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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리야 토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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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경의 영토

1. 개요2. 배경: 디리야 셰이크국3. 건국: 무함마드 빈 사우드
3.1. 초기 팽창 : 네지드 중부
4. 전성기
4.1.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4.1.1. 네지드 평정4.1.2. 걸프 해안 정복4.1.3. vs 이라크 문타피크 연맹4.1.4. vs 이라크 맘루크 왕조4.1.5. 아시르 병합 (1798-1800년)4.1.6. 카르발라 파괴 (1801년)4.1.7. 북부 아라비아 평정4.1.8. vs 메카 샤리프국
4.1.8.1. 메카 입성 (1803년)
4.2. 사우드 대왕
4.2.1. 이라크 전역4.2.2. 히자즈 정복 (1805년)4.2.3. 예멘 전역4.2.4. 오만 복속 (1808년)4.2.5. 바레인 정복 (1809년)4.2.6. 영국의 라스알카이마 공격 (1809년)4.2.7. 시리아 전역4.2.8. 하드라마우트 전역4.2.9. 아부 아쉬르 토후국의 반란4.2.10. 바레인 상실 (1810년)4.2.11. 오만 일시 정복
5. 이집트-사우디 전쟁
5.1. 투순 파샤의 히자즈 수복 (1812-13년)5.2. 사우드의 반격 (1813-14년)5.3. 무함마드 알리의 아시르 정복 (1815년)5.4. 휴전기 (1815-16년)5.5. 이브라힘 파샤의 네지드 정복
5.5.1. 카심 지방 평정 (1817년)5.5.2. 네지드 진격 (1818년)5.5.3. 디리야 공방전 (1818년 4-10월)5.5.4. 압둘라의 항복과 멸망
6. 창작물에서7. 국기8. 영토9. 역대 군주

1. 개요

아라비아 반도 내륙, 즉 네지드에 세워졌던 국가 중 하나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전신이다. 기존 디리야 셰이크국에 와하비즘이 더해진 종교 국가 형태로 1744년 건국 후 19세기 초에는 히자즈, 알 아흐사, 바레인 등지를 포함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수도는 디리야.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의 견제를 받아 8년 간의 전쟁 끝에 1818년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멸망했다. 다만 6년 후 2차로 탄생하여 네지드 토후국이 되었고, 1897년 또다시 멸망했다가 3차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전 이름인 리야드 토후국으로 다시 탄생한다.

2. 배경: 디리야 셰이크국

사우드 왕가는 아랍 부족들의 분류에 있어 라비아계 바누 하니파 출신의 므루드 가문에 속한다. 15세기 무렵 므루드 가문은 내륙의 네지드와 해안의 알 하사 (아흐사)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그중 후자에 속하는 카티프 인근의 마을 앗 두르우에 살던 마니 이븐 라비아 알 무라이디가 사우드 왕가의 직계 조상이다. 1446년 마니는 네지드에 속하는 하즈르 (리야드) 남쪽의 만푸하[1]에 살던 친척 이븐 디르아를 방문했고, 그의 도움으로 경작이 가능한 땅이었지만 당시 거의 무주지에 가깝던 서북쪽의 구사이바와 알 물라이비드 일대를 할양받았다. 이듬해 마니는 일족과 함께 바누 하니파의 원적지이기도 한 와디 하니파가 흐르는 구사이바와 알 물라이비드로 이주했고, 그곳에 고향 앗 두르우 혹은 땅을 내어준 친척 이븐 디르아의 이름을 따서 앗 디리야 (الدرعية)라는 도시를 세웠다. (1447년)

마니를 시작으로 그의 후손들은 농업과 무역을 바탕으로 디리야를 발진시켰고, 이로써 인구가 불어나며 디리야 셰이크국이란 정치체가 확립되었다. 1463년 마니를 계승한 아들 라비아는 야지드 부족과 싸우며 와디 하니파를 따라 앗 나이마, 알 와실 일대를 정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력이 커지자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라비아는 아들 무사에게 찬탈당하여 중상을 입은 채로 북쪽 우야이나의 셰이크 하마드 빈 하산에게 망명했다. 이후 디리야 셰이크국은 정체되었고, 무사 사후 아들 이브라힘과 후자의 아들 마크란이 계승했다.

그러다 1654년 들어 마크란의 두 아들 라비아와 무크린의 후손들이 각각 알 와탄과 알 무크린 파벌을 이루어 내전을 벌이고 외세도 침공해 오면서 디리야 셰이크국은 더욱 약해졌다. 1695 ~ 1708년간 알 하사 출신의 술탄 이븐 하마드 알 카바스가 집권했고, 암살 후 동생 압둘라가 계승했다가 라비아의 증손자 무사가 집권하며 사우드 가문의 지배를 회복했다. 1720년 무사에 이어 무크린의 손자 사우드가 집권했고, 1725년 라비아의 다른 증손자 자이드가 찬탈했다. 그러던 1726년 사우드의 사후 그 아들이자 무크린의 증손자인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무크린 계파의 세력을 모아 1727년에 마침내 6촌인 자이드를 폐위하고 집권하며 내전이 종식되었다.

3. 건국: 무함마드 빈 사우드

1727년에 40세의 나이로 디리야의 군주로 집권한 무함마드는 부족을 통합하고 도시의 발전에 힘썼다. 한편 1740년을 전후로 한발리 법학자 집안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하브가 타클리드 (전통)로 불리는 기존 이슬람 법학파들과 수피즘시아파 등을 비판하며 무함마드정통 칼리파 시기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살라피즘이슬람 근본주의적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디리야 서북쪽에 있는 알 우야이나의 군주 우스만 이븐 알 무아마르를 설득해 성지이던 사하바 자이드 이븐 알 카탑의 무덤과 신령수들을 파괴하는 등 강력한 유일신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669년부터[2] 독자적으로 알 하사를 지배하며 네지드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니 칼리드 연맹의 군주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3]가 우스만에게 그가 소유한 알 하사의 재산을 압수하겠다며 이븐 압둘와하브를 죽이거나 추방하라고 협박했다. 그에 굴복한 우스만에 의해 우야이나에서 추방된 이븐 압둘와하브는 디리야로 향하여 보호를 청했다. (1744년)

이미 형제 중 투나인과 미샤리가 이미 이븐 압둘와하브의 제자였고, 아내 무디 빈트 아비 와흐탄 역시 와하브파 교리에 공감하며 설득한 결과 무함마드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745년에 무함마드는 이븐 압둘 알와하브와 디리야 서약을 통해 함께 세력을 합하여 와하비 교리를 설파하고 반대파를 격멸하는 성전 (지하드)에 나서기로 했다. 특히 이븐 압둘 와히브는 (신실한) 무슬림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대신 전쟁을 통한 전리품 획득이 더 이윤이 클 것이라 조언했다. 또한 서약의 증표로써 무함마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압둘아지즈와 이븐 압둘 와합의 딸이 결혼하며 양가는 사돈을 맺었다.[4] 이로써 무함마드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이맘이 되었고, 이븐 압둘 와합은 종교 및 윤리를 담당하며 그의 참모 역할을 했다. 본격적인 1차 사우디 국가(디리야 토후국)의 시작이었다.

3.1. 초기 팽창 : 네지드 중부

무함마드는 네지드 각지의 와하비 신도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했고, 전쟁을 통해 복속시킨 부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디리야를 더욱 발전시켰다. 동시에 이븐 압둘와하브는 2년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신도들을 디리야로 불러 모으고 네지드 각지에 적극적으로 전도에 나섰다. 그 결과 네지드 중부에 해당하는 알 아리드 지역에서 우야이나, 하르멜라, 만푸하, 아마리야, 쿠와이야, 파르아, 카사브, 샤크라, 하우타, 타르마다아 등의 도시들이 응답하며 디리야에 복속했다. 하지만 알 아리드의 중심지인 리야드 자체는 다함 빈 다와스의 지도 하에 복속을 거부했고, 이후 디리야는 그와 27년간 17번의 전투를 벌였다. 양측의 전쟁에서는 4천여명이 사망했고, 우바이드 전투에서는 무함마드의 두 아들인 파이살과 사우드가 전사할 정도였다.

나머지 도시들의 지배도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1750년에 우야이나의 군주 우스만이 금요 예배 중 반사우디 세력에게 살해되었고, 무함마드는 미샤리 빈 무아마르를 그곳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751년에는 하르멜라가 복속했으나 이븐 압둘와하브의 형이면서 현지 카디 (법관) 술레이만 이븐 압둘 와합이 군주 무함마드 빈 압둘라와 주민들을 설득해 사우디 병력을 축출하며 복속을 철회했다. 하지만 보복이 두려워진 무함마드 빈 압둘라가 다시 사우디 병력을 부르자, 라시드 가문이 공격해 그와 8명의 추종자들을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무함마드는 아들 압둘아지즈를 파견했고, 하르멜라를 확실히 복속시킨 그는 사우디 측에 도움을 청한 현지인 무바라크 빈 아드완을 총독에 봉했다. 1746년에 군주 알리 빈 마즈루의 결정으로 복속했던 만푸하[5]는 1753년 주민들의 봉기로 이탈하여 인접한 리야드의 다함에게 복속했다.

