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29 21:51:45

카르마트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고대 중/근세 근현대

<colbgcolor=#000> 헤자즈 이슬람 제국 툴룬 왕조

이크쉬드 왕조 파티마 왕조 메디나-메카 샤리프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오스만 튀르크 제국
네지드 압바스 왕조 카라마트



아랍 부족들 (베두인)
바레인
쿠웨이트
카라마트 압둘 카이스 우윤
왕조
유스푸르 호르무즈 왕국 자르완 왕조 자브르 왕조 <colbgcolor=#006400> 포르투갈 포르투갈 사파비 왕조 야아리바 왕조 - 오만 제국
Q 오스만
U 이바디 운동 부와이흐 왕조 오만
이맘국
셀주크 제국 나브하니 왕조 나브하니 왕조 호르무즈 왕국 야아리바 왕조
오만



예멘

유피르 왕조 파티마 술라이히 왕조 술라이히 왕조 주라이 왕조 함단 왕조 아이유브 왕조 라술
왕조
예멘 타히르 왕조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오스만 오스만
유피르 예멘 대반란
지야드 왕조 노예 나자흐 왕조 마흐디 왕조 타히르 하심 왕조
이바디 세력
※ Q는 카타르, U는 아랍에미리트 / 연두색 : (수니파) 아랍계 왕조, 진한 초록색 : 시아파나 하심 가문 왕조, 자주색 (짙은 핑크) : 이란 계통 / 연한 빨강 : 토착 예멘계 왕조. 쿠웨이트는 오만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파비, 오스만의 지배를 받음. }}}}}}}}}

파일:검은 깃발.svg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00> 역사 <colcolor=#000,#fff>아바스 왕조/역사 | 호람딘 | 잔즈 반란 | 카르마트
정치 칼리파 | 역대 보편 칼리파(아바스 왕조) | 역대 이집트 통치자(아바스 왕조)
행정구역 쿠파 | 팔루자 | 바그다드 | 락까 | 사마라 | 카이로
경제 디나르 | 이슬람 황금기
종교 이슬람
문화 비마리스탄 | 지혜의 집 |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
}}}}}}}}} ||

파일:map-islamic-world-ca-1000-a.jpg

아랍어 : قرامطة‎ (Qarāmita)
영어 : Qarmat / Qarmatians

1. 개요2. 역사
2.1. 이스마일파의 분열 (899년)2.2. 하자르 (알 아흐사) 정복 (901년)2.3. 시리아의 카르마트 봉기
2.3.1. 하마 전투 (903년)
2.4. 자카라와이의 이라크 봉기2.5. 아부 타히르 술라이만의 이라크 원정
2.5.1. 바스라 & 쿠파 함락과 순례단 학살2.5.2. 사즈 왕조의 개입과 실패 (927년)2.5.3. 바그다드 위협과 약탈전 (928년)
2.6. 메카 학살과 흑석 탈취 (930년)
2.6.1. 거짓 마흐디와 내분 (931년)2.6.2. 흑석 반환과 온건화
2.7. 하산 알 아삼의 시리아 & 이집트 원정
2.7.1. 다마스쿠스 일시 점령 (971년)2.7.2. 1차 이집트 침공2.7.3. 2차 이집트 침공 (974년)2.7.4. 마지막 시리아 원정 (977년)
2.8. 쇠퇴와 멸망
3. 중세식 사회주의?

1. 개요

10세기 경 아라비아 반도 동부(알 아흐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시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의 신권 정치 공동체. 아랍어로는 카라미타로 표기되며, 실질적 창건자인 아부 사이드 하산 이븐 바흐람 알 잔나비의 이름을 따 아부 사이디야로도 불린다. 이란 서남부 해안의 잔나바 (반다르 가나베) 출신의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가 건국하여 2세기 가량 걸프 해안 대부분을 지배하며 압바스 왕조를 위협했다.

이슬람의 한 분파지만 5대 의무 중 하나인 성지 메카 순례를 미신으로 여겨 부정했으며, 930년에 메카를 습격하여, 잠잠의 샘물을 순례자들의 시체로 막아버리고 검은 돌을 탈취했다. 또한 바그다드를 위협하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는 등 중세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카르마트는 이스마일파(7이맘파) 파티마 왕조, 12이맘파 부와이 왕조와 함께 10세기 경 시아파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서로 연대하진 않았고, 12이맘파인 부와이 조는 물론, 같은 7이맘파 계통인 파티마 조와도 마흐디[1] 교리를 두고 반목하더니 카르마트 군대가 이집트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전성기도 한때여서, 11세기에 들어 쇠퇴한 카르마트는 하나 둘 거점을 상실하더니 1077년 셀주크 제국-우윤 왕조 연합군에게 수도 알 무미니야가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2. 역사

수니파 종주국이던 아바스 칼리파조가 쇠퇴해가던 9세기 후반, 이라크 남부에서 일어난 잔즈 반란으로 바레인 일대에 대한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시아파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그중 7이맘파, 즉 이스마일파는 시리아 중부의 살라미야에 본부를 두고, 각지에 '다이', 즉 선교사를 파견해 세력을 구축해갔다. 이때 이라크 남부(사와드)에 파견된 다이 알 후세인 알 아흐와지에 의해 쿠파의 짐꾼이었던 함단 카르마트가 이스마일파로 개종했다. 870년대에 뛰어난 능력으로 조직을 장악해나간 함단 카르마트는 알 후세인이 사망 혹은 전임되자 그를 이어 사와드의 다이가 되었다. 잔즈 반란[2]으로 아바스 왕조는 이미 수도 근처에서조차 지배력이 흔들렸고, 따라서 함단 카르마트는 바그다드 남쪽의 칼와다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884년, 마지막 이맘 알 마흐디가 사라진 후 12이맘파 역시 흔들렸고, 함단 카르마트는 마흐디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3](이스마일파 한정 제7대 이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설교를 통해 기존 정부와 12이맘파에 실망감을 느끼던 베두인과 농민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일약 이라크 지역 시아파 대부분을 흡수해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함단 카르마트의 세력은 '카르마티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는 이스마일파 자체가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함단 카르마트는 제자이자 처남인 아부 무함마드 아브단과 함께 다이들을 양성해 이라크는 물론 바레인과 예멘, 이란 남부 방면으로 파견했다. 제2차 전파 바레인과 이란 남부에는 아부 사이드 하산 알 잔나비, 예멘에는 알리 이븐 알 파즐과 이븐 하우샵 및 아부 압둘라 알 쉬이 등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마흐디'의 재림을 위한다며 개종자들에게 무려 수입의 1/5에 달하는 세금을 부과했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으로 쿠파 인근에 다르 알 히즈라 성채가 세워져 새로운 거점이 되었고, 이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바그다드 정부는 카르마티야에 대해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했지만 내분으로 정신없던 상황이라 무력을 쓰진 못했다. 다이들 중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는 본래 카티프의 밀가루 상인으로 위장해 있다가 타카피 계열의 산바르 부족을 포섭[4], 점차 짐꾼과 도살업자 등의 상인들에게 이스마일파를 전파해 나갔다. 동시에 예멘의 다이 이븐 하우샵이 파견한 다이 아부 자카리야 앗 타미미 역시 킬랍 부족을 포섭한 상태였고, 처음에 그와 대립하던 알 잔나비는 화해하고 힘을 합쳤다. 뒤이어 우카일 부족도 포섭한 알 잔나비는 890년 무렵 베두인 군대를 일으켜 카티프, 사프완에 이어 알 아흐사의 중심 도시 하자르 등을 공격했고 일부 부대는 오만의 소하르까지 일시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알 잔나비는 내륙의 네지드로도 진격, 쿠샤이르와 사드 부족을 죽이거나 축출하여 알 야마마 지역을 황폐화시켰다.[5] 자신감을 얻은 알 잔나비는 해군도 창설해 아왈 (바레인 본섬) 역시 정복, 지나가는 선박들에 관세를 부과했다.

2.1. 이스마일파의 분열 (899년)

그러던 899년, 본부인 살라미야의 이맘 후세인(압둘라 알 라디)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로 알려진 사이드가 스스로를 '마흐디'로 칭했다.(압둘라 알 마흐디) 이에 함단 카르마트는 동료인 아부 무함마드를 살라미야로 보내 진상을 파악하게 했고 사실로 드러나자[6] 살라미야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이라크 방면 다이들을 소집하여 선교를 중단시켰다. 하지만 그 조치 이후, 함단 카르마트는 사라져버렸다. 여러 설이 있는데, 이븐 말리크는 그가 바그다드에서 처형되었다고 했고, 이븐 하우칼은 그가 사이드와 화해한 후 '아부 알리 하산'으로 개명하곤 파티마 왕조의 다이가 되었다고 했다. 여기선 이대로 끝나면 노잼임으로 후자의 설을 택했다.

