수령직과 직위가 높으나 실권 없는 예조 공조판서는 평균 재임기간이 2~3주로 팔아먹었다.
  • 을사조약 체결 때 박제순의 딸과 이시영의 조카는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이시영은 박제순에게 을사조약을 거부하라고 했으나 박제순이 체결에 동의하자 결혼을 무산시키고 박제순 집안과도 절교를 선언했다.
  • 을사조약 체결 이후 다른 을사오적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와 민중들로부터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건졌으며 이를 계기로 출퇴근 때 일본군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을사오적들도 그랬지만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들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의사들과 민중들의 습격을 우려하여 통감부의 위임으로 일본군 호위병 2명을 동행시켰던 사례가 있었다.
  • 1906년 일본의 독도 무단 점거 사건 때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라는 지령을 내렸다.[9] 사실 당시에는 강제적으로 친일파가 되었던 상황이었단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이후 한일합병조약에 동의한 점을 보면 의아한 모습.
  • 1910년 한일병합조약 당시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으로써 찬성표를 던지며 끝내 경술국적에도 포함되었고 변명조차 불가능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으로도 활동하면서 6년여 동안 매년 1600원, 자작 작위와 함께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의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으로 연 5푼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지급되었다.[10]
  • 경술국치 이후 경학원 대제학이 되어 유교의 진흥을 내세웠고 조선의 유교는 '충'과 '실'이 덜 강조했다고 하며 이를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인부터 충과 실을 다하지 않고 일제에 부역했는데
  •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 대례식에 참석한 후 《경학원잡지》(1915.12)에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라는 즉위 대례식 헌송문을 천황에게 지어 바치기도 했다.
  • 이덕일은 박제순을 비롯한 이완용, 박영효, 민병석 등이 노론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노론에 속해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저 이완용의 예시를 들면 이완용은 노론에 속해있기는 커녕 노론의 정적이었던 김일경, 민암, 이광좌, 조태구 등을 복권시켰다. 조선 말기부터 세도 정치로 당파보다 특정 가문의 힘이 강해지자 붕당 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면 붕당을 따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어느 나라와 가까웠는지에 따라 당파의 이름이 정해지던 구한 말 시기였으니 결국 결론은 이들의 조상이 노론일지는 몰라도 그들 당사자들은 노론이 아니라고 보는게 적합하다. #
  • 친일 행적으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작위를 습작한 박부양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2006년 대통령직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친일 행적은 그가 태어난지 [age(1858-12-07)]년, 사망한 지 [age(1916-06-20)]년이 되는 현재에도 강하게 비판받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에서는 박제순이 충청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 공적으로 세워진 거사비 앞에 친일 행적이 빼곡히 적힌 죄상비를 2020년에 설치했다. #
파일:박제순_거사비.jpg}}}||
박제순의 ‘거사비(去思碑)’[11]충남 공주시가 친일 행적을 알리기 위해 세운 죄상비(罪狀碑).[12]

6. 가족 관계

파일:박제순 일가.jpg
  • 박부양: 박제순의 아들로 박제순의 작위를 계승했다.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고. 아들로 박승유가 있다.
  • 박승유(1924년 ~ 1990년): 사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7. 어록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께서와 외부대신인 이 사람, 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중략)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8. 대중매체

  • 1959년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서는 배우 박빈이 연기했다.
  • 1972년 영화 <의사 안중근>에서는 배우 고설봉이 연기했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는 배우 장용이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이묵원이 연기했다.
  •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을사오적 중 1명으로 나오지만 배우 미상이다.
  • 대체역사 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는 주인공인 김시혁이 가장 먼저 만난 을사오적으로, 김시혁이 동학 토벌을 명받고 남쪽에 파견되었을때 충청감사로 무능한 주제에 김시혁 하는 일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악연을 쌓는다. 충청감영에 집결한 병력까지 모아 동학군 집결지를 들이쳐야 한다는 타당한 요청을 뭉개버리는 바람에 김시혁이 포함된 친위영 병력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싸워야 했다. 극동 전쟁 때는 고향에 내려가 칩거하고 있었기에 전후 벌어진 숙청에서 무사했고 친위세력이 필요한 고종은 그를 기어이 재등용해 종전 협상단까지 끼워넣는다. 친일내각에 협력하진 않았으나 자세한 행적이 밝혀진 것도 아니어서 의혹의 눈길이 늘 따라다녔고 종전 3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뜬금없이 한청일 삼국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뭇매를 맞고 낙향해 한동안 칩거해야 했다. 의지할게 임금의 신임 밖에 없는 그를 손발로 써먹기로 한 고종은 그를 늘 옆에 두었고 1915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승승장구하며 고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총리대신을 노리나 고종을 지지하는 중추원 황국협회 의원들조차 박제순은 불신했기에 불발된다.
고종의 측근이 된 뒤로는 툭하면 김시혁을 제거하자, 김시혁을 견제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중. 욕심은 가득하지만 정치가로서 능력은 전무해서 그를 중용하는 고종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구로 여길 뿐이다. 한심한 식견에 최소한의 격식조차 생략한채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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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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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김기수 김윤식 김홍집 민영익
박정양 신기선 조희연 어윤중 장석주
대한제국
(1897 ~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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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김춘희 안경수* 김성근 김윤식
유길준* 윤웅렬* 이두황 민영익 박제순
이지용 이진호 장석주 성기운 신기선
조민희 조중응 조희연 심순택 이용직
* 급진개화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의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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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봉공파 22세 제(齊)○ 항렬.[2] 이완용이재명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자 내부대신 겸 내각총리대신 임시서리로 임명되었다.[3] 아버지는 서염순(徐廉淳), 할아버지는 서중보(徐中輔), 외조부는 덕수 이씨 이규신(李珪信)이다.[4]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 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5] 박제순이 한규설과 조약문 수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반면에 처음에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가 입장을 바꿔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하영을 박제순 대신 을사오적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다만 박제순이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만큼 박제순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6] 이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세는 알지만 내가 외부대신인데 어떻게 찬성하냐?"라는게 박제순의 요지. 을사조약의 일부 자구를 모양 좋게 바꾸는 작업에도 한규설과 함께 참여하지 않기는 했다. 반면 반대를 외친 민영기는 수정에 참여했고 작위도 받았다.[7] 이는 쇼와 덴노인도차이나 공격을 허가할 때 국제 신용상 문제는 있겠지만 "뭐 괜찮겠지"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8] 일제강점기의 성악가로 집안의 친일 행적에 부끄러움을 느껴 일본군을 탈영하고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심리 활동, 선전 활동 등을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교수로 활동하였다.[9] 참정대신 박제순 지령 제3호(1906).[10] 1910년대 10만 원은 현재의 시가로는 15~20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당시 10만 원의 5% 이자는 5,000원, 현재의 시세로 따졌을 때 최대 1억 원의 이자를 매년 받은 것이다.[11] 뒤쪽의 비석.[12] 앞쪽의 철제 명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