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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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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기 모자이크의 걸작 중 하나인 '마다바 지도'

1. 고대~중세2. 근대 : 트란스요르단3. 현대 : 요르단 하심 왕국

1. 고대~중세

요르단 지역은 요르단 강의 아랍어 명칭인 우르둔에서 유래한다. 고대의 페트라로 유명한 나바테아 왕국이 유명하고 고대, 중세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역사와 다소 비슷하다. 고대 로마 시대 이 지역은 아라비아 나바테아로 불렸다. 고대 말 이 지역에는 아랍계 기독교 왕국 가산 왕국이 들어섰다. 이슬람화 이후 이 지역은 고대 로마와 파르티아 중립지대 역할을 상실하고 무역 중심지 역할을 상실하였다. 다만 시리아와 이슬람의 두 성지가 있는 히자즈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은 계속 유지했다.

우마이야 왕조 때부터 요단강에서 유래한 알-우르둔 군관구가 설치되었고, 이것이 지역명으로 고착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십자군 전쟁기에 서부가 예루살렘 왕국에 편입되어 케라크를 중심으로 한 울트라주르뎅 (대요르단) 영주령이 설립되기도 하였으나 살라흐 앗 딘에게 축출되었다. 오스만 제국 말기에는 당국이 베두인들을 정착시키고 러시아 제국의 학살을 피해 남하한 체르케스인들을 이주시키며 농업을 확대하였다.

2. 근대 : 트란스요르단

파일:Arabia_1905-1923.png

요르단 왕국의 시작은 하심 가문의 일원으로 메카의 샤리프였던 후세인 빈 알리(حسین بن علی, Hussein bin Ali, 1853/1854~1931)의 반란에서 비롯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영국이 무함마드의 정통 후손임을 주장하며 일어난 후세인에게 접근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전후 그 대가로 통일 아랍국가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맥마흔 선언이다. 후세인은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전후 약속된 아랍국가 건설은 빈 말이 되고 영국이 요르단 지역을 차지해 후세인의 차남인 압둘라가 트란스요르단의 형식적인 국왕이 된다.

한편 같은 하심 가문의 헤자즈 왕국은 압둘아지즈 빈 사우드의 네지드 술탄국에 점령 당해 합병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인데 이런 사연 때문에 요르단의 하심 왕가와 사우디의 사우드 왕가는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다. 현대의 이라크는 1958년에 공화국이 되었기에 일단 이 사연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1927년 헤자즈 왕국의 패배가 자명해지자 요르단은 네지드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아카바와 마안(Ma'an) 지역을 점령했다.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영국과 헤자즈 사이에 영유권이 제대로 합의되지 않은 일종의 회색 지대로, 요르단이 이 지역을 점령하자 사우디는 이의를 제기했으나 영국은 요르단의 편을 들었다. 해당 국경은 30년 넘게 현상 유지되다가 결국 1965년 요르단과 사우디가 서로의 편의에 따라 약간의 영토를 교환한 뒤에 확정했다. 이렇게 요르단은 국토 남쪽에 두툼한 땅을 가지게 되었다.

3. 현대 : 요르단 하심 왕국

1946년에 트란스요르단은 독립하지만 1948년 조약에 의해 영국은 트란스요르단에서 군사기지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다.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트란스요르단은 1948년과 1950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의 일부를 흡수하고 요르단 왕국으로 재편한다. 1950년 당시 요르단 왕국의 주민은 요르단 강 동안의 베두인과 농민, 서안의 난민과 원주민을 포함하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전혀 다른 두 부류로 구성됐다. 효율적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 1952년의 헌법은 두 지역 모두 새로운 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도록 규정했다. 팔레스타인인을 포함한 국민방위군이 구성되고 이 국민방위군은 나중에 아랍 군단에 통합되었다.

나세르아랍 연합 공화국 구상에 자극을 받아 1958년 한때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국들끼리 '아랍 연방'이라는 연합을 구성해 이라크의 파이살 2세를 연방의 원수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반 년 만에 이라크에서 압둘카림 카심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국왕 파이살 2세를 포함한 파이살 1세의 후손들을 학살해버리고 이라크로 망명했던 후세인의 장남 알리의 아들 압달라('Abd al-Ilah)[1]도 살해한다. 그래서 현재 이라크 하심가의 수장은 후세인의 4남인 제이드[2]와 그 아들로 이어진다.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거 유입되어 정세가 불안했으며, 1976년 후세인 1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칙령을 통해 통치하다가 1984년에서야 국회가 회복되었다. 1988년에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결과 명목상 영토가 되어버린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였으며, 1994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2022년에너지 위기가 닥쳐오면서 석유 가격을 포함한 물가가 폭등해 반정부시위가 있기도 했다.


[1] 파이살 2세가 미성년자였을 때 섭정을 맡았다.[2] 1958년 당시 영국 주재 이라크 대사로 런던에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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