아부 알리 하산은 스스로를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제4대 정통 칼리파이자 초대 이맘)의 조카였던 무슬림 이븐 아킬의 후손이라고 했다. 그는 이집트 푸스타트의 다이가 되었고 옛 제자들, 즉 기존 카르마티야 세력을 마흐디에게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연락을 취했다. 이들 중 예멘의 다이들과 이프리키야(북아프리카)에서 쿠타마 베르베르인들을 개종시키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호응했으나 바레인에 세력을 구축한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는 반발했다. 전자는 파티마 왕조의 개국 세력이 되었고, 후자가 바로 기존 이스마일파의 '마흐디' 관념을 고수하는 카르마트파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함단 카르마트는 자신이 열심히 키워 놓은 세력을 두고 전향해버린 꼴이 되었다. 이때부터 '카르마티야'는 파티마 왕조에 반대하는 이스마일파를 일컫는 용어가 되었고, 때때로는 이스마일파가 아님에도 파티마 왕조를 적대하는 이들에게까지 쓰였다.[7] 알 잔나비는 사이드에 충성한 아부 자카리야 앗 타미미를 감금, 처형하며 바레인 해안의 독자적인 군주가 되었다.

2.2. 하자르 (알 아흐사) 정복 (901년)

899년 후반 알 잔나비는 카티프를 함락, 압바스령 바레인의 치소인 하자르를 제외한 알 아흐사 및 바레인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에 놀란 바스라 주민들은 기존에 무방비 상태에던 도시에 진흙 벽돌 성벽을 둘렀다. 900년 초엽, 알 잔나비는 하자를 포위했다. 하지만 압바스 수비대가 결사 항전 하며 7개월 넘게 포위가 이어지자 알 잔나비는 3km 거리의 호푸프에 다르 알 히즈라 (사령부)를 세우고 하자르를 봉쇄했다. 한편 900년 4월 압바스 칼리파 알 무타디드는 알 압바스 이븐 아므르 알 가나위를 바레인 및 야마마 총독에 봉해 자원병 중심의 2천 병력과 함께 파견했다. 하지만 7월 말엽, 알 압바스는 카티프에서 이틀 거리엔 소금 습지에서 카르마트 군에 패했다.

7백의 포로는 처형되었고, 알 압바스 만이 석방되어 귀환했다. 원군의 패배 소식에 하자르는 항복했다. 다만 901년, 알 잔나비가 바스라 인근을 습격하던 틈에 압바스 조의 신임 총독 이븐 바누가 하자르에 입성해 도시를 수복했다. 903년 이븐 바누는 자신이 카티프를 함락, 알 잔나비의 후계자를 죽였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하지만 얼마 후 카르마트 측의 식수 차단에 하자르는 다시 항복했고, 다수의 주민들은 아왈 (바레인 섬) 및 시라프 등지로 피신했다. 카르마트 군의 약탈 속에서 남은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개종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비록 하자르는 여전히 큰 도시였지만 알 잔나비는 알 아흐사 오아시스의 호푸프에 머물렀고, 이로써 하자르는 점차 쇠락한다.

2.3. 시리아의 카르마트 봉기

한편 함단 카르마트가 사라진 후, 얼마되지 않아 아부 무함마드 아브단마저 다이 중 한 명이었던 자카라와이 이븐 미흐라와이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카르마트 지지자들의 위협을 받아 이라크를 떠난 자카라와이는 900년부터 시리아 사막 동부의 사와르에 숨어 아사드, 타이, 타밈 등 베두인 부족들에 선교했으나 효과가 미미했다. 그러자 자카라와이는 901년 차남 알 후사인을 시리아 사막 서부로 보냈는데, 그는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의 후손인 이맘의 이름으로 설교한 끝에 바누 칼브 계열의 울라이스 부족과 아스바그 부족의 일부를 포섭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에 고무된 자카라와이는 조카에 이어 장남 야흐야를 파견했고, 야흐야는 스스로 사힙 앗-나카 (암낙타의 주인)를 칭하며 알-파티미윤이라 불리게 된 시리아 지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알 후사인은 형을 따라 사힙 앗-샤마 (점의 주인)를 칭했다.[8]

살라미야에 있던 사이드 (아부 무함마드 압둘라 알 마흐디)는 정체를 드러나지 않기 위해 야흐야와 알 후사인 형제의 봉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고, 후대 파티마 조의 기록에서 자카라와이가 사이드의 동생을 이맘의 대표자 겸 봉기의 명목상 지도자로써 베두인들에게 보냈다는 대목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한편 약탈에 관심이 많던 베두인 부족들을 모아 타드무르 (팔미라)에 근거지를 마련, 중소 도시들을 습격하던 형제는 902년 말에 봉기하여 라카 부근에서 투그즈 빈 주프가 이끄는 툴룬 왕조 군대를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 무렵 사이드는 바그다드의 이스마일파 신도들로부터 받은 비둘기 서신으로 살라미야의 태수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따라서 사이드는 밤을 틈타 아들, 다이 파이루즈, 4명의 노예만을 대동하고 살라미야를 탈출했다. 남겨진 모친, 두 딸, 조카녀 등의 여성들은 노예 술루크의 보호에 맡겨졌다. 사이드의 일행은 3일만에 홈스, 트리폴리, 다마스쿠스, 티베리아스를 거쳐 태수가 비밀리에 이스마일파로 개종한 라믈라에 당도했다.[9] 따라서 야흐야와 알 후사인 형제가 사이드를 알현하기 위해 살라미야를 방문했을 때에 그는 없었고, 남겨진 여인들로부터 호칭이 이맘에서 마흐디로 변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알 후사인은 사이드 알현을 위해 라믈라로 향했고 야흐야는 902년 12월,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던 투그즈는 도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8개월에 걸친 공방전 도중 야흐야가 전사하자 지도자 자리를 계승한 알 후사인은 조공을 대가로 주변 도시들을 약탈한 후 회군했다. 다만 병력을 재정비한 알 후사인은 살라미야와 홈스 등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고 하마, 바알벡, 마라트 앗 누만 등을 습격했다. 그는 마흐디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홈스에서 이름이 적히지 않은 마흐디 명의로 동전을 주조하고 금요 예배에서 '칼리파이며 바르게 인도된 후계자이고, 시대의 주인이며, 신자들의 사령관인, 마흐디'의 이름으로 쿠트바를 진행했다. 903년 8월부터 살라미야에 주둔하던 알 후사인은 사이드가 돌아와 마흐디임을 선포할 것을 기대했으나, 사이드는 아직 입지가 굳건하지 않다 여겼는지 정체를 계속 숨기고자 라믈라에서의 은둔을 이어갔다.[10]

2.3.1. 하마 전투 (903년)

카르마트의 침공에 툴룬 조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시리아 주민들은 아바스 조에 개입을 요청했다. 903년 여름 칼리파 알 무크타피는 친히 바그다드를 떠나 전방 도시인 라카에 이르렀다. 그러던 8월 중순 무렵 카르마트군 지휘관 알 무타왁크는 알레포 주변에서 휴식 주이던 1만여 아바스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했는데, 살아남은 1천의 병력이 아불 아가르의 지휘하에 항전하여 함락되지 않았다. 동시에 압바스 조와 연대한 툴룬 조의 장수 바드르 알 함마미가 다마스쿠스 주변에서 알 후사인을 격파했고, 후자가 시리아 사막으로 숨어들자 알 무크타피는 장수 알 후세인 이븐 함단을 보내 추격하게 했다. 기세를 탄 압바스군은 디완 알 준드 (군사령관)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의 지휘하에 11월 29일 하마 남쪽 24km 지점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카르마트군에 맞섰다.[11]

압바스 군대가 접근하자 카르마트측 좌익이 알 후사인 이븐 함단이 지휘하는 압바스측 우익을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고, 알 후사인 이븐 함단은 두 차례의 공세를 모두 격퇴하며 후자의 경우 6백여 명을 전사시켰다. 이에 카르마트측 좌익이 무너져 패주했다. 알 후사인 이븐 함단은 추격에 나서 2백여 명을 전사시키고 말 5백필, 은 목걸이 4백개 등의 전리품을 얻었다. 카르마트측 우익 역시 압바스측 좌익과 격전을 벌이던 중에 칼리파 이븐 알 무바라크와 룰루가 이끄는 압바스 예비 병력이 측면에서 덮치자 역시 전열이 무너져 패주했다. 압바스 군대는 말 6백필과 은 목걸이 2백개 등의 전리품을 얻었다. 중앙의 사령관 무함마드는 이미 승리한 우익의 지원으로 남은 카르마트 군대도 쉽게 격파했다. 따라서 하마 전투는 압바스 군대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다이 앗 누만 등 카르마트군 장수들이 전사했다.

무함마드는 기병대가 적을 추격하다가 보병 및 보급 부대[12]가 베두인들의 습격을 받을까 염려하여 휘하 기병대에게 1km 가량만 뒤쫓게 한 후 복귀시켰다. 반격에 대비하여 밤새 숙영지를 경계하며 다음날까지 병력을 추스른 무함마드는 라카의 칼리파에게 포로들을 보냈다. 한편 살라미야에서 보물과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알 후사인은 패전보에 분노했다. 그는 '자신을 버린' 마흐디에 대한 보복으로 살라미야에 남겨진 사이드의 저택을 파괴하고, 그 구성원과 하인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처형했다. 그나마 사이드의 부인들과 자녀들은 술루크에게 구출되어 후일 파티마 왕조 건립 시에 이프리키야에서 합류한다. 이로써 자카라와이 세력은 파티미윤 대신 카르마트의 일원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후일 파티마 왕조 사가들에 의해 사이드 (압둘라 알 마흐디)와의 관계가 부정되며 규탄되었다.

