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1 20:04:48

이문용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조선의 왕족이자 고종의 조카에 대한 내용은 이문용(1882)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생애3. 논란4. 기타5. 같이보기

1. 개요

李文鎔, 1900년 ~ 1987년

자칭 고종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으로, 한국안나 앤더슨(Anna Anderson)[1]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이문용의 주장에 따르면, 생모 염씨는 궁녀였다가 고종 황제의 승은을 입어 이문용을 임신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기세등등했던 때라, 염씨는 사가로 쫓겨나고 이문용을 낳은 직후 사약을 받았다. 이에 유모가 갓난 아이였던 이문용을 데리고 경상북도 김천에 피신, 숨어 살았다고 한다.[2] 하지만 양부가 사망하고 양모가 이문용의 재산을 챙겨 달아나면서, 이문용은 걸인으로 살게 된다. 그러다가 생모 염씨의 친구였던 상궁에게 거둬져 유복하게 자랐고, 진명여학교[3]에 다니며 신교육을 받았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익사하고 유복자까지 병사하는 불행을 겪는다.

해방 후 이문용은 좌익 활동과 연루되어 복역하였고, 출감 후 자신이 고종 황제의 딸이라고 주장하였다. 1972년 유주현이 잡지 사상계에 이문용의 일생을 다룬 <문용옹주>라는 소설을 연재하였으며[4]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황녀>가 1974년 MBC에서 방영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다음 해 전라북도 도지사의 주선으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 일각에 기거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처음부터 황녀로서 궁에서 살았다고 해도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영친왕, 덕혜옹주와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유학을 명분으로 일본으로 끌고 갔을 것이고, 지옥 같은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자신의 의견과 상관없이 일본과 결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친왕과 덕혜 옹주가 그랬던 것처럼, 불행한 삶을 살다 갔을 가능성이 높다.

3. 논란

이문용이 황녀라는 주장의 근거는 본인의 주장과 '고종 황제와 닮았다'는 이면용[5]의 주장뿐이다. 이문용이 황녀라는 근거는 그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이방자 여사가 생존했던 당시에도 이문용과 만남이 주선되었으나, 이방자 여사가 극구 거절해 일반 방문객 자격으로 만나는 데 그쳤다. 이때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로 들어와 살 것을 권유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드라마 방영 당시 낙선재 측에서는 두 차례나 고종 황제에게 그런 딸은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이문용이 사망한 때에도 고종의 딸임을 부인하였다.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 "공식기록이 전혀 없다"면서 이를 부정하였고, 당시 생존해 있던 조선의 마지막 궁녀 성옥염 상궁도 "임금과 하룻밤만 자도 당호가 붙는 법인데,[6] 임신까지 했다면 상궁들끼리 모를 리가 없다."[7]고 부인했다.

다만 제정 러시아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를 자칭했던 안나 앤더슨의 주장이 DNA 검사를 통해 거짓말로 밝혀진 것과는 달리, DNA 검사 등 고종황제의 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고종의 숨겨진 딸로 믿는 사람도 더러 있다.

여기서 문제는 자칭 왕위 계승 권리를 주장하는 무리는 서구 왕조 외에 한국 황실에도 뭐 얻어먹을 게 있는지.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옛 황실의 후손(황손)들은 이문용 역시 그러한 무리 중 하나로 비정할 뿐이다. 실제로 매년 제향 날짜에 맞춰 홍유릉을 방문하면 저 스스로 숨겨진 황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1명 ~ 2명쯤은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대부분 주장하는 내용이 고종 황제, 혹은 황족 누구누구와 닮아서[8][9]라는 것뿐이라는 점이 문제다. 더욱이 대한제국 황실은 후손이 귀해 말미엔 거의 적서차별이 없다시피 했고[10] , 의친왕비 김덕수는 남편이 밖에서 얻어 온 자식 대부분을 사동궁에서 직접 먹이고 입혔다. 순헌황귀비망조 띤 나라에 얼마나 권력이 있었겠냐마는. 권세를 누린 햇수도 실제 몇 년 되지도 않을 텐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차라리 명성황후면 몰라.[11]

이름에 항렬자(鎔)를 쓰는 것 또한, 당시 예법이나 황실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 애초에 고종 직계는 사가(私家)도 아니고 한국 황실이었으므로 다른 친왕가와 달리 적서차별 없이 흙 토 변을 위시해 휘를 지었는데[12], 이것 역시 남자 적서자에 한정되었다.[13] 딸이었으니 덕혜옹주와 비견해봄직한데, 덕혜옹주는 1960년대 국적회복 때까지 공식 이름이 없었다.[14]

따라서, 생전의 이문용은 본인의 이름에 대한 해명[15]부터 있었어야 했다.

