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부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副議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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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부의장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대한제국 법부대신 이유인 李裕寅 | ||
출생 | 1843년 | |
사망 | 1907년 | |
본관 | 경주 이씨[1] | |
호 | 희재(希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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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의 정치가, 관료.2. 생애
경주 이씨 상서공파 파조 이과(李薖)의 증손인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연손(李延孫, ?~1463)의 14대손[2]이다. 김해의 중인 출신으로 한양에 올라와 명성황후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다. 1888년(고종 25) 파주목사(坡州牧使)로서 전무위원(電務委員)이 되어 기해전선(畿海電線)을 연로(沿路)에 가설하는 데 공헌하였다. 1891년(고종 28)부터 수차례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1894년(고종 31)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896년(고종 33)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다. 1897년(고종 34) 덕수궁을 수리했으며 뮈텔 주교를 고종에게 소개하여 국호(대한제국) 및 연호(광무)의 제정을 돕게 했다. 1898년(고종 35) 법부대신을 지냈다. 1899년(고종 36) 중추원 의관, 경무사, 궁내부 특진관, 1900년(고종 37) 평리원 재판장 서리, 1902년(고종 39) 경상북도관찰사, 시종원 경, 평리원 재판장 서리, 궁내부 특진관[3]을 지냈다. 1903년(고종 40) 한성부판윤, 시종원 경, 경무사 서리를 지냈다. 1904년(고종 41)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동년 심상진(沈相震)과 함께 보안회(輔安會)를 조직하여 부회장[4]으로서 배일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고종 42) 공진회(共進會)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다음해인 1906년(고종 43) 석방되었다. 친일조정에 의해 항일의병의 배후로 지목됐다(저상일월, 대한매일신보). 1907년(고종 44년) 6월 권한남용 혐의로 김해에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중 1살 위의 부인 송씨를 남겨두고 사망하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왜경이 보낸 의사는 경기(驚氣)로 인한 뇌막염으로 진단하였다. 6일 후 아들 이소영이 충청북도 충주 국망봉 높은 곳에 묻었다.3. 평가
평가가 엇갈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종래 보안회 부회장으로 국권 회복 운동에 앞장선 항일운동가로 적었으나 현재는 보안회 해체에 일정 부분 관여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및 경기도 양주시의 향토문화백과사전 등에서는 국권 회복 운동을 했다든가 일본의 정탐 기록을 근거로 항일 의병 운동에 앞장섰던 허위(許蔿) 등과 관계를 맺었다든가 한 사실을 적고 있다.#1#2 그러나 매천야록, 한국구비문학대계[5], 백촌한국학연구원 등은 명성황후가 언니라고 불렀다던 무녀 진령군(眞靈君)과 추문을 뿌렸다든가# 항일지사로 포장된 탐관오리였다든가# 하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4. 여담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金塘室 : 상금곡리) 함안 박씨 집안에는 길흉을 알려준다는 기이한 거문고가 가보로 전해진다. 자명금(自鳴琴) 또는 태랑금(泰娘琴) 으로 불려지는 이 거문고는 1671년(현종 12) 박정시(朴廷蓍)가 충청도 태안군수(泰安郡守)로 있으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195cm, 폭 25cm, 6현으로 되어 있다. 1670년(현종 11) 박정시가 태안군수로 부임하기 몇 해 전인 1666년(현종 7)부터 이곳에 부임하는 군수는 첫날 밤에 죽어버려 다들 부임을 꺼렸는데, 당시 형조(刑曹)에서 근무하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박정시가 해괴한 이 사실을 밝혀 민심을 수습하고자 자원하여 이 곳에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첫날 밤, 관복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혀 놓고 동헌(東軒)에 정좌하고 있었는데, 밤 삼경(三更)이 되자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휘익 몰아치자 밝혀 놓은 촛불이 일시에 