살라미야 학살 후 기존 이스마일파 조직을 대부분 상실한 알 후사인은 울라이스 부족을 규합해 싸움을 이어가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사촌 알 뭇다티르, 부관 알 무타왁크, 그리스인 하인만을 대동한 채로 시리아 사막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일행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라흐바 인근 앗 달리야에 이르러 식량이 바닥났고, 보급품을 사러 마을로 향한 하인의 복장과 행동은 마을 주민들의 의심을 샀다. 결국 현지 관료 아부 쿠브자에게 신고가 들어왔고, 그는 호위병과 함께 하인을 잡아 심문한 끝에 알 후사인 일행을 찾아내 사로잡았다. 아부 쿠브자는 라흐바 총독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쿠쉬마르드와 함께 알 후사인 일행을 라카의 칼리파에게로 인도했다. (903년 12월) 칼리파 알 무크타피는 포로들과 함께 바그다드로 개선했고, 포로들은 투옥되었다. 알 후사인은 극심한 고문 끝에 이스마일파 조직에 대해 실토했고, 이로써 많은 비밀이 역사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농촌 지역의 잔당을 토벌하던 무함마드 역시 904년 2월 2일에 합류했다. 11일 후 알 후사인 등 카르마트 포로들은 쿠파와 바그다드 일대의 이스마일파 조직원들과 함께 무함마드 및 경무국장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 와티키의 주관 하에 공개 처형되었다. 이로써 시리아의 카르마트 준동은 기세가 크게 꺾였다.[13] 그리고 하마 전투에서의 승리로 시리아로의 진격로가 열리자 압바스 왕조는 904-05년에 툴룬 왕조를 멸하며 시리아 및 이집트를 수복한다.

2.4. 자카라와이의 이라크 봉기

이라크에서 관망하던 자카라와이는 아들들의 죽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906년 부하 아부 가님 나스르를 보내 다시 바누 칼브 부족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스르는 보스라, 다라, 티베리아스, 하우란 지역을 약탈한 후 다마스쿠스와 이라크의 히트까지 공격했다. 다만 나스르는 같은해 7월에 압바스 토벌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사면을 구하고자 했던 베두인들에게 암살되었다. 그러자 자카라와이는 다른 다이 알 카심 이븐 아흐마드를 보내어 충성을 유지한 베두인 부족들을 이끌게 했고, 자신도 곧 합류하여 임박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것임을 약속했다. 고무된 베두인 군대는 이번에는 이라크의 쿠파 교외 지역 (사와드)를 습격했고, 906년 10월에는 8백여 카르마트 기병대가 쿠파에 나타나 성밖에서 이둘 아드하를 축하하던 주민들을 공격했다. 베두인들이 약탈하는 동안 성안으로 피신한 주민들은 곧바로 항전에 나섰고, 뒤늦게 공성에 나선 카르마트 군을 격퇴했다.
이후 카르마트 군은 알 카디시야 인근으로 철수했고, 시리아 사막의 사와르에서 은둔을 끝낸 자카라와이를 영접해 지도자로 모셨다. 10월 중순 자카르와이는 압바스 조의 토벌군을 격퇴한 후 메카로 향하던 페르시아 및 호라산 순례단을 알 아카바 (현 이라크-사우디 국경지대)에서 공격해 대부분의 순례객을 죽이고 물자를 약탈했다. 이에 907년 1월, 압바스 조의 튀르크인 장군 와시프 이븐 사와르타킨이 카디시야 인근 와디 디 카르의 이람의 폐허에서 2일에 걸친 전투 끝에 카르마트 군을 격파했다. 패배한 베두인들은 흩어졌고, 부상을 입은 채로 사로잡힌 자카라와이는 며칠 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사로잡힌 카르마트 가담자들은 처형되었고, 압바스 조는 자카라와이의 매부 무함마드 이븐 다우드 앗 자라흐를 심문해 이스마일파 선교 체계에 대한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이는 앗 타바리에 의해 현재까지 남아있다.

카르마트의 준동과 함께 알레포 등의 시리아 도시들은 물론 칼리파가 소재한 바그다드에서조차 시아파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9세기 후반에 이미 4개의 법학파를 중심으로 체계화된 수니파 이슬람은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았고 시리아와 이라크 어느 곳에서도 시아파가 집권하지 못했다. 한편 사와드 (이라크 남부)의 잔여 카르마트 세력은 자카라와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재림을 믿었고, 남은 자들이라 하여 바킬리야라 불렸다. 시리아 및 이라크의 카르마트 봉기는 자신들 외의 종파와 계층을 전부 공격하여 모두를 적으로 삼았고, 규율이 미비한 베두인들로 군대를 편성했기에 제대로 정복지를 관리하지 못했으며 압바스 칼리파 조의 심장부에서 활동했기에 결국 진압될 수 밖에 없었다. 알 잔나비는 905년 아들 아불 카심을 보내 막 주인이 바뀐 다마스쿠스를 공격해 연공을 받아낸 것 외에는 대외 원정을 삼갔고, 이라크 방면에서도 살라미야 학살 후 함께 압둘라를 마흐디로 인정하지 않는 이스마일파 처지가 된 자카라와이를 돕지 않았다.

2.5. 아부 타히르 술라이만의 이라크 원정

알 아흐사의 알 잔나비는 전통적인 아랍 베두인 군주의 모습으로 통치했고, 이스마일파 교리의 핵심인 바틴 (숨겨진 교리)에 집중하여 하루 5번 예배나 라마단 기간 단식과 같은 이슬람 의례들을 폐지했다. 한편 905년 무렵부터 바레인 (알 아흐사)의 카르마트 기병대는 노예를 사로잡고 현지 잡바 부족의 하자르 구원 참여를 응징하기 위해 종종 바스라를 습격했다. 카르마트 기병대는 상당히 강력하여 912년 여름, 불과 30여 병력이었음에도 바스라 총독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910년을 전후로 알 잔나비는 기존의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 대신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 (아부 하쉼)을 마흐디로 선포했다.[14] 그리고 716년에 사망한 그가 히즈리력으로 300년인 912년에 부활할 것이라 예언했는데, 실현되지 않고 같은해 원수인 사이드 (압둘라)가 마흐디를 선포하며 파티마 조를 건국하자 여론의 실망에 직면했다. 그러던 913년 여름, 궁전에서 목욕 중이던 알 잔나비는 두 슬라브인 환관들에게 살해되었다.[15] 동시에 산바르 형제 중 알리와 함단 등 다수의 고위 관리들과 심복들도 피살되었다.

산바르 형제 중 살아남은 하산이 상황을 수습했고, 1년여간 알 잔나비의 죽음을 숨겼다. 6-7명의 왕자들이 모두 자신의 조카였기에 하산은 그들을 모두 공동 군주로 삼았고, 압바스 조의 재상에게 보낸 서신에도 그렇게 표현했다. 다만 왕자들 중 장남인 아불 카심 사이드가 사실상 군주로 여겨지다가 923년 1월에 막내 동생 아부 타히르 술라이만 알 잔나비가 집권했다. 일설에 따르면 사이드는 섭정이었고, 부친이 지명한 술라이만이 장성하자 자진 퇴위했다 한다.

2.5.1. 바스라 & 쿠파 함락과 순례단 학살

즉위 당시 16세에 불과했던 술라이만은 업적을 세우기 위해 10년 넘게 이어지던 압바스 왕조와의 평화를 깨기로 했다. 그러던 923년 8월, 카르마트에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압바스 조의 재상 알리 이븐 알 자라흐가 실각하고 강경파인 아불 하산 알리 이븐 알 푸라트가 집권하자 술라이만은 이를 핑계 삼아 불과 4일 후 2천여 기병대와 함께 바스라를 기습 공격했다. 밤을 틈타 당도한 카르마트 군대는 사다리를 통해 성벽을 기어 올랐고, 방심하고 있던 수비대를 압도한 후 성문을 열어 모래와 돌로 고정했다. 바스라 총독 사부크 알 무플리히는 단순 베두인 습격이라 여겨 소수의 호위대만 대동하고 나섰다가 전사했고, 사로잡힌 그의 가족들은 노예가 되었다. 바스라 주민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저항했으나 이미 수비 병력이 와해된 상태였기에 카르마트 기병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이로써 이라크 제2의 도시를 함락한 술라이만은 도시를 17일간 약탈한 후 많은 포로 및 전리품과 함께 그 어떠한 방해를 받지 않고 알 아흐사로 돌아갔다. 재상 아불 하산이 파견한 구원 병력은 카르마트 군이 떠난 후에야 도착했다. 바스라 함락이란 대사건에도 아불 하산은 권력 다툼에만 치중하여 유능한 장수이던 정적 무니스 알 무자파르를 라카로 쫓아냈고, 그의 아들 알 무하신은 관료들을 잡아 고문해 자금을 갈취했다. 따라서 이후로도 소수 정예의 카르마트 기병대가 습격하고 떠난 후에야 압바스 군대가 뒤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이라크는 잔즈 반란 이후 반세기 만에 최대의 혼란에 빠졌다. 파괴된 바스라는 이후로도 완전히 재건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가 카르마트의 공격이 잠잠해진 930년에 동북쪽의 새 위치로 이전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924년 3월, 술라이만은 메카에서 바그다드로 돌아오던 핫즈 순례단의 선발대를 알 하비르에서 공격해 학살했다. 이 소식이 알 하비르 남쪽의 파이드에 당도한 후발대에 전해졌는데, 후발대에는 압바스 조정의 고관들도 있었다. 후발대는 우선 파이드에 멈춰 다른 카라반 (대상) 행렬들과 합류해 인원을 늘렸고, 호송 대장 아불 하이자 압둘라 알 함다니[16]는 와디 알 쿠라로 우회할 것을 제안했으나 순례객들이 너무 긴 여정이라며 반대했다. 파이드의 식량이 바닥을 보이자 순례단은 알 하비르로 향했고, 술라이만은 1천의 보병 및 8백의 기병과 함께 어렵지 않게 저항하는 이들 다수를 전사시킨 후 압둘라 알 함다니와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의 숙부를 포함한 순례단 대부분을 사로잡았다.