4.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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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 19세기 초 서아시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던 디리야의 핵심부인 앗-투라이프 구역

1753년 후 디리야 토후국의 영토는 빠르게 늘었다. 알 아리드를 넘어 알 와샴 지역에서도 샤크라가 복속했고, 1755년에는 알 쿠와이야가 뒤를 이었다. 비록 타르마다, 우샤이기르, 알 카사브, 마라트, 알 파르아는 계속 저항했지만 압둘아지즈가 여러 차례 출정하여 10년 내로 모두 복속시켰다. 더 북쪽의 수다이르 지역 역시 이때 복속되었다. 한편 우야이나를 디리야에 후 네지드의 패권이 흔들린다 여긴 알 하사의 아미르 우라이르는 1759년, 디리야를 목표로 진격하여 그 길목인 주바일라에서 주민들 및 사우디 군의 저항을 받았다. 우라이르는 거듭된 공격에도 주바일라를 함락하지 못했고, 하르멜라 점령을 위해 파견된 별동대마저 실패하자 알 하사로 철수했다. 한편 그동안 디리야의 주민들은 성탑을 지닌 두 성벽을 쌓는 등 전쟁을 대비했다. 우라이르의 철수 후, 압둘아지즈는 직접 주바일라로 향해 선물을 주어 치하했다.

다만 국력 소모가 컸기에 이듬해 무함마드는 15년 넘게 전쟁을 이어오던 리야드의 다함과 휴전을 맺었고, 함께 다피르 부족을 공격했다. 다만 양측의 평화는 5년 후 다함이 배신하며 전쟁은 재개된다. 1764년 압둘아지즈에 패배한 아즈만 부족이 나즈란 측에 도움 요청했고, 이에 나지란의 군주 하산 이븐 히바툴라 알 무크라미는 우라이르 및 다함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그해 9월 (혹은 1765년 초엽), 연합군의 집결지로 선정된 하이르에 하산이 먼저 도착했다. 하산의 나즈란 군대는 사우디 군대를 공격해 4백여명을 전사시키고 3백여를 포로로 잡으며 격파했다. 이에 무함마드와 압둘아지즈는 아즈만 부족 등의 포로 석방을 조건으로 휴전을 제안했고, 하산이 승낙하며 회군했다. 그동안 디리야에 당도한 우라이르가 도시를 한달간 포위하나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하며 디리야 토후국은 멸망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4.1.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 1773년 리야드 정복
  • 1775년 부라이다 정복[6]
  • 1782년 부라이다 방어전 및 수다이르 평정
  • 1784년 카르지 정복[7]
  • 1785년 우카이르 습격, 페르시아만 당도
  • 1786년 문타피크 연맹의 카심 침공
  • 1788년 우나이자 정복
  • 1789년 바니 칼리드 연맹 복속
  • 1792년 아흐사, 카티프 정복

4.1.1. 네지드 평정

1750년대부터 연로한 무함마드를 대신해 군사 원정을 이끌던 아들 압둘아지즈는 1765년, 나즈란-아흐사 연합군의 침공 후 부왕이 사망하자 디리야의 이맘 겸 아미르로 즉위했다. 그는 리야드를 꾸준히 압박하며 1768년 네지드 북부 카심 지역을 복속시켰다. 마침내 1773년 압둘아지즈는 리야드를 점령했고, 다함은 도주했다. 이로써 네지드 중부인 알 아리드 일대가 사우디 영토로 확립되었다. 한편 1774년 아흐사의 우라이르는 부라이다를 침공, 친사우디 군주이던 압둘라 빈 하산을 폐위하고 라시드 앗 두라이비 알 아부 알얀을 옹립했다. 뒤이어 재차 디리야 원정을 꾀하던 우라이르는 불과 두달 후, 부라이다를 떠난 직후에 사망했다. 우라이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내전을 벌였고, 그 틈에 압둘아지즈는 더욱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리야드 점령 후 압둘아지즈는 카르지의 군주 자이드 이븐 자밀 앗 둘라이미와 전투를 벌인 끝에 1775년에 휴전을 맺었다.

1768년 부라이다의 군주 함무드 앗 두라이비 알 아부 알얀은 디리야에 복속을 표했다. 다만 형식상에 그친다고 판단한 압둘아지즈는 바니 칼리드 연맹이 내전을 벌이던 1775년에 부라이다를 점령, 후자일란 이븐 하마드 앗 타미미를 아미르에 봉했다. 1776년에는 카르지의 자이드가 휴전을 깨자 압둘아지즈는 재차 공격하여 그를 전사시켰고, 술레이만 빈 아피산을 카르지 총독에 봉하려 했다. 그러나 자이드의 아들 투르키가 저항을 계속하여 전투와 휴전이 반복되었다. 한편 역시 1768년에 복속했던 우나이자의 군주 압둘라 빈 아흐마드 빈 자밀은 부라이다의 침탈을 목격한 후 반란을 일으켜 와하비 성직자들을 살해했고, 1782년에는 아흐사의 새 군주인 셰이크 사둔 빈 아리아르에게 지원을 청했다.

막 내전을 종식하고 집권한 사둔은 부친처럼 네지드 패권 회복을 갈망했기에 다피르, 라시드, 샴마르, 아니자 부족 연합군을 파견했다. 반사우드 연합군은 부라이다를 포위했고, 선발대가 정면 공격에 나섰다가 후자일란 휘하 수비대의 반격으로 괴멸되었다. 그러자 사둔이 직접 정예병과 포위군에 합류했고, 사다리를 통한 공격이 실패하자 공성병기를 동원해 일부 성벽과 성탑들을 허물었다. 뒤이어 포위군은 아침에 총공격에 나섰으나 부라이다 주민들의 결사 항전에 격퇴되었고, 어느덧 5개월이 지난 후라 사기가 꺾인 연합군은 결국 철수했다. 같은 해인 1782년, 라우다트 수다이르의 알 마디 가문이 카르지의 투르키와 동맹을 맺고 도시의 사우디 병력을 축출했다. 하지만 타디크에 주둔하던 압둘아지즈의 아들 사우드가 반격에 나서 알 마디 가문을 격파하고 수다이르 지역에서의 패권을 재확립했다.

1784년, 압둘아지즈는 투르키 역시 전사시키고 카르지를 완전히 병합하여 술레이만 빈 아파시안을 그 총독에 봉했다. 동시에 바니 칼리드 연맹에 대해 공세로 전환한 압둘아지즈는 같은해 아들 사우드를 아흐사로 파견했다. 사우드는 알 우윤을 습격해 약탈하고, 이듬해에는 아흐사에서 출발한 상단을 습격했다. 1785년 결국 문타피크 연맹의 지원을 받은 두와이히스에게 찬탈당한 사둔은 디리야로 망명했고, 압둘아지즈는 장군 술레이만 빈 아피산을 보내 아흐사를 공격했다. 술레이만은 지샤에 이어 우카이르를 함락, 항구에 방화하고 많은 전리품을 챙겨 귀환했다. 이는 사우디 군대가 처음으로 페르시아 만에 당도한 때였다.

네지드 주요부를 평정한 압둘아지즈는 경제적, 농업적으로 발달한 네지드 북부의 자발 샴마르 지역을 노렸다. 1785년, 그의 명령을 받은 후자일란이 출정했다. 하지만 그는 하일로 진군하던 도중에 마주친 이라크발 순례단을 습격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후 돌아가버렸고, 분노한 이라크의 문타피크 부족장 투와이니는 1786년에 보복에 나서며 오스만-사우디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투와이니는 타누마를 함락했지만 부라이다를 공격하던 중 본국의 사정으로 철수했고, 그를 도우려 진군하던 바니 칼리드 부족장 셰이크 압둘 모흐센 빈 사르다 역시 소식을 듣자 회군했다. 1787년 와디 앗 다와시르의 반사우드 부족들의 요청에 출정한 나즈란의 아미르도 사우디 대군과 조우하자 철수했다. 이로써 위기가 지나가자 후자일란은 재차 하일로 진군해 그 군주인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 알 알리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외부와 단절된 카심 지역은 점차 사우디 영토로 넘어갔고, 끝까지 저항하던 우나이자도 1788년 사우드에 의해 평정되었다.

4.1.2. 걸프 해안 정복

1789년 사우드는 직접 알 아흐사로 출정, 가리멜 전투에서 바니 칼리드 군대를 격파했다. 패배한 아미르 두와이히스와 섭정 압둘 모흐센은 문타피크 연맹에게 망명했고, 사우드는 자이드 빈 우라이르를 아미르로 봉했다. 하지만 1792년 말엽, 친사우디 아미르이던 자이드 빈 우라이르를 그의 외사촌 바라크 빈 압둘 모흐센이 찬탈하자 사우드는 재차 대군과 함께 아흐사로 출정했다. 사우드는 샤이트 전투에서 바라크를 격파했고, 후자는 알 아흐사의 주민들과 함께 사우디에 복속했다. 사우드는 한달간 알 아흐사에 머문 후 회군했는데, 그 직후 주민들이 재차 반기를 들자 바니 칼리드 연맹의 수도인 알 무바라즈로 진격해 다시 복속시켰다. 뒤이어 사우드는 우나크를 점령한 후 5백여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후 그가 쿠다이흐마저 점령, 약탈과 학살을 저지르자 파르다에 피신해 있던 카티프 주민들은 5만 쿠로쉬에 해당하는 3천 자르를 바치며 휴전을 청했다. 이를 승낙한 사우드는 와하비 교리에 맞지 않는 여러 권의 책들을 불태운 후 회군했다.

