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장조의 6대손[1] 이해선 | 李海善 | ||
<colbgcolor=#29176e> 성명 | 이해선 (李海善) | |
호 | 백오 (白烏) | |
본관 | 전주 이씨 연령군파 | |
출생 | 1905년 3월 19일 | |
한성부 가회방 맹현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
사망 | 1983년 10월 31일 (향년 78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안골 | |
생부 | 이달용(李達鎔, 1883 ~ 1948) | |
생모 | 안동 김씨(安東 金氏, 1883 ~ ?) | |
부인 | 민계식(閔桂植)[2] 김의수(金宜壽)[3] | |
자녀 | 3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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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사진가, 화가. 조선의 왕족. 남연군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 흥완군 이정응의 증손자.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이며 독립운동가 충정공 (忠正公) 민영환의 사위이다. 일제강점기의 그에게 일제가 준 남작 작위를 거부하고. 일제의 만행과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 및 후대에 역사적 사실을 사진 기록으로 남긴 대한민국 최초의 <사진작가> 또한 한국 초기 사진을 예술적 도구로 접목시켜 공헌한 사진계의 선구적인 초석 인물이다.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받은 완순군 이재완의 손자 이달용의 장남 이기도하다.
2. 가계
원래 이해선은 선조의 9남 경창군의 12대손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 왕실 직계와 갈라진 지 2 ~ 300년이 지난 때였기에 이해선은 원칙대로라면 종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선의 할아버지 완순군 이재완이 1864년(고종 1년)에 흥선대원군의 둘째형 흥완군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이해선은 태어날 때부터 왕실과 가까운 친척으로 예우받았다.그러나 작호는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해선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임금[4]이었던 사람은 6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5],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3. 생애
1905년(광무 9년) 3월 19일에 한성부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192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4월에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1930년 3월에 졸업한 후 이듬해에 귀국했다. 유학 시절 사생도구로 사용하던 카메라를 통해 사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1932년에는 이왕가박물관 조선 고미술품 관리위원으로, 1934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 새로 생긴 이왕가 덕수궁미술관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문 사진가는 아니었지만, 1936년 무렵에 박영진, 현일영 등 23명과 함께 ‘경성아마추어사진가구락부’를 창립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해선은 이외에도 기존에 있던 사진가 모임인 백양사우회에도 소속하면서 회원전 2회를 열기도 하는 등 사진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45년에 조선사진연구회(현재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창립하고 지도위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과 한국사진협회 고문을 지냈으며 1971년에 한국사진문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여받았다. 1974년에는 칠순 기념으로 사진들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고 1978년에는 현대사진문화상을 수상했다. 1980년에는 궁궐을 촬영한 사진작품집 《한국의 고궁》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현 문화재청) 을 통해 발간했고 1983년에는 대한사진협회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1983년 10월 31일 오전 4시에 지병인 폐암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4. 사후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6] 흥완군, 완순군, 이달용 묘소 근처에 있다.2005년 10월 31일부터 11월 12일 까지 싸이드림 포토갤러리에서 이해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전 〈사라진 풍물〉이 열렸다.