술라이만은 몸값의 가치가 있는 주요 인사들만 알 아흐사로 압송했고, 일반인 순례객들은 보급품과 낙타도 없이 맨몸으로 사막에 남겨졌다가 대부분 갈증과 피로로 인해 죽었다. 알 아흐사로 압송된 고위급 포로들은 압바스 조정이 몸값을 지불한 후 석방되었고, 카르마트는 핫즈에 있어 칼리파의 권력을 상징하는 의례용 보석 왕관인 샴사 등 막대한 양의 재물을 얻었다. 바스라 함락과 함께 핫즈 순례단 공격은 모두 이슬람력 (히즈리력) 311년에 벌어졌고, 그 해는 후일 무슬림 사가들에 의해 '파괴의 해' (사나트 앗-담마르)라 불리게 되었다. 바그다드 주민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재상 아불 하산에 대해 봉기를 일으켰고, 결국 그는 924년 7월에 폐위된 후 아들 알 무하신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후 압바스 왕조에는 수십년간 민간 출신 관료가 실권자에 오르지 못하고 일종의 무인 정권이 설립된다.

925년 초엽에는 메카로 향하던 순례단이 6천의 호위 병력을 대동했음에도 카르마트의 공격과 추격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쿠파로 말머리를 돌렸다. 뒤이어 술라이만은 압바스 조정에 바스라와 후제스탄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자 쿠파를 공격, 함락하고 7일간 약탈했다. 그후 이번에도 카르마트 군은 압바스 군의 뒤늦은 대응 전에 쿠파의 철제 성문을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알 아흐사로 유유히 돌아갔다. 926년 1월에 압바스 조정은 호위 병력을 1만에 가깝게 증원하고, 카르마트 측에 많은 뇌물을 바친 후에야 핫즈 순례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927년의 핫즈 순례 시에는 압바스 조정이 호위 병력을 제공할 예산이 부족해 순례단 파견 자체가 취소되었고, 메카에서는 카르마트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문으로 주민들이 도시를 탈출하는 등 대소동이 있었다.

2.5.2. 사즈 왕조의 개입과 실패 (927년)

바그다드에서는 아불 하산의 처형 후 임명된 두 재상 (압둘라 알 카카니, 아흐마드 알 카시비)들의 노력에도 자금 조달이 잘 되지 못했고, 압바스 조정 내 관료들이 비밀리에 카르마트 측과 협력한다는 소문은 내부 정치 다툼에 줄곧 활용되었다. 이미 926년에 재상 알 카시비는 아제르바이잔의 제후국인 사즈 왕조의 유수프 이븐 아빌 사즈에게 카르마트 공격을 부탁했고, 국고가 텅 비었기에 원정 비용으로 아직 압바스 조의 영향력이 미치는 동부 영토인 지발 (서부 이란) 및 아제르바이잔 자체의 세금을 약속했다. 하지만 캅카스-이란 고원의 산지에 익숙했던 유수프의 군대는 이라크 남사부의 평탄한 사막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의 충성심 자체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대장군 무니스의 강권 하에 충신으로 여겨진 알리 이븐 알 자라흐가 다시 재상에 선임되며 일종의 위기 대응을 위한 '국민 통합 정부'가 출범했다. 알리는 사즈 왕조 대신 사막전에 익숙하고 단가가 저렴한 편인 베두인계 아사드, 샤이반 부족을 용병으로 고용할 것을 제안했다. 동시에 알리는 막 이라크에 진입하던 유수프에게 회군을 설득했지만 후자는 거부했다. 유수프는 와시트에 주둔하며 주민들을 억압했고, 약속된 대금이 도착한 후에야 카르마트를 대적하러 출정할 것이라 밝혔다. 927년 11월, 술라이만은 2천여 병력과 함께 쿠파로 진격했다. 대장군 무니스는 동로마 국경 습격에서 소환되어 쿠파에 많은 무기와 보급품을 비축하고 유수프에게 쿠파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기동력이 좋은 카르마트 군이 먼저 쿠파를 장악해 물자를 모두 탈취했고, 결국 조정에게서 돈을 받아낸 유수프는 뒤늦게 쿠파로 향했지만 병력 우위를 믿고 그해 12월 카르마트 군을 별다른 대비 없이 공격했다가 대패했다. 유수프 본인도 포로가 되었고, 이라크 전역이 카르마트의 위협 하에 공포에 질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자카라와이의 잔당인 바킬리야 역시 초기 다이 아부 무함마드 아브단의 조카의 지휘 하에 리아파, 다훌, 압스 베두인 병력과 함께 파라오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묘사한 쿠란 구절을 적은 하얀 깃발을 내걸며 쿠파 근교에서 봉기했다. 바킬리야는 한때 쿠파를 장악했지만 와시트에 주둔하던 압바스 장군 하룬 이븐 가립에게 토벌되었다. 잔당 세력은 카르마트 군에 합류햇고, 그 페르시아계 구성원들이 회군하는 술라이만을 따라가 바레인 해안에 정착해 아자미윤이라 불리게 되었다.

2.5.3. 바그다드 위협과 약탈전 (928년)

쿠파에서의 승리 후 술라이만은 바그다드를 목표로 하여 북상했다. 바그다드 주민들은 도시가 함락되고 칼리파가 시해될 것이라 믿어 혼란에 빠졌고, 이미 술라이만이 궁전들을 추종자들에게 분배해 두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압바스 조정은 거의 수도를 떠나지 않는 황궁 경비대까지 동원했고, 재상 알리는 태후 샤가브에게 바그다드 선원들을 징집하기 위한 자금을 요청했다. 927년 12월 중순, 술라이만은 안바르에 이르러 유프라테스 강에 놓인 다리가 파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일부 병사들이 강을 건너 다리를 재건했고, 주력군은 강 건너편으로 갈 수 있었지만 짐이 많은 보급 부대는 서안에 그대로 남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압바스 군이 밤을 틈타 다리를 다시 불태우며 카르마트 병력은 양분되었는데, 술라이만은 그에 굴하지 않고 바그다드로 진격을 계속했다.

이에 맞서는 무니스와 아불 하이자 압둘라는 이라크 각지에서 긁어모은 4만 2천의 대군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했다. 다만 그중 정규군은 수천에 불과했다. 따라서 무니스는 정면 대결을 하는 대신 바그다드로 향하는 다리들을 모두 파괴하고 관개 수로들을 터뜨려 홍수를 내는 것으로 적의 진격을 막았다. 928년 1월, 술라이만은 바그다드 성벽이 보이는 아카르쿠프 언덕에서 진군이 불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 무니스는 부관 얄크바크에게 사즈 왕조 군대의 잔존병 등 6천 병력을 주어 유프라테스 서안에 남아있는 카르마트의 보급 부대를 공격하고 유수프를 구출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술라이만은 밤을 틈타 강을 건너 보급 부대와 합류했고, 따라서 압바스 군대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이후 유수프는 처형되었고, 이로써 사즈 왕조는 혼란을 겪다가 이듬해 멸망한다.
바그다드 진군이 좌절되었음에도 술라이만은 회군하는 대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진, 마주치는 마을마다 약탈하며 자지라 지역으로 향했다. 카르마트 군은 비록 결사 항전한 히트와 라카에서는 격퇴되었지만 달리야와 라흐바를 함락했고, 분견대는 라스 알 아인신자르까지 이르러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재물을 얻어내거나 농촌을 약탈했다. 압바스 조정이 바그다드에만 병력을 집중해 두었기에 이라크 지방 도시들은 자체적으로 카르마트의 침공을 견뎌야 했고, 6개월 넘게 이라크를 무법자처럼 누비던 술라이만은 귀환을 약속하는 시를 남긴 채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알 아흐사로 돌아갔다. I'll be back

술라이만의 침공으로 칼리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928년 5월 재상 알리가 해임된 후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 역시 이듬해 잠시 폐위되기에 이른다. 또한 서아시아 최대의 생산력을 자랑하던 사와드 평원은 관개 수로 및 도시들의 파괴로 황폐화되며 사막화에 노출되게 되었다. 932년 알 무크타디르는 결국 무니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압바스 왕조 및 이라크 지역은 13년간 최악의 혼란을 겪다가 결국 다른 시아파 세력인 부와이 왕조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더 나빠질 수 없을 것 같던 카르마트의 악명은 930년 하즈 순례 기간에 이슬람권 전역을 뒤흔드는 대사건으로 이어진다.

