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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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조선귀족 후작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 |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이달용 (李達鎔)[2] |
본관 | 전주 이씨 연령군파 |
출생 | 1883년 10월 11일 (음력 9월 11일) |
사망 | 1948년 1월 27일 (향년 64세)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안골 |
작위 | 조선귀족 후작 |
생부 |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 1856 ~ 1922) |
생모 | 정경부인 대구 서씨 (貞敬夫人 大丘 徐氏, ? ~ 1923) |
부인 | 안동 김씨(安東 金氏, 1883 ~ ?) |
자녀 | 4남 2녀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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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흥완군 이정응의 손자이고, 완순군 이재완의 장남이다.원래 이달용의 가계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다. 이달용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 왕실 직계와 갈라진 지 2~300년이 지난 때였기에 이달용은 원칙적으로 종친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달용의 아버지 이재완이 1864년(고종 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이달용은 태어날 때부터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다만 작호는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상 이달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4]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5],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생애
한성부 가회방 맹현(현재 가회동)에서 완순군 이재완의 큰아들로 태어났다.음서로 관직에 올라 1899년(광무 3년) 시강원 시종관 직을 맡았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친족 민영기가 세운 근대교육기관 종교의숙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으며 1904년(광무 8년)에 졸업했다. 그해 1월에 훙서한 명헌태후의 장례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때까지 황실의 장례 때마다 종척집사로 활동했다. 이후 비서원승을 지냈고 같은해 9월에는 한성학교[6] 교장 직을 맡아 이듬해 4월까지 재직했다.
1905년(광무 9년)에는 시찰단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궁내성을 시찰했고 일본 정부에게서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광무 11년)에 규장각 부제학을 거쳐 종부사장으로 임명받았고, 그해 11월에는 대한제국 보빙사절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와 일본 정부에게서 훈3등 욱일장을 수여받았다. 12월에는 대한제국 정부에게서 팔괘장을 수여받았고 흥선대원군의 묘를 공덕동에서 파주로 옮기는 일을 서사관으로서 맡았다. 그리고 규장각 부제학 겸 칙임관 3등이 되었다.
2.1. 일제강점기 이후
1910년(융희 4년)에 일어난 경술국치 이후 이달용의 아버지 이재완은 일본 정부에게서 조선귀족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 336,000엔를 받았고, 4년 뒤 이달용은 이재완의 법적 상속자라 해서 종5위를 받았다.# 한동안은 왕실 행사 및 병든 고종을 간호하는 등 이왕가 내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주로 맡았다. 1920년 4월에는 일본 도쿄에 가서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이듬해 8월에 영친왕 부부의 장남 이진이 태어나자 종친 대표로 다시 도쿄로 가 이진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해 10월에는 한상룡과 함께 그가 주주로 있던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부사장이 되었다.1922년 8월에 아버지 이재완이 사망했고 2달 뒤에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를 물려받았다.
이후 한성은행 대주주, 양강척림철도주식회사 감사, 여주광산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동민회[7]의 회장과 이사장, 고문을 지냈고 중일전쟁 이후 동요회[8] 회원 자격으로 국방 헌금을 기부했다. 1939년 11월에는 조선지장주식회사의 취체역이 되었고,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9]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3. 사망과 이후
8.15 광복 이후인 1948년 1월 27일에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10] 흥완군과 완순군 묘소 근처에 있다.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조선귀족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습작/수작 부문 및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들어갔다.#
4. 여담
- 양할아버지 흥완군과 아버지 완순군 묘소 근처에 그의 저택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다. 승지였던 그가 사용했다해서 마을 사람들은 승지물이라 불렀고, 그 일대 별칭도 승지물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0번지 자리에 있었다. 일명 맹현댁으로 불렸으며 필지만 총 5,943.80㎡(1,798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2019년 7월 19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이란 특별전을 통해 완순군 - 이달용 가문의 의례 및 생활상을 전시했다. 손녀 이남주와 손자 이길주가 당시 생활문화를 증언하는 등 전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5. 가족
<colbgcolor=#29176e> 이달용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규용(이달용 남동생), 이규용 부인 풍산 홍씨, 달성 서씨 부인(이달용 어머니), 이달용의 누이, 완순군 이재완(이달용 아버지), 이해선(이달용 아들), 이달용 부인 안동 김씨, 이달용, 맨 뒤는 희경할머니(주방 총괄 담당)[11] |
장남 이해선(李海善)은 1905년(광무 9년)생으로, 사진 작가로 활동하여 한국 사진 역사의 큰 획을 그었으며 1983년에 사망했다. 이해선과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이해선 문서 참조.
차남 이해명(李海明)은 1911년생으로, 흥친왕 이희의 차남 이문용의 양자로 입양갔으며 6.25 전쟁 때 납북당했다.#
3남 이해상은 1913년생으로, 특별한 행적이 알려져있지 않으며 1985년에 사망했다. 신계완[15]과 혼인하여 슬하에 7녀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이남주(李男柱) 전 성심여자대학교[16] 음악과 교수이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전 부인 줄리아 리가 이혼 후 사망 직전까지 유일하게 왕래했었던 이씨 친족이었다고 하며 줄리아 리의 사망 소식을 전한 것도 그이다.#
이달용의 큰딸 이길영은 1916년에 태어났으며 행적은 알려져있지 않다. 둘째딸 이우영(李又英)은 1920년생으로, 18세이던 1938년에 요절했다.
4남 이해영(李海英)은 1925년생으로, 저명한 인구학자, 통계학자였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다 1979년에 사망했다.
[1] 이달용의 양고조부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사실,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친아들인데 죽은 후에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확하게 연령군가로 입적한 게 아니라서 당시 은신군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자신들을 연령군의 법적 후손으로 인식했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문서 참조.[2] 남연군의 증손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흙 토(土)'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고종황제의 아들들의 이름도 각각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이다. 흥완군의 손자인 이달용(李達鎔)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도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埼鎔)과, 이달용의 동생 이규용(李逵鎔),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址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과 이문용(李(土 + 汶)鎔), 이관용(李土+灌鎔)의 이름까지 이 규칙을 적용받았다.[3] 이문용의 양자로 출계.[4] 추존 왕 포함.[5] 실제로는 조선 선조의 12대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아버지 완순군 이재완이 장조(사도세자)의 서차자 은신군의 손자 흥완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기에, 현시점 기준 남연군 일가의 실질적인 법적으로 인정되는 직계 서열(추존) 장조의황제 (사도세자)의 5대 후손이다.[6] 현재 경기고등학교.[7] 독립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친일 단체. 중일전쟁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과 합쳐졌다.[8] 조선귀족들의 전쟁협력단체.[9] 일제 침략 전쟁 지원을 위해 여러 단체들이 합쳐져 조직된 연합단체.[10]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11] 반찬만 담당하던 고용인인데,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했다고 한다. 당장 이 사진에서도 고용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달용 가족들과 함께 촬영한 것을 보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희경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굉장히 뛰어났다고 하며 희경할머니의 아들은 이달용 가에서 익힌 솜씨를 바탕으로 1960년대 ~ 1970년대에 워커힐 호텔의 한식부 주방장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35.)[12] 음력 3월 4일.[13] 출처: 1900년(광무 3년) 제작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14] 같은 안동 김씨라서 김두한이 김씨 부인에게 세배하러 온 적도 있다고 한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59.)[15]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우의 부인 박찬주와 절친했다고 한다.[16] 1995년 가톨릭대학교와 합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