카티프 상실 후 바니 칼리드 연맹의 군사령관 압둘라 이븐 술레이만 알 마슈리는 난공불락의 타루트 성채로 피신해 요새화했다. 그러자 아흐사에 남겨진 사우디 장군 이브라힘 빈 아피산은 동생 파흐드 빈 아피산에게 3천 군사를 주어 타루트를 공격하게 했다. 파흐드는 1차 공격이 많은 병력 손실과 함께 실패하자 물러나 봉쇄로 일관했는데, 이에 수비대가 반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파흐드의 구원 요청에 이브라힘은 살레흐 이븐 라시드 앗 도사리가 보낸 증원군을 이끌고 타루트로 향했고, 수비대는 다시 농성을 준비했다. 이브라힘은 대포를 동원해 성채를 폭격하며 20일간 포위한 끝에 총공격에 나섰고, 8백의 바누 칼리드 수비대는 창병을 앞세워 결사 저항했으나 사우디 군이 성내에 진입했다. 결국 압둘라 이븐 술레이만 알 마슈리가 도주했고, 카티프 지역 전역이 사우디 령으로 병합되었다.

1793년 아흐사의 이브라힘은 카타르를 침공하여 파리하, 후와일라, 유수피야, 루와이다 등을 손쉽게 점령했다. 이후 그는 압둘아지즈의 승인을 받아 더욱 북상하여 반도 끝의 주바라를 포위했다. 1783년에 바레인을 얻었지만 여전히 기존 거점 주바라를 더 중시하던 칼리파 가문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하고 바레인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로써 카타르 반도는 사우디 령이 되었다. 뒤이어 이브라힘은 쿠웨이트로 북상하여 명목상의 복종을 받았다. 한편 아흐사 정복 후 압둘아지즈는 무틀라크 이븐 무함마드 알 무타이리에게 무산담 반도 일대에 대한 공격을 명했으나, 그는 바니 야스 부족에게 격퇴되었다. 이에 압둘아지즈는 동부의 부왕 이브라힘을 파견했고, 그는 바니 야스와 누아이미 부족을 복속시켰다. 또한 디리야에서 파견된 와하비 선교사들은 이바디파를 믿는 하나위 계열 부족들과 대립하던 한발리파의 가파리 계열 부족들을 포섭했다.

1795년 이브라힘은 무틀라크와 함께 부라이미 오아시스를 점령, 앗 사바라 궁전을 세워 오만 원정 및 와하비 교리 전파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무렵 바니 야스, 앗 누아임, 앗 샤와미스, 앗 다와히르, 바니 쿠툽 등의 부족들이 사우디에 복속했다. 그리고 1796년, 일부 바니 칼리드 귀족들이 반란을 꾀하자 사우드는 재차 동진해 호푸프 인근 라키카에 주둔하며 그들을 숙청하고 아미르 바라크를 폐위시키며 아흐사 지방을 완전히 사우디 령으로 병합했다. 바라크는 1797년 오스만측 원정군에 합류했다가 사우디 측에 전향하여 그 휘하에서 싸우다가 이듬해 전사했다. 알 아흐사 정복으로 디리야 토후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함께 본격적으로 걸프 지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한편 이미 1764-65년과 1787년에 네지드 침공을 단행한 적이 있던 나즈란의 마카리마 열두이맘파 공동체는 디리야에 사절을 보내고, 압둘아지즈가 교리를 설명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결국 와하비 교리를 수용하거나 사우디에 복속하지 않았다. 1791년 야파아 부족장 셰이크 압둘 하미드 빈 카심 빈 알 자베르가 하드라마우트에서의 와하비 교리 설파를 약속하자, 압둘아지즈는 교리서들을 보내주었다. 비슷한 시기 타림의 군주 이븐 가라마 알 야파이와 쿠아이티 부족장 술탄, 하드라미 부족 중에는 사흐와 와디 이븐 알리의 알 자베르 가문이 와하비 교리에 동조했다. 1795년에는 무바라크 빈 하디 빈 카르말라가 이끄는 사우디 군대가 나즈란을 침공, 사막에서 마카리마 군대를 격파했지만 나즈란 정복에는 실패했다.

그 무렵 본격적인 오만 진격에 앞서 압둘아지즈는 후방에 해당하는 라스알카이마의 카와심 (카시미) 가문을 복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카시미 부족장 사크르 빈 라시드가 거부하자, 부라이미의 무틀라크가 재차 파견되어 누아이미 부족과 함께 라스알카이마를 포위했다. 일대의 유일한 식량원인 야자나무 숲과 단절된 채로 버티던 사크르 빈 라시드는 1797년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와하비 교리를 수용하고 디리야에 자카트를 납부하는 조건 하에 항복했다.

4.1.3. vs 이라크 문타피크 연맹

이라크 남부에 살던 오스만 제국의 베두인 제후인 문타피크 연맹의 지도자 투와이니 빈 압둘라는 1780년대 들어 사우디의 공격에 약화되는 칼리드 연맹을 도우며 디리야와 대립했다. 1786년 투와이니는 부족원과 마자라, 주바이르, 샴마르 지역민 및 갈리브와 타이 부족을 동원한 그는 타누마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죽였다. 뒤이어 부라이다를 포위했으나 이라크에서의 일이 급해져 회군했다 . 한편 압둘아지즈는 이라크 맘루크 왕조의 大 술레이만 파샤에게 와하비 교리서인 '타우히드'를 보내며 바그다드의 학자들과 살펴볼 것을 권했으나, 그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라크의 문타피크, 카자일 부족들은 바니 칼리드 연맹 등 반사우드 부족들을 후원했고, 압둘아지즈는 반격을 결심했다. 따라서 1788년 사우드가 사프완과 무틀라 구릉 사이의 라우다타인 (현 쿠웨이트 북부)에서 문타피크 부족을 기습 공격한 후 회군했다. 하지만 그후로도 문타피크 연맹이 1789년 셰이크 압둘 모흐센 빈 사르다와 1792년 그의 아들 바라크 등 바니 칼리드 연맹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그 무렵 술레이만 파샤는 조정에게서 사우디 토벌 명령을 받았으나 사막전에 익숙하지 않고 원정 도중 남부 부족들이 봉기할 것을 우려해 난색을 표했다. 따라서 그는 투와이니를 석방해 사우디 원정에 나서게 했다.

투와이니는 재차 부족원과 주바이르, 바스라 주민 및 패퇴한 바니 칼리드 부족을 모아 디리야로 직행하는 대신 알 아흐사로 남하했다. 하지만 진군 도중 투와이니가 노예에게 암살되며 원정은 무산되었다. 사우디 군은 후퇴하는 문타피크 군을 쿠웨이트 국경까지 추격해 대포와 많은 보급품을 얻었다. 그후 바라크는 사우디 측으로 전향했고, 샤우드는 이라크의 수크 앗 슈유크와 사마와를 습격했다. 이로써 조정은 이라크 맘루크 정권에게 출정을 더욱 압박했다.

4.1.4. vs 이라크 맘루크 왕조

1798년 술레이만 파샤는 부관 알리 파샤에게 사우디 원정을 맡겼고, 그는 기존 병력에 카자일 및 쿠르드 부족들도 더하여 바스라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후 그는 기병대와 육로로 남하했고, 포병대 및 보급대는 쿠웨이트와 바레인의 지원으로 해로로 남하했다. 알리 파샤는 알 아흐사의 두 사우디 거점인 무바라즈와 호푸프 성채를 포위했다. 전자는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 빈 마지드가, 후자는 이브라힘 빈 술레이만 빈 아피산이 방어를 맡았다. 수비대가 결사 항전하며 공성전이 길어졌고, 원정군은 보급이 부족해지며 점점 지쳐갔다. 결국 알리 파샤는 철수에 나섰고, 이에 원군을 이끌고 오던 사우드가 추격에 나섰다. 사우드와 알리 파샤는 각각 싸즈와 샤바크에 주둔하며 소규모 교전을 벌였는데, 승부가 나지 않자 알리 파샤는 협상에 나섰다. 그는 휴전에 있어 사우디 군이 알 아흐사에서 철수하고, 이라크측 원정 비용을 부담하고, 투와이니의 원정 때에 얻은 전리품을 반환하고, 핫즈 교통 확보를 약속하며 이라크발 순례단에 간섭하지 않는 4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사우드는 서신을 보내 알 아흐사는 룸(튀르크) 인들의 땅이 아니며 분란을 일으킬 정도의 가치가 없고, 전리품은 디리야에 있으니 부왕과 술레이만 파샤끼리 협의할 문제이며 반환이 결정된다면 바스라까지의 운반을 보장하고, 원정 경비 문제 역시 내가 아닌 부왕의 결정할 바이며, 순례객과 길에 대해서는 사랑과 명예로 대할 것이라 답했다. 실질적으로 4개의 조건 중 1개는 거부, 2개는 위임, 1개는 애매하게 회피한 것이다. 1799년, 디리야의 사절이 협약의 비준을 위해 바그다드에 당도하자 술레이만 파샤는 그를 자신의 옆에 앉히며 환대했다. 이후 술레이만 파샤 역시 디리야에 특사를 보내 이라크의 성지들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사우드는 유프라테스 강 서안은 사우디 령이라 주장했다.