2.6. 메카 학살과 흑석 탈취 (930년)

술라이만은 이라크 습격에 이어 929년 '카바의 흑석에 대한 쉬르크로 물든' 메카 원정에 나섰다.[17] 진입 시도가 거부되자 그는 모든 무슬림이 메카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워 평화적인 순례차 왔음을 서약한 후 입성하였다. 930년 1월, 메카에 들어선 카르마트 군대는 순례자들을 학살하였고 사람들이 도주하자 카바 내부까지 말을 타고 들어가 그들을 추격하였다. 알 잔나비는 순례객들을 죽이며 쿠란 구절이나 시구를 인용하며 그들을 조롱하는 기행을 선보였다. 카르마트 군대는 무슬림들에게 성수로 여겨지던 잠잠 샘물을 순례자들의 시체로 틀어막았고, 카바의 문을 부수었으며 그 덮개를 찢었다.

이렇게 17일간 메카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및 파괴를 자행하여 '도시들의 어머니'를 핏빛으로 물들인 카르마트 인들은 카바의 흑석과 함께 본거지인 알 하자르(현재의 알 하사)로 돌아갔다. 이슬람 이전 자힐리야 시대에조차 살인이 금기시되었던 카바에서 일어난 학살극과 성유물인 흑석의 탈취는 수니, 시아를 불문한 전 무슬림 공동체의 공분을 샀다. 파티마 조의 칼리파 압둘라 알 마흐디마저 알 잔나비에게 꾸짖는 서신을 보냈을 정도였다.[18] 이슬람 최고 성지가 훼손된 것에 대해 칼리파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압바스 조의 무능함에 대한 성토와 함께 종말론적 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다.

칼리파 알 라디는 935년 이집트 익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에게 메카와 메디나의 지배권을 넘겨 자신 대신 순례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다만 카르마트에 대적할 만한 세력은 없던 익시드 조는 순례단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보호세를 바쳤다. 술라이만은 핫즈 순례객들을 메카에서 알 하자르로 끌어오려는 의도로 자신이 세운 알 디라르 사원에 흑석을 안치하였는데, 대다수의 순례객들은 여전히 카바로 모여들었기에 실패하였다. 바그다드 조정은 흑석 반환의 대가로 5만 디나르의 보상을 약속했으나 거절되었다.

2.6.1. 거짓 마흐디와 내분 (931년)

메카 습격은 또한 무함마드 사후 3세기, 예수 사후 9세기가 지난 시점에 새 메시아가 강림할 것이라는 카르마트 교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미 927년에 술라이만은 이라크 원정에서 돌아오면 카스르 이븐 후바이라에서 사로잡은, 사산 왕가의 후예라 주장하는 페르시아인 청년 아불 파즐 알 이스파하니를 고대하던 마흐디로 인정했다. 그리고 메카 습격 후인 931년, 술라이만은 이를 공식화하며 아불 파즐을 파티마 조와 유사한 마흐디-칼리파이자 알라의 화신으로 선포했다.

최고 권력을 양도받은 아불 파즐은 '무함마드의 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최후의 계시라며 조로아스터교 부흥과 반아랍 정서를 설파했다. 그는 이슬람 교리서들을 불태웠고 정통 조로아스터교 사제의 모습으로 불에 대한 숭배에 나섰다. 여기에 알 잔나비 가문원을 포함한 기존 카르마트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자 왕실 측에서 '마흐디'의 제거에 나섰다. 우선 술라이만의 모친은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고 아불 파즐에게 사절을 보내 부활 의식을 부탁했다. 아불 파즐이 거부하자 그가 신의 화신이 아닌 일개 인간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퇴위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술라이만의 형 아불 카심이 거병하여 아불 파즐을 죽이며 마흐디의 치세는 80일 만에 종식되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아불 파즐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자 그를 옹립한 자신까지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 술라이만이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며 아불 파즐이 거짓 마흐디라 밝히고, 귀족들에게 용서를 구한 후 그를 처혁했다 한다. 비슷한 시기 바그다드에서도 아불 파즐과의 내통 혐의를 받는 조로아스터교 부흥운동가 에스판디아르 아다르바드가 칼리파의 명으로 처형되었다. 931년의 내분 후 술라이만은 대외 원정을 삼갔고, 939년 압바스 왕조와도 휴전을 체결한다. 다만 파티마 왕조까지 설득했음에도 검은 돌의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6.2. 흑석 반환과 온건화

944년 술라이만이 사망한 후, 카르마트의 지도자가 된 아흐마드 빈 만수르가 952년 압바스 조의 막대한 배상금을 수용한 후에야 검은 돌의 반환이 추진되었다. 카르마트 인들은 포대에 싸인 흑석을 쿠파의 금요 사원에 말 그대로 던져두고 떠났다. 동봉된 쪽지에는 '명령에 따라 가져갔고, 명령에 따라 돌려놓는다'고 적혀 있었다. 22년 만에 메카로 돌아온 흑석은 일곱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고, 도시의 금 세공인에게 맡겨져 은으로 된 실로 봉합된 후 다시 카바에 안치되었다.[19]

이후 카르마트는 급진성이 완화되어 자신들이 공격하던 핫즈 순례단에 보호세를 받고 호위를 해주었고, 966년 술라임 부족이 이라크 순례단을 습격하자 그들을 압박해 약탈물을 반환하게 했다. 다만 다마스쿠스에서 출발하는 시리아 및 이집트의 순례단과 상단은 여전히 약탈 대상이었고, 965년 이후 익시드 왕조는 메카로 보내는 순례단 편성을 포기한다. 968년 카르마트는 시리아를 재차 공격하여 레반트 일대에 대혼란을 야기했다.

2.7. 하산 알 아삼의 시리아 & 이집트 원정

966년 알리, 968년 카푸르의 사후 시리아 ~ 이집트를 통치하는 익시드 왕조는 내분과 흉년으로 혼란에 빠진다. 그 틈을 노려 968년, 알 잔나비의 손자인 카르마트 지도자 하산 알 아삼이 시리아를 침공해 다마스쿠스를 함락했다. 알 아삼은 그해 10월, 반격에 나선 팔레스타인 총독 하산 빈 우바이둘라 빈 투그즈를 격파하고 라믈라를 함락해 이틀간 약탈하다가 주민들인 12만 5천 디나르 금화를 모아서 바치자 철수한다.[20] 이로써 익시드 왕조는 타지역들과 고립되며 더욱 약화되었다. 969년 여름에는 이집트가 자우하르의 파티마 군에게 정복되었고, 팔레스타인의 하산은 라믈라에서 자우하르의 침공에 대비했으나, 카르마트가 재차 다마스쿠스를 공격했다.

또다시 패배한 하산은 30만 디나르의 연공을 대가로 알 아삼과 휴전 및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때 카르마트 군의 일부는 파티마 조에 맞서도록 하산 휘하에 들어갔다. 970년 봄, 자우하르의 부관 자파르 빈 팔라흐는 익시드-카르마트 군을 격파하고 하산을 사로잡았다. 하산은 푸스타트로 압송되어 982년에 사망한다. 이후 라믈라와 티베리아스가 점령되었고, 다마스쿠스 총독 샤믈 역시 항복했다. 그러나 파티마 군대의 베르베르 병사들이 주민 대표단을 홀대하고 절도를 범하자 여론은 분노했다. 다마스쿠스는 일종의 코뮌 (자치 정부)을 세우고 저항했으나,[21] 970년 11월 자파르가 재차 도시를 공격하자 주민들은 항복했다.

2.7.1. 다마스쿠스 일시 점령 (971년)

하지만 이번에도 베르베르 병사들은 약탈을 일삼는 등 주민들의 반발을 샀고[22], 다마스쿠스 코뮌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와 우카일 부족장 잘림 이븐 마우후브는 알 아흐사로 향해 알 아삼에게 개입을 청했다. 파티마 왕조의 확장으로 시리아 지역의 연공 납부 중단 및 순례 안정화는 카르마트에 있어 크나큰 경제적 손실이었다. 다행히 파티마 조의 시리아 지배는 불안정했고, 특히 다마스쿠스의 반발은 극심했다. 따라서 971년 알 아삼은 자파르가 동로마령 안티오크 원정에 나선 틈에 3번째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 899년 후 2천 km에 달하는 원거리에서 서로 비방하던 두 이스마일파 세력 간의 첫 무력 충돌이었다.

알 아삼은 알 아흐사를 떠나 사실상 동맹이던 부와이 왕조의 영토인 쿠파와 라흐바를 지나 팔미라 부근에서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 킬랍-우카일 베두인들 및 기존 익시드 왕조의 잔병들이 합류했다. 칼리파 알 무티의 권유로 함단 왕조 및 부와이 왕조도 병력 혹은 물자를 지원했다. 시리아와 거리가 멀었던 부와이 조는 카르마트에 140만 디르함, 갑옷 세트, 무기 등을 보내주었다. 카르마트-시리아 연합군이 다마스쿠스에 접근하자 자파르는 출격하여 인근 사막에서 맞섰지만 패하고 전사했다. (971년 8월) 전투 후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는 자파르의 목을 베어 형제의 복수로 삼았다. 8월 25일 알 아삼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후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그들이 쉬아였음에도) 다시 알 무티의 명의로 금요 예배를 진행했고, 파티마 칼리파 알 무이즈를 '진짜 알리 후손도 아닌' 참칭자라며 저주했다.