탁 꺼져 버리고 비릿한 피 냄새와 더불어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며 점점 동헌 쪽을 향하여 가까워지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동헌 마루 끝에 와서는 뚝 끊겨 지더니 동헌 뜰 아래에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아래 위로 소복을 한 소녀가 목에 칼을 꽂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박 군수에게 얌전히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에 박 군수가 호통을 치며,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역대 군수가 까닭없이 죽은 것은 네 소행이었구나! 사람이라면 이 밤중에 여기에 온 까닭을 고할 것이며, 귀신이라면 사불범정(邪不犯正)인데, 네 어찌 감히 관장(官長) 앞에 이런 꼴로 나타났느냐?" 하고 소녀를 꾸짖었는데, 소녀가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이런 모습으로 이 시각에 나타나겠습니까? 소녀는 틀림없이 귀신이온데, 원귀가 되어 신원(伸寃)을 하려고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나타났사오나 소녀의 비참한 꼴을 본 전임 사또께서 마음이 약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소연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다행히 명관을 만나 이런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정 이야기를 하였는데 2가지 설이 있다.- 1설: 소녀는 5년 전 태안 군수가 된 아버지를 따라 이 고을에 왔는데 그녀의 미색을 탐한 아전이 겁탈 후 목을 칼로 찔러 죽이고 동헌 앞 뜰의 수백 년 묵은 오동나무 속에 거꾸로 집어넣었다. 다음날 박 군수는 뜰 앞 오동나무를 베어 소녀의 시체를 수습하고 장사지내주고 살인범을 잡아 처형하였다. 그날 밤에 꿈에 소녀가 나타나 감사를 표하면서 베어버린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라졌다. 이에 오동나무로 거문고 3개를 만들어 조정에 보고하였고 1개는 박 군수가 간직하고 2개는 조정에 보내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강희제가 이 소문을 듣고 거문고를 요구하자 숙종이 1개를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박 군수는 거문고를 가지고 고향인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金塘室)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박 군수의 집안과 나라에 경사나 흉사가 있을 때마다 거문고가 스스로 소리를 내어 알려주었다고 한다. 후손들은 이 거문고 이름을 자명금(自鳴琴)이라 하여 대대로 가보로 전해왔는데 구한말의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빌려가서 거문고 뒤를 칼로 뚫어 본 후로는 스스로 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 2설: 소녀는 4년 전 이 고을 사또의 태랑(泰娘)이라는 외동딸인데 평민의 아들과 사련(邪戀)이 있어 인연을 맺고 말았다. 사또는 고심 끝에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였으나 신혼초야에 자객을 보내 신랑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날 밤 꿈에서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라는 백발 노인의 경고를 들은 신랑이 잠자리를 바꾸었는데 이를 모르고 자객이 신랑 대신 신부를 죽이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딸의 죽음을 안 사또는 크게 후회하며 딸을 오동나무 곁에 묻었다. 그런데 이후 소녀의 무덤 곁의 오동나무 두 그루의 뿌리가 시구(屍軀)에 파고들어 견딜 수 없게 되자 태안에 부인하는 군수들 앞에 나타나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면 스스로 소리를 내는 자명금이 될 것이라 알려 주었다. 박 군수는 소녀의 말대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 2개를 만들어 1개는 태안군에 두고 1개는 고향으로 가져와 자손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후 구한말의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빌려 가서 낡은 거문고 줄을 갈아 2년 여간 쓰다가 다시 돌려주었으나 이때 고친 후부터는 더 이상 스스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1] 상서공파. 중시조 34세 '裕'자 항렬이다.[2] 중시조 34세.[3] 칙임관 1등에 서임됨.[4] 전 중추원 의관 송수만, 심상진 등이 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민중회의를 열고 보안회(保安會)를 창설하였고, 회장에 신기선, 부회장에 이유인, 대판회장(代辦會長)에 송수만을 추대하였다.[5] 예천 박춘수, 박연식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