마침 프랑스 군이 이집트를 정복했음에도 오스만 조정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당도하자 사우디 수뇌부는 더욱 대담해졌다. 휴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1799년 나자프 인근에서 카자일 부족이 사우디 상인 3백여명을 학살하자 압둘아지즈는 바그다드 측에 사망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이에 술레이만 파샤는 핫즈에서 돌아오던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 앗 샤위에게 디리야를 경유해 협상하게 했다. 바그다드로 복귀한 그는 협상이 실패했고, 압둘아지즈가 유프라테스 서안의 아나 ~ 바스라에 이르는 영토를 원한다고 답했다.

4.1.5. 아시르 병합 (1798-1800년)

1796년 라비 이븐 자이드 앗 다와시리가 처음 아시르 변경을 침공했다. 그는 이듬해 비샤를 포위한 끝에 복속시켰고, 이에 같은해 샤리프 갈립이 반격을 가해 도시를 수복했다. 하지만 샤리프 갈립은 회군하던 도중 카르마에서 사우디 군대의 기습을 받아 패배했다. 1798년 라비는 재차 비샤를 공격해 복속시켰고, 압둘아지즈는 현지 부족장 살렘 이븐 샤크반 앗 샤흐라니를 비샤의 아미르로 봉했다. 1800년 무렵에는 아시르의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암마르 아부 눅타가 와하비 교리를 수용하며 사우디에 복속했다.

한편 술라이마니 (지잔) 지역에 속하는 사브야 출신의 아흐마드 이븐 후세인 알 팔키는 1799년 핫즈 도중 와하비 교리를 접한 후 디리야로 유학을 떠났다. 압둘아지즈에게서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교리를 설파하며 바니 샤바흐의 아르아르 빈 샤르 등 일부 부족장들을 포섭했고, 반대파 세력과 무력 충돌을 빚었다. 그중 사나의 자이디 이맘국에 복속해 있던 아부 아리쉬 부족에서는 부족장 아미르 알리 빈 하이다르와 숙부 샤리프 함무드 빈 무함마드 (아부 미스마르)가 각각 친사우드, 반사우드 파벌을 이루어 내전을 벌였는데 후자가 승리했다.

이에 1800년, 아시르의 아미르 무함마드 이븐 암마르 아부 눅타의 동생 압둘 와합이 사우디-아시르 병력과 함께 개입하자 중과부적이라 여긴 함무드는 자이디 이맘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쇠퇴를 겪던 이맘 알 만수르 알리는 중립을 표방하며 개입을 거부했고, 고립무원이 된 함무드는 사우디에 복속했다. (1803년) 아시르 휘하이긴 해도 부족장 지위를 인정받은 함무드는 도움을 거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조카 알리 빈 하이다르에게 북부 예멘에서 세력 확보에 나서게 했다. 그 결과 바니 마르완, 아브스, 바니 하산, 알 와이자트 부족이 전투 없이 그에게 복속했다. 이후 함무드는 공세에 나서 디리야 토후국의 명의로 마우르, 루하이야, 호데이다, 바이툴 파키흐, 자비드 등의 예멘 북부와 홍해 연안 도시들을 점령했다.[8]

4.1.6. 카르발라 파괴 (18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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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들어 오스만 조정의 관심이 유럽과 이집트에 쏠린 틈에 사우디 군대는 이라크 남부에 대해 더욱 정복과 습격 나선다. 1801년 사우드와 우스만 알 무다이피가 남부 이라크에 진입하여 시아파 성지들과 영묘들을 파괴했다. 특히 카르발라에서는 보복으로 후세인 영묘의 돔을 파괴하고 5천에 달하는 주민들을 학살한 후 디리야로 회군했다. 반격에 나선 알리 파샤는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오스만 조정은 더욱 사우디 토벌을 종용했고, 쉬아 성지의 훼손에 분노한 이란의 파트 알리 샤 카자르 역시 압력을 가하며 카자르 군대가 디리야를 공격하도록 이라크 통과를 허락해달라 요청했다.

4.1.7. 북부 아라비아 평정

1793년 사우디 군대가 북상해 두마툴잔달을 복속시켰고, 이후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은 알 자우프 지역의 샤라라트 부족을 공격했다. 그후 1797년 후자일란은 와디 앗 시르한의 샤라라트 및 루왈라 부족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아라비아 반도 북쪽 끝인 알 자우프 지역도 평정되었고, 하일의 아미르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의 영지로 주어졌다. 동시에 디리야 토후국은 오스만령 시리아와 접경하게 되었다.

4.1.8. vs 메카 샤리프국

오스만 술탄의 봉신으로써 1750년대에 메카를 지배한 샤리프 마수드 빈 사이드는 와하비 신도들의 하지 참가를 금지시키며 사우디와 마찰을 빚었다.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샤리프 무사에드 역시 같은 노선을 유지했으나, 1769년 압둘아지즈가 네지드에서 사로잡아 디리야로 압송된 샤리프 만수르 등 히자즈 포로들을 몸값 요구 없이 풀어주자 마침내 하지 참가를 허가했다. 1771년에는 샤리프 아흐마드 빈 사이드가 디리야 측에 히자즈 학자들을 대상으로 와하비 교리를 설명할 학자들의 파견을 요구했고, 이에 압둘아지즈는 셰이크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 알 후세인과 함께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의 펀지를 보냈다. 논의와 서신 교환 후 샤리프 아흐마드와 메카의 학자들은 와하비 교리에 공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샤리프 아흐마드가 폐위되고 조카 수루르 빈 무사에드가 집권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샤리프 수루르는 디리야 측의 하지 참가 요청에 방문세를 납부하라 명시했고, 압둘아지즈는 이를 거부했다.

와하비 순례객들은 1782년에야 샤리프에게 많은 선물을 바친 후 하지를 행할 수 있었다. 1787년 샤리프 수루르의 사후 계승한 동생 갈립은 1789년, 네지드의 패자1797년 후자일란은 와디 앗 시르한의 샤라라트 및 루왈라 부족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아라비아 반도 북쪽 끝인 알 자우프 지역도 평정되었고, 하일의 아미르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의 영지로 주어졌다. 동시에 디리야 토후국은 오스만령 시리아와 접경하게 되었다. 에 오른 사우디 측에 재차 와하비 교리 설명을 부탁했다. 이에 압둘아지즈는 17년 전과 같은 학자 및 서신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샤리프 갈립과 학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그후 샤리프 갈립은 와하비 신도들의 메카 출입을 금지했고, 이로써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790년, 샤리프 갈립은 사우디에 대한 선제 공격에 나서며 동생 샤리프 압둘아지즈 휘하 1만 병력을 파견했다. 샤리프 압둘아지즈는 디리야를 향해 진격하던 도중 샤크라 서쪽의 사르 지역에 있는 카스르 바삼에서 사우디 수비대의 저항에 부딪히자 성채를 포위했다. 히자즈 군대는 4달간 성채를 함락하지 못했고, 압둘아지즈는 알 아흐사 전선이 바쁜 와중에도 사우드 휘하 지원군을 보냈다. 이에 샤리프 압둘아지즈는 슈아라로 물러나 메카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듬해 봄 샤리프 갈립이 직접 출정하여 슈아라를 포위했다.

하지만 한달 간의 공성전에도 역시 함락되지 않았고, 마침 핫즈 순례 기간이 다가오자 샤리프 갈립은 원정군과 함께 그의 존재가 절실했던 메카로 철수했다. 1795년에는 샤리프 푸하이드가 이끄는 히자즈 군대가 리야드 서남쪽 방면의 와디 마살에서 사우디에 복속한 하디 빈 카르말라 휘하의 카흐탄 부족을 공격해 격파하고 학살을 벌였다. 승리 후 샤리프 나세르 빈 야흐야가 이끄는 히자즈 군대가 재차 파견되었고, 주마니야에서 카흐탄 부족과 맞섰다. 소식을 들은 압둘아지즈는 우타이바, 무타이르, 사훌, 수바이아, 아즈만, 다와시르 부족 등으로 구성된 원군을 보냈다. 이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사우디 군대가 히자즈 측에 3백여 전사자를 안기며 승리했고, 다수의 가축[9] 및 여러 문의 대포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4.1.8.1. 메카 입성 (1803년)
1797년 샤리프 갈립은 다시 군대를 모아 히자즈와 네지드의 경계인 카르마에서 사우디 군과 대결했으나 역시 패배했다. 이로써 디리야 토후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한 그는 와하비 신도들의 핫즈 참가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 1802년 샤리프 갈립은 튀르크, 이집트, 모로코 등 다국적 용병을 포함한 군대와 함께 카르마와 비샤로 출정했으나 역시 압둘아지즈에게 패배했고 일대가 사우디령이 되며 히자즈 중심부가 온전히 노출되었다. 여기에 일부 부족들이 사우디에 복속하며 반기를 들자 샤리프 갈립은 매부인 아드완 부족장 우스만 이븐 압둘라흐만 알 무다이피를 디리야에 사절로 보내어 휴전을 맺었다. 다만 히자즈로 돌아온 우스만은 돌연 사우디에 충성 서약을 하며 친사우드 부족들과 봉기했다. 샤리프 갈립은 토벌에 나섰으나 우스만은 그를 격파한 후 역으로 타이프를 점령했다. 압둘아지즈는 우스만을 타이프와 히자즈의 아미르로 봉하며 현지 부족들에게 지원할 것을 명했고, 샤리프 갈립은 메카로 철수했다.

