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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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조선귀족 후작 | |
<colcolor=#ffffff>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1] 이덕용 | 李德鎔 | |
이름 | <colbgcolor=#ffffff> 이덕용 (李德鎔) |
본관 | 전주 이씨 은전군파 |
출생 | 1923년 4월 4일 |
사망 | 1952년 9월 16일 (향년 29세) |
작위 | 조선귀족 후작 |
생부 | 의양군 |
적모 | 정부인 류씨(柳氏)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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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현손이며, 의양군 이재각의 서자이자 외아들이다. 생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계동이다.원래 이덕용의 가계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다. 이덕용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 왕실 직계와 갈라진 지 300년이 지난 때였기에 이덕용은 원칙적으로 종친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덕용의 할아버지 완평군 이승응이 1860년(철종 11년)에 사도세자의 서자 은전군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이덕용은 태어날 때부터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작호는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덕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2]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항렬로는 순종황제, 의친왕의 동생 뻘이나, 나이는 50여 세 가까이 차이난다. 왜나하면 아버지 이재각은 완평군이 늦게 낳은 아들이고, 이덕용 또한 이재각이 49세에 낳은 늦둥이이기 때문이다.[3]
2. 생애
12세이던 1935년 5월에 아버지 이재각을 여의었다. 비록 서자이지만 이재각의 유일한 아들이라서 그해 7월에 이재각의 조선귀족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에 대한 권리를 물려받았다. 1940년에 일본 기원 2600년 축전에 초대받았고# 경성공립직업학교 전수과 기계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43년 4월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종5위로 서임받았다.#8.15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 30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하루 뒤인 8월 31일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고 특검부로 송치되었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3. 사망과 이후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9월 16일에 사망했다.친일파 708인 명단의 조선귀족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작/습작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4. 가족
불명.[1] 실제로는 조선 선조의 13대손이다. 후술하다시피 그의 조부 완평군이 장조(사도세자)의 서3자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적하였으므로 은전군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였던 장조(사도세자)를 기준으로 서술함.[2] 추존 왕 포함.[3] 특히 세대 진행이 빨랐던 도정궁가(덕흥대원군 종가)의 같은 항렬인 경원군 이하전과 비교하면 나이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무려 81살 차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