한편 자파르의 대패 소식에 자우하르가 보낸 사아다트 이븐 하이얀 휘하 1만 1천의 원군은 야파로 철수해 도시를 요새화했다. 휴식 후 남하한 알 아삼은 9월 5일에 무방비 상태인 라믈라를 점령해 약탈했고, 시리아 전역에서 알 무티의 명의로 금요 예배가 거행되었다. 공성병기가 부족했던 알 아삼은 야파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며 카르마트 장군 압둘 무나자 압둘라 이븐 알리, 익시드 조에 맞서 마흐디-칼리파를 칭하던 샤리프 아부 무함마드 압둘라 이븐 우바이둘라 알 후사이니 (아쿠 무슬림), 우카일 부족장 잘림 이븐 마우후브에게 봉쇄하게 했다. 또한 알 아삼은 카르마트 역사상 처음으로 해군도 조직해 야파를 해상으로도 봉쇄하려 했으나, 경험이 부족했던 급조된 함대는 파티마 함대가 기름병을 끼얹은 후 불을 지르자 그대로 침몰했다. 따라서 야파의 파티마 군대는 해상 보급을 받으며 버틸 수 있었다.

2.7.2. 1차 이집트 침공

라믈라 상실 후 자우하르는 카르마트의 이집트 침공이 임박하다 여겨 대비에 나섰다. 이미 푸스타트의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모스크에 그를 비방하는 대자보가 붙기도 했다.[23] 기존 병력 중 상당 부분을 시리아에서 상실한 상태였기에 자우하르는 수비에 전념하기로 하고 푸스타트 북쪽에 새로 건설하던 새 왕성 알 까히라 (카이로)는 아직 성벽이 미완공 상태라 취약했기에 동북쪽 평원인 아인 샴스에서 무깟땀 언덕에 걸쳐 10km가 넘는 참호를 팠고, 나일 강에서 물을 끌어와 해자로 만들었다. 그 뒤에는 낮은 토성을 쌓았고, 큰 문과 작은 문의 2개 성문만을 두어 카푸르의 정원[24]에서 가져온 철제 문을 달았다. 자우하르는 또한 이프리키야의 칼리파 알 무이즈에게 급히 원군을 요청했다.

971년 가을, 알 아삼은 이집트로 남하해 우선 쿨줌 (수에즈)을 점령했다. 다만 그는 서쪽으로 120km 떨어진 카이로로 직행하지 않고 북쪽으로 향하여 파라마라 (펠루시움)를 점령했고, 뒤이어 1년 전부터 파티마 조의 혹독한 징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던 나일 델타 (하이집트) 동부에 진입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하이집트의 주요 항구이던 티니스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상이집트에서도 반란이 벌어졌다. 그나마 카르마트 군이 카이로를 바로 공격하지 않는 틈에 자우하르는 아인 샴스의 외성 건설을 마칠 수 있었고, 해산된 익시드 왕조 시기 병사들을 재차 고용했으며 이프리키야 출신 관료 및 민간인들도 무장시켜 부족한 병력을 증원했다.

다만 곧 9백여명이 군기 문란으로 체포되거나 투옥될 정도로 급조된 군대는 허술했다. 또한 자우하르는 질서 회복 및 혼란 종식을 위해 탈영병들에 대해 공개 처형을 진행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힐랄 부족 지도부의 수급들을 조리도림했다. 10-11월 무렵 자우하르의 부관 야루크가 티니스를 수복했지만 몇 주만에 반란이 하이집트 전역으로 확산되며 그는 카르마트 군의 추격을 당하며 푸스타트로 철수했다. 그리고 971년 12월 22일의 금요일에 알 아삼은 아인 샴스 방어선에 당도했다. 카르마트 군은 곧바로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하루 쉰 후 24일에 재차 공세를 가해 우세를 점했다. 다만 해가 질 무렵 자우하르는 큰 성문을 열어 흑인 노예 및 베르베르 보병 부대로 이루어진 마지막 남은 예비대와 함께 베두인들이 맡았기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여겨진 카르마트 군의 우익을 향해 돌격했다.

예상치 못한 측면 공격에 베두인 부대가 흩어지며 나일 강과 차단된 카르마트 군대는 무질서하게 후퇴했고, 혼란 속에서 카르마트의 동맹이던 우카일과 타이 부족이 이탈해 보급품을 약탈했다. 자우하르는 카르마트 진영을 점령, 알 아삼의 보물과 서고를 장악했다. 카르마트 군의 철수 후 이틀이 지나 이프리키야에서 파견된 알 하산 이븐 암마르 알 칼비가 이끄는 원군이 당도했다. 그럼에도 자우하르는 거짓 후퇴일까 우려해 카르마트 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대신 적군의 수급에 현상금을 걸어 주민들로 하여금 낙오병들을 죽이게 했다. 팔레스타인에 당도한 후에야 전열을 재정비한 알 아삼은 알 아흐사로 철수했다.

972년 5월, 자파르의 아들 이브라힘이 이끄는 파티마 군은 다시 팔레스타인에 진입해 라믈라를 수복하고 야파 구원에 나섰다. 야파를 봉쇄하던 카르마트-베두인 연합군은 명목상으로는 샤리프 아쿠 무슬림의 지휘 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진 카르마트 장군 압둘 무나자 압둘라 이븐 알리와 우카일 부족장 잘림 이븐 마우후브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토지세 (카라즈) 분배를 두고 다투었다. 세금 전부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 압둘라는 잘림을 잡아 가두었는데, 후자는 탈출한 후 우카일 부족과 함께 포위망을 이탈햇다. 이로써 약화된 카르마트 군대는 다마스쿠스로 철수했고, 이브라힘은 손쉽게 야파를 구원했다. 하지만 카르마트 군은 재정비 후 여름에 다시 남하했고, 파티마 군대는 이집트로 철수하며 팔레스타인 전역을 카르마트에 내주었다.[25]

한편 카르마트 군의 철수에도 하이집트의 반란은 지속되었다. 군사적 여력이 없던 자우하르 대신 알 하산이 972년 여름에야 본격적인 진압에 나섰고, 그는 반군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으며 진격해 티니스를 포위했다. 가을 무렵 티니스 구원을 위해 카르마트 함대가 파견되었지만 파티마 함대에 역시 패배하여 7척의 전함과 5백의 병력이 사로잡혔고, 이후 도시는 항복했다. 칼리파 알 무이즈는 티니스에서 사로잡은 포로들과 깃발 및 전사자들의 수급을 카이로 중심 거리에서 황궁 정문까지 조리돌림하게 했다. 상이집트에서는 파티마 왕조에 충성하던 킬라브 부족 출신의 압둘아지즈 이븐 이브라힘이 압바스 칼리파의 검은 깃발을 내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누비아인 장군 비샤라가 나아가 진압했다. 사로잡힌 압둘아지즈는 철창에 갇힌 채로 카이로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2월 옥사한 후 시신이 공개 화형에 처해졌다.

2.7.3. 2차 이집트 침공 (974년)

972년 가을 무렵 이집트가 3년만에 안정을 되잧자 자우하르는 칼리파에게 연락했고, 972년 말에 출발한 알 무이즈는 973년 6월 19일 카이로에 입성한다. 이집트에 당도한 알 무이즈는 연이은 전쟁과 신 수도 (카이로) 건설로 국고가 빈 것을 발견하고 세금을 올렸고, 채무 연기 및 빚 면제를 취소했다. 이로써 하이집트의 수공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고, 969-70년과 971-72년에 이어 973년 가을에 카르마트 요원들의 침투와 함께 재차 반란이 일어났다. 상이집트에서도 여론이 나빴고, 카르마트의 재침 소식이 퍼지며 민심이 동요했다. 추종자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알 무이즈는 꿈에 사도 무함마드와 사하바들이 나타났으며, 그중 알리가 줄피카르와 알 아삼의 수급을 들었으며 다른 사하바들이 칼을 든 채로 다른 카르마트 지도자들을 향해 나섰다는 말을 퍼뜨렸다.

반란으로 세수가 더욱 줄어들자 경각심을 느낀 알 무이즈는 본래 아쿠 무슬림과 친했던 다이 아부 자파르 아흐마드 이븐 나스르와 함께 그에게 서신을 보내 카르마트 편에서 전향할 것을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알 무이즈는 또한 알 아삼에게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이맘위가 정당하며 알 아삼의 선조들은 본래 자신의 선조들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종복이었다는 논리를 펼쳤다.[26] 그러면서 원래 같은 편이었으니 회개하고 자신에게 복종하여 신이 정한 대로 끝이 임박한 공통의 적 압바스 칼리파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복종의 조건으로는 모든 약탈물의 반환, 지금까지 죽인 파티마 조 병사들에 대한 배상을 내걸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망자들을 부활시키거나 군대와 함께 떠나되 자신이 추격해 사로잡은 후 철창에 넣어 카이로로 압송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이에 알 아삼은 짧은 거절 답변 후[27] 해당 서신을 대중에 공개하며 그의 주장에 대한 거부를 공표했다. 974년 초엽, 알 아삼은 다시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진격했다. 알 아삼의 본대에서 이탈한 아쿠 무슬림은 상이집트의 아시유트아크밈 일대에서 파티마 조의 징세관들을 축출했고, 직접 카라즈 (토지세)를 거두었다. 이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샤리프 가문 소속 청년들이 아쿠 무슬림에게 합류했다.[28] 3월 30일, 알 무이즈는 군대 사열식에서 돈과 무기를 분배했다. 이후 용맹하다 평가받는 장수 라이얀이 4천 병력과 나일강 델타로 나아가 마할라에서 카르마트 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이는 분견대에 불과했고, 알 아삼의 주력군은 빌베이스를 거쳐 나아갔다.