뒤이어 히자즈 완전 정복을 결심한 사우드는 대군과 함께 출정하여 타이프에서 우스만과 합류했다. 1803년의 핫즈를 앞두고 샤리프 갈립은 오스만 조정에 서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핫즈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후 사우드가 메카로 진군하자 샤리프 갈립은 동맹인 샤리프 압둘 무민에게 도시를 맡긴 채로 제다로 피신했고, 후자는 높은 지위를 대가로 와디 앗 사일에 주둔하던 사우드에게 항복했다. 이를 수용하고 메카에 무혈 입성한 사우드는 오스만 술탄 셀림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이단적 건물과 세금을 혁파했으며 핫즈 순례단이 악기를 가져오지 않도록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총독들에게 일러두라 말했다. 메카 대사원에서는 주민들에 대한 안전 보장과 와하비 교리가 낭독되었고, 묘지에 있던 돔들은 파괴되었다. 메카 점령 후 사우드는 제다를 포위했는데, 요새화된 성벽을 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포위를 풀고 메카에 수비대를 배치한 후 회군했다. 1803년, 사우드가 떠난 후 샤리프 갈립은 메카로 진군해 무혈 입성하고는 사우디 주둔군에게 안전한 철수를 보장했다. 뒤이어 그는 우스만이 있던 타이프를 포위했는데, 히자즈 상실을 앞두고도 디리야 조정은 압둘아지즈가 쿠르드 인에게 암살된 여파로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4.2. 사우드 대왕

파일:1810 사우디.png
사우드 치세 중반인 1809년 무렵의 디리야 토후국 영토

압둘아지즈의 암살 후 제위에 오른 사우드는 이미 숙련된 군사령관이었고, 부친 대의 정복 사업을 이어갔다. 그의 주요 공격 방향은 히자즈와 오만이었다.

4.2.1. 이라크 전역

사우드의 즉위 후 사우디 군대는 매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이라크를 습격했다. 1803년 말에는 바그다드 총독의 사주로 의심되는 압둘아지즈 암살의 복수를 위해 사우디 군대가 나자프 외곽을 약탈했고, 바그다드 총독이 반격에 나서자 철수했다. 1804년 사우디 군대는 주바이르와 바스라 외곽을 약탈했고, 문타피크 연맹 지도부의 일원이자 주바이르 태수의 동샐인 셰이크 만수르 앗 사둔을 사로잡았다. 같은해 11월, 알리 파샤는 작년에 마지막으로 메디나로 시리아 순례단을 이끌었던 압둘라 파샤 알 아젬과 함께 힐라에 대군을 집결시켜 1805년 초엽까지 주둔하며 유프라테스 너머를 감시했다. 그동안 숨죽이던 사우디는 1806년 4월, 왕자 압둘라 빈 사우드가 나자프와 사마와를 공격하는 것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나자프에서 사우디 군은 성벽을 넘는데 성공했지만, 주민들이 반격해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났다. 요새화되어 있던 사마와에서는 더 큰 피해를 입자, 사우디 군대는 후퇴했다. 이듬달 압둘라는 주바이르와 바스라를 공격했다. 사우디 군대가 근교 마을들을 장악하자 바스라 주민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문타피크와 카압 부족이 반격하여 격퇴했다.

사우디 군대는 1808년 재차 카르발라 근처에 출몰했다. 그중 상당수의 병력이 바그다드로 진군하자 시장이 폐쇄되고 당국이 상인들에게 무장하여 수비대에 합류하라 지시하는 등 혼란이 일었다. 비록 사우디 주력 부대는 디리야에서 벌어진 내분으로 후퇴했지만, 일부는 카르발라 인근 샤타타 오아시스에 거점을 마련하고 카르발라와 힌디야를 포위했다. 뒤이어 사우디 군은 사마와 인근의 아인 사이드에도 출몰했지만, 小 술레이만 파샤가 반격에 나서 격퇴했다. 후자는 사우디 군이 떠난 후에도 와하비 교리를 버리지 않던 샤타타의 부족장을 처형한 후 바그다드에 개선했다. 1810년 압둘라는 이라크의 내분을 틈타 진격해 바그다드 근교에 당도했지만 외곽만 약탈하고 회군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디리야 토후국은 이집트의 침공 위협에 대비하느라 다시 유프라테스를 넘지 못했다. 다만 그 영향력은 지속되어 1812년까지도 카르발라 인근 알 힌디야 부근 베두인들은 사우디에 자카트 세금을 납부했다.

4.2.2. 히자즈 정복 (1805년)

1805년 샤리프 갈립은 다시 다국적으로 구성된 1만 병력을 편성해 아시르의 친사우드 아미르인 압둘 와합 아부 눅타를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히자즈 군대는 오스만 제국이 지원해 준 대포와 무기 상당수를 적에게 뺏겼고, 6백의 전사자 중 대부분도 튀르크 인이었다. 압둘 와합 아부 눅타는 전리품의 1/5를 디라야로 보냈다. 같은해 사우드는 메카 북쪽의 와디 파티마에 성채를 세워 히자즈 군대의 움직임과 보급로를 통제하게 했고, 압둘 와합 아부 눅타를 군사령관에 봉하며 제다로 진군시켰다. 뒤이어 사우디 대군이 메카로 향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고, 중과부적이라 느낀 샤리프 갈립은 메카 아미르 직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디리야 토후국에 복속했다. 샤리프 갈립은 말리키파 무프티인 사이드 무흐신 이븐 압둘라 알 하무드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술탄에게 디리야 토후국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었지만, 그는 메카 함락 시까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얼마후 바다이 빈 무다얀이 이끄는 사우디 군대가 메디나를 포위한 후 점령하고, 얀부 역시 접수하며 히자즈 전역이 빠르게 사우디 령으로 병합되었다. 이로써 디리야 토후국은 아라비아 반도 주요부를 석권하며 최전성기를 맞았다. 사우드는 1806년부터 메카 순례단을 이끌었다. 그는 주로 메디나 인근에 네지드 순례객들을 집결시킨 후 남하하며 히자즈, 아시르, 하일 등지의 인원을 모았다. 메카에 당도한 후에는 자선을 베풀고 샤리프 갈립과 예물을 교환했으며, 카바에 키스와를 씌웠다. 사우드는 또한 우타이비 부족장 파라즈 빈 샤르안, 장군 마수드 빈 무다얀, 얀부 총독 자베르 빈 자바라를 북부로 파견해 시리아 총독 압둘라 파샤 알 아젬이 이끄는 시리아 순례단의 히자즈 진입을 막았다.

4.2.3. 예멘 전역

히자즈, 아시르, 술라이마니 지역의 복속 후에도 여전히 사우디 지배를 거부하던 나즈란의 마카라미 토후국은 사우디의 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1805년 아시르의 압둘 와합, 비샤의 파하드 빈 샤크반, 다와시르 부족장 이브라힘 빈 무바라크가 이끄는 대군이 나즈란을 침공해 격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했다. 다만 압둘 와합은 나즈란 인근에 궁전을 세우고 수비대를 배치해 도시의 무역로에 지장을 준 후 철수했다. 사우드는 지속적으로 사나에 사절을 보내 자이디 이맘 알 만수르 알리와 1809년에 그를 계승한 아들 알 무타와킬 아흐마드에게 유일신 신앙과 돔 건축 등 영묘들의 파괴를 설득했다. 그 영향으로 사나와 다마르 등지에서는 묘지의 돔들이 파괴되기도 했다.

4.2.4. 오만 복속 (1808년)

1800년에 압둘아지즈는 이브라힘 대신 살렘 이븐 빌랄 알 하르크를 부라이미의 아미르로 봉했었다. 살렘은 다와히르, 키타브, 바니 알리, 바니 라시브 등 인근 부족들을 복속시켜 디리야에 자카트를 바치게 했다. 당시 바레인 원정에 집중하던 오만의 군주 술탄 빈 아흐마드는 무스카트 북쪽의 바티나 지역까지 사우디 세력이 미치자 협상에 나서 5천 리얄의 연공을 바치는 대가로 3년의 휴전을 체결했었다. 1804년 술탄 빈 아흐마드가 카시미 부족에게 피살된 후 오만은 분열되어 그의 아들 사이드와 동생 카이스가 각각 무스카트와 소하르를 기반으로 내전을 벌였다. 13세에 불과했던 사이드의 섭정단은 이미 1803년에 술탄 빈 아흐마드에 대해 반란을 시도했다가 패배해 디리야로 망명했던 사이드의 사촌 바드르 빈 사이프를 초청했다.