5. 작품 세계
흑백사진은 사물이 지닌 모든 고유색을 흑백만의 추상세계로 환치하고 농담의 계조(階調), 빛과 그림자가 연출하는 뉘앙스에 각별한 매력을 느낀다. 예술성이란 자연이 지닌 사물의 본질과 존재성의 근본을 사유의 달관으로 창출해야 하며 창작은 단순한 기록물의 범주를 초월해야 한다.#
이해선은 한국 초기 예술사진의 개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현일영, 서순삼, 김광배, 박필호 등과 함께 사진계의 5로(老)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그 위상이 대단했다.#이해선 작품의 특징은 귀족적 성향이 묻어나는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궁궐 풍경과 미술품 촬영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의 생활상에도 관심을 가져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정성있는 사진들을 많이 촬영했다. 대표적으로 농촌 풍경, 장터 풍경, 주부들이 빨래하고 아이들이 모여 노는 사진들이 있으며 이외에도 그가 촬영한 사진 속 일상풍경은 매우 다양하다. 이는 광복 이후 리얼리즘성 생활주의 사진 흐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다만 달력 사진 류 등 상업적이거나 지나치게 처절한 사회고발적인 사진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6. 가족
이해선은 11세였던[7] 1916년에 민영환의 딸 민계식과 혼인했다. 저 때 순종황제가 결혼을 축하하며 이해선의 할아버지 이재완과 민계식의 오빠 민범식에게 축의금으로 200원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해선의 조카 이남주[8]의 회고에 따르면, 민계식은 그 당시에 펌을 하고 남편의 유학길에도 동행하는 등 굉장히 개방적이며 활달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계식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1938년 8월 3일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이해선은 친구 소개로 만난 김의수와 재혼했다. 민계식과의 사이에서는 2남 1녀를, 김의수와의 사이에서는 1남을 두었다.#이해선의 장남 이철주(李鐵柱)는 독립운동가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딸 이금주는 순정효황후의 친정인 해평 윤씨와 혼인했다. 3남 이길주(李吉柱)는 1958년 생으로 이해선이 53세에 낳은 늦둥이이다. 부동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2014년 5월에는 사촌누나 이남주와 함께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을 만나 아버지 이해선의 생애 및 사진활동에 대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7. 여담
- 평생 생업을 가지지 않고 사진 촬영에만 매진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꽤 고생했다. 특히 부인은 그런 이해선의 모습이 싫어서 사진 업계 손님들이 집에 방문하면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등 냉대를 했다고.#
-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이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거의 대부분 파기했고 현재는 극히 일부만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북한군들이 집집마다 뒤지면서 사진을 보며 가족관계나 재력 여부를 확인한 후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굉장히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 6.25 전쟁 당시 그의 집 사랑채에 폭탄이 떨어졌는데 터지지는 않고 그냥 천장만 뚫었다고 한다.
- 일이나 목표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칼 같았다고 하며 제자들에게도 엄한 스승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유머가 많고 농담도 잘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스타일이었던 듯 하다.
- 술을 아예 못 마셨다고 한다. 활명수만 마셔도 취할 정도였다고. 대신 담배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말년에 폐암에 걸렸는데, 의사가 담배 끊으면 완쾌한다고 해서 끊었는데도 낫지 않아서 의료진을 볼 때마다 “담배를 끊어도 이렇게 낫지 않는 걸 내가 저것들한테 속았지.”하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 이해선이 일본 유학 시절에 어느 섬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출발하려는 날에 하필 풍랑이 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해선은 배 한 척을 잡고 선장에게 “어느 섬까지 같이 가자.”라고 말했다. 이에 선장이 “이 날씨에 어딜 가냐? 죽을 수도 있다.”고 말렸지만 이해선이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 기어이 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배를 처음 탔던 이해선은 험한 날씨까지 겹쳐 뱃멀미를 심하게 했고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널브러진 상태였다고 한다. 선장의 표현대로라면 시체(...) 같았었다고. 막내아들 이길주는 이해선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젊으셨을 땐 참 고집이 대단하셨겠다.’고 생각했다한다.[9]
[1] 이해선의 양5대조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사실,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친아들인데 죽은 후에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확하게 연령군가로 입적한 게 아니라서 당시 은신군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자신들을 연령군의 법적 후손으로 인식했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문서 참조.[2] 민영환의 딸이다.[3] 민계식과 사별 후 재혼한 부인이다.[4] 추존 임금 포함.[5] 실제로는 조선 선조의 13대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할아버지 완순군 이재완이 장조(사도세자)의 서차자 은신군의 손자 흥완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기에, 현시점 기준 남연군 일가의 실질적인 법적으로 인정되는 직계 서열(추존) 장조의황제 (사도세자)의 6대 후손이다.[6]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7] 세는나이 12세.[8] 이해선의 둘째 남동생 이해상의 딸.[9] 2014년 5월 8일,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