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2 20:04:47

민영달

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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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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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영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공무(公武) / 수당(綏堂)
본관 여흥 민씨[1]
출생 1859년 1월 24일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옹리상계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2]
사망 1924년 9월 15일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동막상리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35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민영달은 1859년 1월 24일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옹리상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에서 덕천군수를 지낸 아버지 민관호(閔觀鎬)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종6품 주부(主簿)를 지내다가 27살이 되던 1885년(고종 22) 증광시 문과에 병과 28위로 급제하였다.# 그 뒤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된 이래, 시강원 문학, 이조 정랑, 시강원 겸필선, 승정원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의, 시강원 보덕, 이조 참판, 사옹원 제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1892년엔 이완용과 함께 육영공원 판리사무(辦理事務)에 임명되었다. 이후 공조판서, 예조판서에 잇달아 제수된 그는 1893년 2월 7일 고종에게 능원을 보호하는 문제에 대해 아뢰었다.
능원(陵園), 묘소(墓所)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인데 근래에 날이 갈수록 더욱 몹시 허술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복호 결가(復戶結價)의 높고 낮음이 같지 않은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에 바로잡고자 한다면 오직 결가의 높고 낮음을 참작하여 다소 변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중히 처리해야 할 일이니 감히 제멋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외읍(外邑)에 흩어져 있는 향탄 위토(香炭位土)에 이르러서는 세월이 오래되면서 폐단이 많이 생겨 양안(量案)은 그저 빈장부일 뿐이고 세납(稅納)은 실제 숫자를 알 수 없으니, 본조(本曹)에서 철저히 조사하고 옛 정식을 밝혀 준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요즘 능원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 점점 예전만 못하여 항상 걱정하고 있었다. 아뢴 대로 하라. 복호결(復戶結)은 묘당(廟堂)과 의논하여 좋은 쪽으로 변통하고 영구히 준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고종은 뒤이어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각릉(各陵)의 복호결(復戶結)은 그 중요성이 다른 것과 다르다. 요즘 들으니 열읍(列邑)의 민간에서 거두는 결가(結價)는 원래 원결(元結)과 같은데 감영과 고을에서 제 마음대로 조종하여 나머지를 취하는 수량이 능군(陵軍)들이 거두어들이는 수량의 곱절도 더 된다고 한다. 능군들이 점점 생계를 보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신묘년(1891) 이전의 것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으므로 특별히 논하지 말고 임진년(1892) 분은 감영과 고을에서 나머지를 취한 것은 빠짐없이 샅샅이 조사하여 각 능침(陵寢)의 수리비에 보충하게 하는 것이 심히 적합한 조치이다. 묘당(廟堂)과 의조(儀曹)에서 엄한 말로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속히 찾아내어 바치게 하라.

1894년 2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4월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점령되자 당시 병조판서 민영휘한성부에 와있던 위안스카이를 만나 청나라의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때 민영달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것을 반대하고 도리어 일본의 세력을 빌려서 동학농민군들을 진무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해 1894년 7월 19일 내무대신에 제수된 민영달이 이에 응하지 않고 대궐 밖에 있자, 승정원이 탄핵했다.
내무대신(內務大臣) 민영달(閔泳達)에게 여러 번 신칙하는 명을 내렸지만 형세가 갈수록 더욱 불안하다고 하면서 대궐 밖에서 명소패(命召牌)를 받들고도 응할 의사가 없으니 사체상 지극히 온당치 않습니다. 엄하게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종은 그를 경기의 연안에 귀양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틀 후 의금부는 그를 김포군에 유배하겠다고 아뢰었다. 하지만 고종은 민영달이 신칙했으니 석방하라고 지시했고 뒤이어 서용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민영달은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국장제거(國葬提擧)에 임명되었고, 1900년 8월에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4년에는 원소도감 제조(園所都監提調)에 임명되었으며, 1905년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수여받았지만 사양하고 반납했으며, 경성부 서강면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8년 9월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창설, 운영하던 이회영이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에서 활동할 때 5만원을 원조했으며, 이회영이 덕수궁에 있던 고종과 접선할 수 있게 주선했다. 그는 고종을 해외에 망명시키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해 국제 여론에 호소하고자 했지만 1919년 2월 고종이 붕어하면서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후 1919년 전협과 최익환(崔益煥)이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할 때 관여했으며, 1921년 1월 10일 동아일보가 운영자금이 없어 속간이 지연되고 있자 홍증식(洪增植)을 통하여 5천원을 출자했다. 1924년 9월 15일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동막상리(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민영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6월 22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삼방파 28세 영(泳) 항렬.[2] 출생지인 마포구 용강동 284번지는 현재 용강동 502번지에 편입되었으며, 이곳에는 현재 래미안 마포 리버웰 아파트가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