1804년 바드르는 사우디 병력과 오만에 당도, 카이스를 무트라에서 몰아내며 실권자가 되어 군림했다. 1806년, 사이드가 성년이 된 후에도 바드르가 권력을 이양하지 않자 사이드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그와 결투에 나서 검으로 찔러 죽이고 실권을 회복했다. 사이드는 디리야에 내던 자카트를 중단했고, 이에 무틀라크의 사우디-카시미 군대가 침공하자 카이스와 함께 맞섰으나 후자는 1808년에 코르파칸 패하여 전사했다. 그후 무틀라크가 무트라를 점령하고 무스카트 앞에 당도하자, 대부분의 오만 도시들이 사우디에 복속했다. 사이드 역시 부친처럼 연공 납부를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 이렇듯 걸프에서 사우디 세력이 크게 성장하자,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주둔 함대 일부를 보내어 견제에 나섰다.

4.2.5. 바레인 정복 (1809년)

1797년 바레인의 자와에 자리잡은 칼리파 가문은 1800년 오만 제국의 술탄 빈 아흐마드에게 바레인을 잃고 사우디령 주바라로 망명했다. 술탄 빈 아흐마드는 동생 사이드를 바레인 총독으로 봉했다. 이에 칼리파 가문은 사우드에게 복속하며 바레인 수복을 도와달라 청했고, 후자가 파견한 이브라힘은 1809년 오만 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이브라힘은 바레인을 칼리파 가문에 돌려주는 대신 사우디 령으로 병합했고, 스스로 아미르가 되어 디완 성채에 거주했다. 같은해 칼리파 가문은 무력으로 바레인 수복을 시도했으나 술레이만 빈 사이프 빈 투크가 이끄는 사우디 군이 주바라마저 함락하여 저지했고, 셰이크 살만 빈 아흐마드 등 수뇌부를 디리야로 압송했다. 사우드는 살만 일행만 디리야에 연금시키고 나머지는 주바라로 돌려보냈다. 이후 이브라힘의 조카 파흐드 빈 술레이만이 바레인 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4.2.6. 영국의 라스알카이마 공격 (1809년)

나폴레옹 전쟁 발발 후 영국의 인도양 함대가 프랑스령 모리셔스 & 레위니옹과 네덜란드령 자바 섬 등지로 분산되자 카시미 가문은 사우디 측의 후원 하에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영국 선박들을 약탈하고 선원들을 학살했다. 무력 개입할 여력이 없던 영국은 1806년 사이드와 반다르아바스 조약을 체결, 영국 선박들에 대한 보호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듬해에 프랑스가 무스카트와 테헤란에 영사관을 설치하며 해적질을 부추겼다. 그 결과, 1808년 카시미 가문은 영국령 인도수라트 항구를 습격하고 부셰르를 방문하던 영국 외교 사절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1809년 가을, 뭄바이 주둔군을 실은 10척의 영국 함대는 무스카트를 거쳐 라스알카이마를 공격했다. 영국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내세워 도시를 점령, 불태웠고 카시미 함대의 절반 이상을 파괴했다. 이후 내륙에서 다가오던 무클라크의 사우디 군대에 맞서는 대신 도시를 떠난 영국 함대는 이란 쪽의 반다르렝게, 케슘의 루프트 성채 등을 습격한 후 1810년에 뭄바이로 돌아갔다. 영국은 카시미 부족을 복속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무산담 반도 서쪽 협곡들에 숨겨두었던 선박들로 이전보다는 줄긴 했지만 해적질을 이어갔다. 한편 라스알카이마를 돕기 위해 남하한 무틀라크는 쉬나스 인근에서 사이드를 격파한 후 부라이미로 회군했다.

4.2.7. 시리아 전역

1806년 마흐말과 악단을 대동한 시리아의 핫즈 순례단이 사우디 군대에 가로막혔고, 이들은 호위하던 오스만 병력이 적어 싸우지 않고 돌아갔다. 이로써 다마스쿠스 총독 압둘라 파샤 알 아젬은 이듬해 해임되었고, 새로 부임한 쿤주 유수프 파샤는 사우디와 싸우라는 명을 받았으나 계획서를 올리는 것에 그쳤다. 유수프 파샤는 원정에 이집트, 바그다드 총독들로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 사우디 정찰대가 하우란 고지와 헤르몬 산에 이르렀고, 보스라와 무자이리브 성채를 습격했다. 동시에 사우드는 다마스쿠스, 알레포, 하마 등 시리아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와하비 교리를 수용하고 자신에게 복속할 것을 제안했다. 이로써 사우드가 대대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혼란이 일기도 했으나, 그는 동조 세력이 거의 없고[10] 각 도시들이 저항을 준비하자 정복을 단념했다.

하일의 아미르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은 샤라라트 및 루왈라 부족에게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고, 1810년 그들은 주민들이 달아난 보스라를 약탈했다. 뒤이어 사우디 군대는 다마스쿠스 남쪽의 궁전들을 약탈했고, 오스만 군대가 다가오자 철수했다. 이단시되던 와하비 세력이 최초로 오스만 제국의 직할령을 공격한 이 사건은 메카 상실 후 다마스쿠스 총독 및 오스만 조정에 재차 큰 충격을 안겼다. 유수프 파샤의 미온적 태도에 실망한 마흐무트 2세는 1810년 그를 해임하고 아크레의 술레이만 파샤로 대체하며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함께 사우디를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고, 결국 오스만 조정은 무함마드 알리에게 원정을 일임시켰다.

4.2.8. 하드라마우트 전역

1790년대부터 하드라마우트에서는 여러 부족들이 와하비 선교에 응하여 사우디와 동맹 혹은 우호 협정을 맺었다. 1807년 사우디 군대가 하드라마우트에 처음 당도하여 시밤 일대를 정찰한 후 나즈란 근처의 거점으로 돌아갔다. 1809년에는 사우디에 복속한 예멘 북부의 다흠 부족장 나지 빈 알리 빈 카믈라가 남하하여 카샤미르를 점령, 하드라마우트의 사우디 거점으로 삼았다. 이에 수피들에 불만을 품던 나흐드, 야파아, 알 카티리 부족[11]들이 와하비 교리를 수용하며 사우디에 복속했다. 이때 후드 영묘를 비롯한 하드라마우트 협곡의 성지들이 파괴되었고, 타림에서는 이단적이라 여겨지는 책들도 불살라졌다.

또한 나지 빈 알리 빈 카믈라는 부라이크 토후국의 수도인 해안의 앗쉬흐르로 진군해 아미르 나지 빈 알리와 만났고, 그를 비롯한 주민들에게서 와하브파에 대한 서약을 받아낸 후 회군했다. 아시르 분쟁이 종결된 1811년에 사우디 군대의 하드라마우트 원정이 있었고, 1813년에는 야파아 부족장 야흐야 빈 압뒬하미드가 디리야를 방문해 하드라마우트에서의 와하비 교리 확산을 이끈다는 부친의 서약을 갱신했다.

4.2.9. 아부 아쉬르 토후국의 반란

1802-03년 무함마드 이븐 암마르 아부 눅타가 디리야를 방문한 후 돌아오는 길에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후 동생 압둘 와합이 압둘아지즈에게 아시르의 아미르로 임명되었고, 사우디의 히자즈 원정에 적극 참여했다. 한편 술라이마니 (지잔)의 아부 아리쉬 부족장 함무드 (아부 미스마르)는 원정 도중 아시르 휘하 배치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압둘아지즈에게 청원하여 아시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아부 아리쉬의 아미르로 인정 받았다. 이에 반발한 압둘 와합이 공격하여 양측의 충돌로 이어졌다. 디리야 조정의 중재에도 양측의 분쟁이 계속되자 사우드 국왕은 함무드를 탓하며 티하마 일부를 회복한 자이디 이맘국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함무드는 출정을 거부했고, 뒤이어 1808년 핫즈 기간에 사우드가 소환했음에도 바쁘다며 대리인을 보냈다.

이에 사우드는 직접 출석을 요구했으나 역시 거부되자, 아시르 측 말대로 함무드가 배신했다 여겨 토벌에 나섰다. 명령을 받은 압둘 와합은 예멘 침공으로 세력을 불린 함무드에 대적하기 위해 현지 부족들을 규합했다. 사우드 역시 가사브 알 우타이비, 알리 이븐 압둘라흐만 알 무다이피, (비샤 총독) 푸하드 빈 살렘 빈 샤크반, (샤흐란 부족장) 이븐 다흐만, (카흐탄 부족장) 이븐 하르말라 등이 이끄는 병력을 지원해주며 압둘 와합의 명에 따르게 했다. 이에 함무드는 6년 만에 다시 자이디 이맘국에 복속하며 맞섰고 병력 지원을 대가로 루하이야, 호데이다, 베이툴 파키흐를 이맘에게 반환했다. 여기에 사우디에 복속을 거부하며 버티던 나즈란의 마카리마 열두이맘파 세력 역시 병력을 지원했다.