놀란 알 무이즈는 왕족을 포함한 카이로 및 푸스타트의 모든 성인 남성들을 징집했고, 아쿠 무슬림의 형인 샤리프 아부 자파르 무슬림 알 후사이니만 고령의 나이와 명성 덕에 면제되었다. 4월 4일, 카르마트 주력군의 선발대가 아인 샴스 방어선에 당도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방어를 맡은 베르베르 부대는 이를 격파했으나 추격하던 도중 반격을 당하여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파티마 장군 알리 이븐 무함마드 알 카진이 카르마트 측으로 전향했고, 푸스타트에서는 봉기가 벌어졌다. 동시에 4월 초엽, 아쿠 무슬림이 아크밈에서 파티마 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옛 익시드 왕조 출신 장군들의 배신이 두려워진 알 무이즈는 4월 12일에 그들의 아들들을 카이로로 데려와 인질로 삼았다.

4월 27일, 징집된 병력이 준비되자 알 무이즈는 왕세자 압둘라와 함께 아인 샴스 방어선 북쪽의 마른 호수 지대인 줍브 우마이라 (비르카트 알-핫즈)로 출정했다. 알 아삼은 병력을 나누어 동생 앗 누만에게 파티마 군대를 상대하도록 하고, 자신은 인근 언덕에서 전황을 관망했다. 그러자 알 무이즈 역시 병력을 나눠 일부는 알 아삼을 견제하게 하고, 주력군과 함께 나아가 앗 누만을 격파했다. 이후 알 무이즈는 전 병력을 동원해 카르마트 본진을 공격했고, 알 아삼 역시 대패하여 겨우 포로 신세를 면한 채로 도주했다. 그 과정에서 일전에 10만 디나르를 대가로 파티마 측으로의 전향을 약속한 카르마트 측의 타이 부족장 알 하산 이븐 알 자라흐가 알 아삼을 배신했다고도 한다.

파티마 군대는 카르마트측 보급품을 모두 차지했고, 1천 5백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실질적으로 군대를 이끌며 군재를 과시한 압둘라는 5월 26일 카이로에 개선했다. 주요 포로들은 낙타 등에 묶여 행진되었고, 수천의 카르마트 전사자 수급들이 창에 꽂힌 채로 뒤따랐다. 포로들 중 기존 익시드 왕조 출신 전향자들은 처형되었고, 나머지 카르마트 장군들은 알 아삼과 협상을 원하는 알 무이즈의 명으로 몇 달 후 석방되었다. 패배한 알 아삼은 시리아로 회군했으나 그곳 역시 지켜낼 수 없다고 여겨 알 아흐사로 철수했다. 이로써 시리아-팔레스타인은 971년 후 3년만에 카르마트 지배에서 벗어났다. 한편 상이집트의 아쿠 무슬림은 비둘기를 통해 파티마 군대의 승리와 토벌대의 남하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적은 군대로 맞설 수 없다 여겨 군대를 해산한 후 1명의 베두인 부하를 대동한 채로 도주했다.

나일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던 아쿠 무슬림은 파티마 조의 순찰대를 만났고, 베두인 부하가 스스로 아쿠 무슬림이라 주장하며 사로잡히는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위험한 여정 후 아쿠 무슬림은 홍해를 건너 타북 인근의 아이누나에 당도했는데, 그곳에도 파티마 조의 순찰대가 있었고 한 병사가 그의 옷깃을 움켜쥐자 칼로 옷을 자른 후 도주했다. 메디나 대사원에 숨어있던 아쿠 무슬림은 체포 명령이 멛나에 이르자 알 아흐사로 향해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바그다드로 향하던 도중 아쿠 무슬림은 막 파티마 조와 협상을 개시한, 그리고 부와이 조와 충돌하기 시작한 알 아삼에 의해 일종의 평화적 호의로써 바스라 인근에서 독살되었다.[29]

승리 후 파티마 군대는 카르마트 군대를 쫒아 북상하며 라믈라, 다마스쿠스, 트리폴리 등을 재점령했다. 서아시아를 호령하던 카르마트는 알 아흐사와 바레인 해안으로 축소되었고, 975년 7월 카르마트 사절이 카이로에 당도해 환대 받으며 양국은 공식적으로 휴전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메디나와 메카로 향하는 순례단의 안전이 보장되었고, 히자즈의 샤리프 제후들은 파티마 조에 복속했다. 비록 그해 12월 알 무이즈의 사후 메카의 샤리프는 알 아삼의 제안 하에 파티마 조에 대한 복속을 철회했지만, 곧 파견된 파티마 군대가 곡물 공급을 차단하자 다시 복속했다.

2.7.4. 마지막 시리아 원정 (977년)

975년 초엽 부와이 왕조령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알프타킨은 3백의 중무장 튀르크 기병대와 시리아에 진입했다. 같은 시기 동로마의 중흥군주 요안니스 1세가 안티오크에서 남하하며 벌어진 혼란을 틈타 알프타키은 다마스쿠스를 손쉽게 장악했다. (975년 4월)[30] 요안니스 1세가 다마스쿠스 관광 후 떠나며 북방의 위협이 가시자 파티마 조는 다시 그곳을 노렸다. 976년 7월, 자우하르가 2만 대군을 이끌고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자 시민들은 알프타킨을 도와 강하게 저항했다. 이듬해 1월, 알 아삼의 카르마트 원군이 접근하자[31]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던 자우하르는 철수했고 알프타킨과 알 아삼은 추격에 나섰다.

카르마트 군은 3년만에 팔레스타인을 재점령, 토지세를 거두었다. 다만 고령이던 알 아삼은 라믈라 점령 후 그곳에서 사망했고, 동생 혹은 사촌인 자파르가 계승했다. (977년 3월) 그럼에도 카르마트-다마스쿠스 연합군은 라믈라를 거쳐 파티마 군을 추격, 아슈켈론을 포위하였다. 연합군의 아슈칼론 포위가 15개월에 달하던 978년 4월, 자우하르는 알프타킨이 파티마 칼리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가자 북쪽의 영토를 넘겨주는 휴전을 체결했다. 다만 알프타킨의 세력 확대에 반대한 알 아지즈는 대군과 함께 친정, 라믈라 부근에서 알프타킨과 카르마트 원군을 격파했다. 알프타킨은 포로가 되었고, 그의 튀르크-다일람 기병대는 파티마 군에 편입되었다.

새 군주 자파르의 지휘 하에 티베리아스에 주둔하던 카르마트 군대는 파티마 왕조가 명목상의 수위권 인정을 대가로 선지급한 3만 디나르의 연공을 대가로 바레인으로 철수한 후 다시 시리아에 나타나지 않았다.[32] 이라크 방면에서도 카르마트는 985년 부와이 조에게 대패한 후 잠잠해졌다. 992년에는 마침내 독자적 교리를 유지하되 파티마 칼리파의 수위권을 인정했다.

2.8. 쇠퇴와 멸망

카르마트의 아왈 (바레인 섬) 태수 자파르 빈 아비 무함마드 빈 아르함의 측근이던 압둘 카이스 부족장 아불 바흘룰 알 아왐 이븐 무함마드 알 자와즈는 카르마트 지도부에 비아랍계 상인들의 왕래 활성화를 위한다며 3천 디나르를 내고 시장 옆에 시아파 (열두이맘파) 모스크를 건립했다. 알 아왐의 동생이자 아왈의 울라마 구성원이던 압둘 왈리드는 부와이 왕조의 정책에 따라 압바스 칼리파 알 카임의 명의로 금요 예배를 진행했다. 카르마트 측도 섬 주민 대부분이 카르마트 신도가 아니었기에 이를 허가했다. 그러던 1058년, 알 바사시리가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명의로 금요 예배를 드리자 카르마트 지도부는 이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압둘 왈리드는 형의 기부는 그 목적이 아니었다며 거부했고, 이로써 태수 자파르와 알 아왐은 대립하게 되었다.

같은해 알 아왐이 고용한 압둘 카이스 부족원 압둘 카심 이븐 아불 아리얀은 바레인 지역에서 3만명을 모아 자파르가 해임되고 새 태수가 부임하는 틈에 섬을 장악했다. 놀란 카르마트의 와지르 (재상) 아부 압둘라 이븐 산바르는 아들들을 오만으로 보내 무기를 구하고 군대를 편성하게 했다. 하지만 알 아왐과 압둘 카심은 행렬을 매복 공격해 40여명을 전부 죽였고, 5천 디나르와 창 3천 자루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1066년, 카르마트는 내분을 유도하기 위해 압둘 카심에게 알 아왐을 체포하는 대가로 바레인 지배권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압둘 카심이 혹하자 알 아왐이 아부 자이단 샘 (빌랄 알 카딤)에서 그를 죽였다. 내분을 틈타 무혈 수복할 것이라 여긴 카르마트 해군은 바레인에 상륙했으나 곧 매복 공격을 당하여 무장해제 되었고, 섬을 완전히 장악한 알 아왐은 동생 압둘 왈리드는 와지르로 삼았다.