4. 기타

5. 같이보기


[1] 자신을 러시아 제국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할 때, 홀로 극적으로 살아남아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아나스타시야 공주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돌았고, 미국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안나 앤더슨의 머리카락과 조직을 검사한 결과는 제정 러시아 황실과 혈연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시신이 발견되어, 안나 앤더슨은 사기꾼으로 밝혀졌다.[2] 현재 이문용이 살았던 마을은 '황녀의 마을'이라 하여 관광 상품화되어 있다.[3] 참고로 진명여학교순헌황귀비 엄씨와 친정 엄씨 가문이 설립한 학교 중 하나이다. 엄씨 일가는 진명여학교 외에도 숙명여학교와 남학교인 양정학교도 설립했다.[4] 2010년 <황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하였다.[5] 정미칠적 이재곤의 아들[6] 조선 후기가 되면 워낙 왕손이 귀해 지다보니 책봉 인플레가 있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워낙 왕손들이 많아서 같은 서자녀여도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간택후궁or궁녀출신) 대접을 달리 했고, 후궁 따위의 첩지는 대왕대비의 생신 같은 경사스런 날을 축하하는 의미로 여러 명을 한 번에 처리했으나, 워낙 손이 귀해지다보니 어머니의 신분이 천출이든 아니든 왕의 자식이기만 하면 적자 못지 않은 귀한 취급을 받았고, 후궁 한 명 한 명이 귀해지게 된 것. 인조 이후로는 대군이 봉해진 경우가 없었고, 철종은 아예 영조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였다.[7] 궁녀가 왕과 동침하게 되면 하루아침에 종 5품 승은상궁이 되어 그동안의 업무에서 해방되고 거처와 심부름할 궁녀를 받는다. 왕실의 새로운 어른(왕자녀를 낳을 수도 있다)이 생긴 것이므로 궁녀들도 알고 있어야만 한다.[8] 황손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문용 씨 이후에도 수시로 존재해 왔는데, 대체로 이렇듯 용모가 닮아서, 라던가 수많은 황손 중 누구 한 사람의 인증이 있었다, 라는 식 뿐이었다.[9] 21세기 이후 3~4세대 황손들은 이런 주장자들에 대해 '유전자 감식' 의뢰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편인데, 황손을 자처하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이러한 대처에 응한 바 없다.[10] 봉림대군(후일의 효종)과 인평대군이 있었던 인조대 이후로는 적출 아들이 어찌나 적었는지, 왕후 소생 아들이 전혀 없거나 세자가 될 한 명만 겨우 태어나는 바람에 대군 칭호를 받을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는 그나마도 없어 경종, 영조, 순조처럼 후궁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해 왕으로 세워야 했고 더 뒤에는 후궁 소생의 왕자조차도 없어 족보를 찾고 찾아서 먼 친척인 철종, 고종을 세울 정도였다. 아들들만 놓고 봐도 이런 식이지만 그렇다고 또 딸이 그렇게 넘쳐났던 것도 아니라, 왕자든 왕녀든 적서차별을 할 겨를이 없었다.[11] 명성황후는 실제로 저랬다.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 순헌황귀비 엄씨가 대표적인 피해자.[12] 순종황제의 휘 坧, 의친왕의 堈, 의민황태자의 垠.[13] 더욱이 그의 출생 시기라면, 일반 여염집이라도 딸에게 항렬, 또는 돌림자를 썼을 리 만무하다.[14] '덕혜'는 봉작명이며, '옹주'로서 황적에 오른 일 또한 없었으므로,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엔 단순히 '복녕당 애기씨(생모 귀인 양씨의 당호에서 유래)'로만 불렸고, 일본 (강제)유학 때부터는 덕혜를 음독(音讀)하여 하나같이 '도쿠에'라고 불렸다.[15] 지어준 사람이라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