1809년, 대군을 모은 압둘 와합은 와디 비샤에 주둔했다. 이에 함무드도 바니 얌, 바킬, 하쉬드, 함단, 앗 다함 부족 등을 모아 북상해 비샤 인근에 주둔했다. 압둘 와합은 별동대를 보내 남쪽의 사브야 점령을 시도하고, 퇴로를 차단한 후 함무드를 남북으로 포위해 섬멸하려 했다. 함무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선제 공격을 가했지만 격퇴되었고, 다음날의 총공격도 패하여 사브야로 철수했다. 다만 와디 비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압둘 와합은 막바지에 전사했고, 남은 장수들의 요청에 사우드는 압둘 와합의 사촌 타미 이븐 슈아이브 알 무타흐미를 새 아미르로 봉했다. 타미는 1810년에 우스만 이븐 압둘라흐만 알 무다이피와 함께 1만 병력을 이끌고 남하, 루하이야를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함무드는 회군하는 사우디 군대를 바르바르에서 공격했으나 격퇴되어 아부 아리쉬로 철수했다. 자신감을 얻은 타미는 재차 루하이야와 호데이다를 공격해 전자를 점령했고, 약탈한 후 아시르로 회군했다. 그해 말엽 타미는 재차 출정해 호데이다를 공격, 점령했다. 이에 더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함무드는 사다의 영주 사이드 무함마드 빈 알리의 중재로 1811년에 사브야, 앗 다르브, 바이쉬를 할양하고 영유하는 예멘 항구들에서 나는 세금을 연공으로 바치는 조건으로 사우드와 휴전을 맺었다. 사우드 역시 이집트군에 맞서느라 바빴기에 아부 아리쉬 토후국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4.2.10. 바레인 상실 (1810년)

1810년, 주바라의 칼리파 가문은 오만의 술탄 사이드 빈 술탄과 쿠웨이트 및 이란 (카자르 왕조)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주바라와 바레인을 수복했다. 칼리파 가문이 오만에 복속하고 연공을 바치는 조건이었다. 바레인 전투에서 아미르 이브라힘은 패퇴했고, 수비대장이던 파흐드 빈 술레이만은 16명의 사우디 병사들과 사로잡혔다. 칼리파 가문은 포로들로 디리야의 남은 칼리파 가문원들과 인질 교환을 성사시켰다. 협상을 반대하던 이브라힘은[12] 잘라흐마 부족의 해적 라마 빈 자베르가 이끄는 60척의 함대와 함께 주바라를 공격했다. 이에 칼리파 가문은 친척인 쿠웨이트에 지원을 요청해 2백척의 함대를 받았다.

1811년 3월에 주바라와 바레인 사이에서 벌어진 카키라 전투에서 사우디 군은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라마 빈 자베르는 알 사바흐 가문의 두아이즈 빈 사바흐, 바레인의 섭정이던 알 파델 가문의 라시드 빈 압둘라를 비롯해 1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등 분전했지만 후와일리아의 아미르 아부 후세인 등의 3백여 병력을 잃고 철수했다. 당시 사우디 주력군은 히자즈에 상륙한 이집트군에 맞서기 위해 서쪽에 배치되었기에 더이상 바레인을 공격하지 못했다. 육지로 연결되어 있고 한발리파를 추종하던 카타르와 달리 섬이고 시아파가 다수인 바레인은 사우디 지배에 크게 저항했다. 또한 바레인은 그 무역적 중요성 때문에 외부 세력들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4.2.11. 오만 일시 정복

1810년 사우드의 아들들인 투르키, 나세르, 사드가 부왕의 지시 없이 무틀라크에 합류하여 오만 침공에 나섰다. 무틀라크는 다와히르, 자나바, 키타브, 두르우 부족들과 함께 무트라, 칼판, 잘란, 수르, 소하르 등 무스카트를 제외한 오만 해안 상당부를 점령했다. 이에 사이드는 디리야에 자카트 납부를 재개하는 조건의 휴전을 맺었다. 그후 무틀라크는 왕자들과 함께 디리야로 돌아갔는데, 그틈에 바니 야스 부족이 와하비 교리를 부정하고 사우디 주둔군을 축출했다. 이에 사우드는 알 아흐사의 아미르 압둘아지즈 빈 구르다카에게 부라이미를 맡겼다. 후자는 누아이미, 다와히르 부족과 함께 진격했으나 아부 디브 전투에서 대패했고 그 자신과 누아이미 부족장 셰이크 함단 빈 라시드를 비롯해 2백여 명이 전사했다. 패배 후 사우디 군대는 오만 방면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오만을 잃을 수 없었던 사우드는 무틀라크를 재차 파견했고, 사이드는 영국에 지원 요청을 했다가 거절되자 카르발라 침탈로 분노해 있던 이란의 카자르 왕조에 도움을 청했다. 파트 알리 샤 카자르는 사디 칸 휘하의 함대를 파견했다. 뒤이어 오만-카자르 군대는 무스카트 서쪽의 나칼에서 무틀라크와 맞섰지만 대패했고, 10문 이상의 대포 등을 빼앗겼다. 오만 군대는 사마일과 무스카트로 후퇴했고, 무틀라크는 카자르 조가 사실 오만을 도우려는게 아니라 (아프샤르 왕조처럼) 무스카트를 점령하려 왔다는 소식을 퍼뜨렸다. 이러함 반간계로 연합군이 분열되며 혼란에 빠지자, 무틀라크는 다시 공세를 가하여 사이드를 격파하고 무트라를 점령했다. 무틀라크는 무트라를 요새화하여 카자르 조의 지원이 무스카트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는 거점으로 삼았고, 디리야에 쿰스 (1/5 세금)를 보냈다.

또한 같은해 투르키와 파이살 왕자가 남하해 무스카트 인근 자알란을 거점으로 삼아 일대를 약탈했고, 바니 부 알리와 바니 라시브 부족을 복속시킨 후 부라이미로 회군했다. 한편 군대를 재정비한 사이드는 카자르 병력을 공격해 격파하여 반다르아바스로 축출했다. 이집트와 전쟁 중이던 1813년에는 후즈르 부족이 무틀라크를 공격해 그를 비롯한 5백여명을 전사시켰고, 이에 사우드는 무틀라크의 동생 바탈을 부라이미로 파견했다. 하지만 1814년 사우드의 죽음과 함께 디리야 토후국은 크게 쇠퇴하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드는 사우디 세력을 축출한 후 동아프리카 경영에 치중할 수 있었다. 짧은 사우디 지배기 동안 오만의 각지에는 마을, 모스크, 궁전 등이 건설되었다.

5. 이집트-사우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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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조정은 본래 다마스쿠스 총독들로 사우디 세력을 멸하려 했으나, 그들이 무용지물이라 여겨지자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게 연락했다. 1807년 12월, 술탄 마흐무트 2세의 히자즈 수복 지시를 받은 무함마드 알리는 후계자로 정한 차남 투순 파샤에게 원정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사우디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1811년 10월, 투순 파샤는 1만 4천의 병력과 메디나의 외항인 얀부에 상륙해 무혈 점령했다. 뒤이어 이집트군은 바드르를 점령했고, 사우드 대왕은 아들 압둘라와 함께 와디 앗 사프라에 2만여 병력을 모아 맞섰다. 그해 12월, 투순 파샤는 와디 앗 사프라로 진격해 3일간 격전을 치렀으나 사우디측 예비대의 습격에 결국 5천여 병력을 잃으며 패하고 물러났다.

5.1. 투순 파샤의 히자즈 수복 (1812-13년)

얀부로 철수한 투순 파샤는 본국에 연락해 근대식 대포들을 포함한 2만 병력을 증원받았고, 1812년 가을 와디 앗 사프라를 무혈 점령했다. 이에 메디나 인근 부족들이 귀순해 왔고, 2달 넘게 공성전을 벌인 끝에 메디나를 점령했다. 다만 스코트인 장교 토마스 케이트 (이브라힘 아가)는 안전 보장을 대가로 항복한 사우디 수비대 중 상당수를 학살했고, 사로잡힌 사우디 장군 마수드 빈 무다얀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처형되었다. 1813년 1월에는 무스타파 베이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메카를 수복했고, 사우디에 협조하던 타이파의 아미르 우스만 알 무다이피 역시 코스탄티니예에서 처형되었다. 마흐무트 2세는 크게 기뻐하며 투순 파샤를 제다 총독에 봉했고, 토마스 케이트는 메디나 총독이 되었다. 곧 무함마드 알리가 친히 제다에 당도했고, 사우디 측에 순응하던 메카의 군주 샤리프 갈립도 체포되어 테살로니카로 유배되었다.

5.2. 사우드의 반격 (1813-14년)

1813년 4월 사우드는 2만 대군과 함께 메디나 동쪽의 히자즈와 네지드의 경계로 여겨지는 히나카야를 공격해 점령했고, 메디나 인근 우흐드 산까지 진격해 이집트 기병대를 격파했다. 같은해 여름 무스타파 베이의 이집트군은 타이프 동쪽의 히자즈와 네지드의 경계로 여겨지는 투루바를 공격했으나 여걸 갈리야 알 바카미야에게 격퇴되었다. 이에 고무된 사우드는 투루바를 요새화하고 병력을 증원해주었다. 10월에는 투순 파샤가 인근 산악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투루바를 재차 공격했으나 역시 철수했다. 투루바의 사우디 군대는 이집트군을 추격하여 큰 손실을 입혔고, 이후로도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보급로를 교란했다. 3연속 패배에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자 무함마드 알리는 히자즈 남부를 습격하던 아시르 부족들을 응징하기 위해 후세인 아가에게 아시르 북부의 항구인 쿤푸다를 공격하게 했다.
많은 수가 아니었음에도 이집트 군대는 쿤푸다와 인근 우물을 장악했다. 하지만 한달 후 아시르의 아미르 타미 빈 슈아이브가 1만 병력과 함께 쿤푸다를 공격, 배에 올라 도주하지 못한 이집트군을 전멸시켰다. 이에 무함마드 알리는 2년 전까지 타미와 대립하던 아부 아쉬르 부족장 함무드와 자이디 이맘국에 병력 지원을 요구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아비딘 베이에게 2만 대군을 주어 바하를 공격했으나 자흐란 부족장 바크루쉬 빈 알라스와 아시르의 타미가 반격하여 격퇴했다. 이집트군을 추격하던 둘은 투순 파샤가 있던 타이프를 포위했고, 불과 20여 기병과 함께 직접 구원에 나선 무함마드 알리는 사로잡은 정찰병에게 병력 수를 부풀린 서신을 전달하게 하는 방식으로 바크루쉬를 속여 철수시켰다. (1814년 6월) 이후 9월에 아비딘 베이가 재차 바하를 공격해으나 바크루쉬의 기습 공격에 패퇴했다.