알 아왐의 성공에 영향을 받아 1058년 다른 압둘 카이스 부족원인 야흐야 이븐 아야쉬 알 자다미가 카티프에서 카르마트 세력을 몰아내며 자립했다. 또다른 압둘 카이스 부족원인 압둘라 이븐 알리 알 우유니는 알 아흐사 오아시스를 떠나 북쪽의 알 우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압둘라는 1070년에 카르마트의 본거지인 알 아흐사를 봉쇄했고, 1073년 셀주크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75년 압둘라는 셀주크 군대와 함께 알 라흘라인 전투에서 카르마트 및 아미르 부족 연합군을 격파했고, 1077-78년에 결국 카르마트는 수도 알 무미니야가 함락되며 멸망했다. 이후 2백의 셀주크 군대가 호푸프에 배치되었다. 이로써 한세기 반동안 아라비아 동부를 호령하던 카르마트는 사라졌다.

한편 야흐야 이븐 아야쉬 알 자다미의 사후 카티프의 지도자가 된 아들 자카리야는 바레인을 침공, 알 아왐을 죽이고 섬을 장악했다. 다만 우윤 왕조에 대해 강경파이던 자카리야는 복속을 주장하는 동생 하산과 대립하다가 그를 죽였고, 약탈을 벌이며 알 아흐사로 나아갔다. 이에 압둘라는 대군을 일으켜 나디라에서 자카리야와 맞섰고, 격전 끝에 승리했다.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자카리야는 카티프로 철수했으나 주민들에게 축출되어 바레인 섬으로 피신했다. 이에 압둘라의 아들 알 파들이 대규모 함대를 준비해 침공했고, 자카리야는 걸프 해안의 우카이르 항구로 도주했다가 우윤 군대와 만나 교전 중 전사했다. 그의 잔여 병력도 항복하며 아라비아 반도 동부는 우윤 왕조 령이 되었다.

3. 중세식 사회주의?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는 평등주의와 공동 소유에 입각한 사회를 조직했다. 그는 생산과 분배를 관장했다. 예를 들어 약탈의 전리품은 저장된 후 분배되었고, 노예들은 공공 사업에 투입되었다. 유목, 무기 및 의류 제조 등도 철저히 감독되었으며 잡아온 남자 아이들은 4살부터 무기와 기마 및 카르마트 교리를 교육받아 일종의 맘루크로 양성되었다. 노동자들과 장인들은 일종의 조합을 구성했으며, 유력 가문들의 대표 및 장군들로 구성된 알-이크다니야는 자문 기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카르마트를 이슬람사의 볼셰비키 혹은 전근대 시기 한 세대 이상 지속된 유일한 공산주의 사회로 평가하기도 한다.


[1] 카르마트파는 정통 이스마일파 교리대로 제7대 이맘이었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을 '마흐디'(구세주)로 여겼는데 파티마 조는 창건자인 압둘라를 '마흐디'로 여겨 양립할 수 없었다.[2] 880년 경 세력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여긴 함단 카르마트는 잔즈 반란군의 주모자이자 '마흐디'인 알리 이븐 무함마드에게 동맹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3년 후 잔즈 반란은 진압되었다.[3] 재림하여 이슬람의 숨겨진 '지식'('바틴')을 알려줄 것이라고 한다.[4] 하산, 알리, 함단 형제 중 전자의 딸과 결혼함[5] 이후 야마마 지역은 18세기 디리야 토후국 발흥 때까지 알 아흐사 지역에 종속되며 역사 속에서 사실상 사라진다[6] 사이드는 그에게 마흐디는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함단 카르마트의 복종을 요구했다.[7] 다만 압바스 왕조는 제대로 구별하지 않아 그냥 이스마일파 반란 세력 자체를 카르마티야로 일컫곤 했다[8] 두 이름 모두 일종의 가명 혹은 활동명..이다[9] 한편 사이드가 떠난 직후 다마스쿠스에 그의 묘사와 체포가 명시된 칙령이 당도했고, 라믈라에도 도착한 당일 저녁에 당도했으나 태수의 보호로 사이드 일행은 계속 그곳에 숨어 지낼 수 있었다.[10] 당시 사이드는 압둘라 빈 아흐마드 빈 압둘라로 불렸다고[11] 하마 전투의 배치 : 카르마트측) 좌익 - 마스루르 알 울라이미 휘하 1,500명의 기병과 예비 기병 400명, 중앙 - 다이 앗 누만 휘하 1,400명의 기병, 3,000명의 보병, 우익 - 쿨라입 알 울라이시 휘하 1,400명의 기병과 예비 기병 200명 / 아바스측) 좌익 - 알 카심 이븐 시마와 유믄 알 카딤 및 바누 샤이반과 바누 타밈 보조군, 중앙 -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 우익 - 알 후세인 이븐 함단[12] 이사 이븐 무함마드 앗 누샤리가 이끔[13] 904년 혹은 905년 아불 카심이 이끄는 카르마트 군대가 다마스쿠스를 포위하고 수니파 툴룬 왕조의 지원군을 격파, 도시로부터 막대한 연공을 받고 나서야 회군했다고도 한다. 이로써 시리아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툴룬 왕조 결국 압바스 왕조에게 정복되었고, 이에 카르마트는 권력 교체기를 노리며 이듬해 재차 시리아로 쳐들어갔지만 급조된 침략 때문에 보급이 길어져 다마스쿠스 앞에서 후퇴했다고도 한다. 다만 근거가 부족하다[14] 이로써 카르마트는 이스마일파의 일원이라 부르기 어려워졌다[15] 약속되었던 마흐디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도 여겨진다[16] 함단 왕조의 창건자 사이프 & 나시르 앗 다울라 형제의 부친[17] 19세기 사우드 왕국의 와하비 군대가 메카를 점령하고 무함마드의 옛 집 등 많은 성소들을 파괴한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18] 같은 이스마일파였지만 이맘 계승을 놓고 대립하던 카르마트는 다수의 무슬림들에게 파티마 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히자즈를 점령하는 동안 기존의 바그다드 칼리파 대신 파티마 칼리파 알 마흐디의 이름으로 쿠트바를 진행하였다. 이로써 대중들이 메카에 대한 자신들의 만행이 파티마 조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여기게 하려는 속셈이었다(고 이스마일파 측에서는 주장한다).[19] 이후의 수난으로 흑석은 현재 8조각이고, 일부 파편이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20] 한편 연공으로 인해 경제난에 처한 하산은 혼란의 이집트로 향하여 5초 조카인 아미르 아흐마드의 섭정이 되었다. (968년 11월) 그러나 미래를 비관한 그는 이듬해 1월 말, 정예 병력 및 관료들을 대동하고 파티마 왕조의 침공이 임박한 푸스타트를 두고 시리아로 향하였다. 약 일주일 후 출병한 자우하르의 파티마 군대는 969년 여름 이집트를 정복하였다.[21] 압바스 가문의 아비 얄라과 일반인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가 대표로 선임되었다. 민병대는 자파르가 파견한 선발대를 격파했다.[22] 관용적이던 자우하르와 달리 자파르는 여성들이 먼지 속에 머리를 내리고 나오게 하는 등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베르베르 부대는 3일간 시장 거리를 약탈하며 주민들과 충돌했다. 또한 보복으로 주민 대표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의 형제 등 유력 인사들이 처형되었고, 유사시를 대비해 시타델이 세워졌다. 그후 자파르는 칼리파의 숙원 사업이던 대로마 지하드에 착수, 부관을 파견해 안티오크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23] 이에 불안해진 자우하르는 익시드 왕조 시절 재상이던 자파르 이븐 알 푸라트를 카이로에 연금했다[24] 알 까히라 경내로 포함됨[25] 이집트로 후퇴한 직후 야파 수비를 맡았던 사아다트 이븐 하이얀은 곧 사망한다[26] 이는 반이스마일파 작가 샤리프 아쿠 무흐신 (아불 후사인 무함마드 이븐 알리)에게 기록되어 남아있다[27] '장문이나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당신의 서신이 왔는데, 우리는 절차를 밟는 중이다'라고 짧게 답변했다.[28] 그중에는 조카인 자파르 빈 무슬림, 다마스쿠스의 샤리프 대표 아불 카심 아흐마드 이븐 알 후사인 알 아키키의 손자, 푸스타트의 샤리프 대표 아부 이스마일 이브라힘 알 라시의 아들과 동생도 있었다[29] 한 카르마트 요원이 미행하여 그의 우유에 독을 탔고, 이를 모르고 마신 아쿠 무슬림은 밤새 시달리다가 아침에 사망했다. 그의 과부는 이집트에 있는 재산을 몰수된 후 숨어 지내다가 오빠인 메카의 아미르가 파티마 조에 복속하고 중재한 덕에 사면을 받아 여생을 보냈다[30] 여름 무렵 홈스와 바알벡을 점령한 요안니스 1세가 다가오자 디마슈크의 민병대는 서북쪽 자바다니 고개 (바르다라 강의 상류)를 막았다. 단기전만을 고려하던 요안니스에게 이는 부담스러운 장애물이었고, 공격 대신 막대한 조공을 요구했다. 입지가 불안했던 알프타킨은 엄포에 겁을 먹었지만 액수가 지대했기에 대신 그에게 안내자를 대동한 관광을 제안했다. 제안을 수용한 요안니스는 소수의 근위대만 대동하고 3세기 전 제국이 상실한 도시를 둘러보았다. 만족한 것인지 요안니스는 병합을 포기, 약속대로 순순히 철수했다.[31] 이때 알프타킨이 이라크에 남겨둔 동지들도 데려옴[32] 다마스쿠스에서는 알프타킨의 부관 카셈이 집권했다가 파티마 왕조의 여러 시도 끝에 결국 983년에 항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