5.3. 무함마드 알리의 아시르 정복 (1815년)

한편 1814년 4월, 쿤푸다 전투가 진행되던 무렵 사우드가 병사하고 아들 압둘라가 계승했다. 용맹했지만 부친과 같은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압둘라의 즉위 후 사우디 부족들 중에는 분쟁이 일었고, 디리야 토후국은 6번이나 이집트군을 격파한 상태였음에도 약화되었다. 1814년 말엽, 사막전에 능한 리비아 기병대가 증원되자 무함마드 알리는 다시 투루바 공격에 나섰다. 1815년 1월, 그는 타이프와 투루바 사이의 비셀에서 불과 4천의 병력 뿐이었지만 거짓 후퇴 전술로 압둘라의 동생 파이살이 지휘하는 5배가 넘는 사우디 대군을 격파했다.

파이살은 5천여 전사자를 내며 철수했고, 난공불락이던 투루바는 항복했다. 50여 포로들을 잔혹히 처형한 후 효수한 무함마드 알리는 더욱 남하해 아시르의 관문 비샤를 점령했고, 바크루쉬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뒤이어 무함마드 알리는 아시르 산지로 진입, 아미르 타미를 격파해 사로잡았다. 타미는 바크루쉬의 수급과 함께 카이로에서 조리돌림 당한 후 코스탄티니예에서 처형되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쿤푸다를 점령, 중립인 아부 아리쉬 토후국을 제외한 아시르 전역을 평정한 후 메카로 개선했다. 그는 압둘라의 휴전 제의를 수용했다.

5.4. 휴전기 (1815-16년)

부친의 아시르 진격과 함께 네지드로 진격해 카심 지역의 알 라스, 리야드 알 쿠브라, 샤비바 등을 점령했던 투순 파샤는 아직 사막전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압둘라의 협상 제안을 수용하고 메디나로 철수했다. 1815년 5월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 내의 맘루크 반란을 진압하러 떠난 후 홀로 남았던 투순 파샤는 건강 악화로 11월에 카이로로 돌아왔다. 둘의 부재에도 협상은 이어졌고, 1816년 압둘라는 히자즈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스만 술탄의 봉신이 되겠다는 조건의 휴전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미 내부를 다지며 새 원정군을 준비하던 무함마드 알리는 물론, 술탄 마흐무트 2세 역시 휴전을 거부하고 디리야 토후국의 일소를 결심한 상태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압둘라에게 완전히 항복하여 코스탄티니예로 직접 가서 술탄에게 처분을 맡기라는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내걸며 사실상 휴전을 거부했다.

5.5. 이브라힘 파샤의 네지드 정복

애초에 이집트 측이 휴전에 진심이지 않았고 오로지 시간 벌기 전략이었을 뿐이란 것에 분노한 압둘라는 친이집트 부족들에 보복 원정을 가하고 카심 지역의 이집트측 전초 기지 부카이리야를 수복한 후 메디나 근교를 약탈했다. 한편 6개월의 훈련으로 사막전에 대비한 8천 병력을 준비한 무함마드 알리는 1816년 9월, 와병 끝에 투순 파샤가 병사하자 장남 이브라힘 파샤에게 원정을 맡겼다. 투순 파샤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얀부에 상륙한 이브라힘 파샤는 메디나 북쪽의 수와이다라 일대의 사우디 부족들을 토벌했고, 히나키야를 점령해 네지드 진격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튀르크 인들과 평지에서 싸우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에도 이브라힘 파샤를 사막으로 끌어내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을 세운 압둘라는 1817년 4월, 디리야에서 추정해 알 라스에서 카심의 아미르 후질란과 합류했다.

5.5.1. 카심 지방 평정 (1817년)

압둘라는 알 라스로 진격하던 이브라힘 파샤가 마위야에서 숙영 중인 것을 알게 되자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가해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 하지만 이브라힘 파샤가 대포를 모아 일제 사격하고 반격을 가하자 격퇴되었고, 압둘라는 우나이자로 물러났다. 승리 후 6월 말엽, 이브라힘 파샤는 알 라스를 포위했다. 수비대는 이집트군의 공세를 3번이나 격퇴하는 등 4개월 간 굳건히 저항했다. 다만 사우디 원군이 격퇴되자 수비대는 이브라힘 파샤의 협상을 수용해 중립을 지키다 우나이자가 점령되면 항복하기로 합의했다. 공성 도중 1천여 병력을 잃은 이브라힘 파샤는 알 라스를 무력화 한 후 우나이자 방면의 카브라를 포격한 끝에 항복시켰다.

3주간 휴식한 이집트군이 우나이자로 접근하자 압둘라는 디리야 방면의 샤크라로 철수했고, 사기가 저하된 우나이자는 협상 끝에 수비대가 비무장 상태로 철수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에 알 라스 역시 항복했다. 10월, 이브라힘 파샤가 부라이다로 접근하자 아미르 후자일란은 곧 복속을 표하며 항복했다. 그는 마수드 빈 무다얀, 우스만 알 무다이피, 타미, 바크루쉬와 달리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부라이다에서 2달간 휴식하며 이집트의 증원 병력과 합류한 후, 12월 말에 남하해 카심 지역의 마지막 도시 미다나브를 점령했다. 이로써 카심 지방 전역이 이집트 령이 되었고,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집트 세력이 네지드를 정복한 사례였다.

5.5.2. 네지드 진격 (1818년)

1818년 1월, 이브라힘 파샤는 와샴 지역의 샤크라를 포위했다. 압둘라는 그 전에 이미 디리야로 철수해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다. 샤크라 수비대는 성밖으로 나와 기습한 후 이집트군의 엄청난 포격으로 성벽이 붕괴했음에도 결사 항전했다. 하지만 결국 이브라힘 파샤의 협상 제안을 수용해 항복했고, 다시 휴식한 이집트군은 2월에 디리야 방면 마지막 사우디 거점인 두르마를 포위했다. 보급품이 충분했던 두르마 수비대는 큰 피해에도 협상을 거부하며 버텼고, 이집트군은 5천 발이 넘는 포탄을 쏟아부었다.

우나이자의 경우처럼 수비를 맡던 왕족 사우드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가 디리야로 철수하고 성벽이 일부 붕괴했음에도 수비대는 결사 항전했고, 이집트군은 3차례의 공세 끝에 결국 두르마를 함락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도시는 파괴되었고, 8백의 수비대가 비무장 상태로 항복했지만 절반이 학살되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사로잡은 3천여 아녀자까지 디리야로 보내고 두르마를 폐허로 만들었다. 뒤이은 폭우로 두달간 휴식한 이브라힘 파샤는 1818년 4월, 한달의 행군 끝에 마침내 디리야에 당도한다.

5.5.3. 디리야 공방전 (1818년 4-10월)

파일:디리야 폐허.jpg
이집트 군대에 의해 파괴된 디리야의 폐허

이브라힘 파샤는 8천여 병력과 함께 디리야 외곽에 진영을 세웠다. 성 북쪽의 알 알랍에서 벌어진 첫 교전에서 격퇴된 이브라힘 파샤는 서북쪽의 구바이라로 이동, 일시적으로 사우디 측 참호를 점령했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다만 이로써 디리야 북부 성벽이 크게 약화되었고, 주민의 밀고로 취약 지점을 파악한 이브라힘 파샤는 삼하 방어선을 집중 공격해 격파했다. 북부의 방어를 이끌던 파이살 왕자는 전사했고, 수비대는 더욱 내부로 철수했다. 이집트군은 기세를 타며 중북부의 앗 살마니 및 쿨라이켈, 남쪽 성벽, 서남쪽의 발리다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러자 이브라힘 파샤는 남쪽 외곽의 아르카를 점령했고, 마을을 불태웠다. 이후 일부 디리야 주민들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포위가 한창이던 6월 말엽, 강풍으로 이집트 진영의 화덕에서 발생한 불로 화약고가 폭발해 탄약의 절반이 사라지는 변고가 생겼다. 이브라힘 파샤는 히자즈 및 네지드 주둔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압둘라는 그 틈에 반격을 하려 했으나 군사들이 지쳐 불발되었다. 재정비 후 이브라힘 파샤는 동쪽의 아라피아 방어선을 직접 공격했으나 격전 끝에 격퇴되었다. 그러던 9월, 알리 우준의 증원 병력이 당도하자 이브라힘 파샤는 모든 방면에서의 총공격에 나서 중북부의 마슈라파를 점령했다. 남쪽의 알리 우준은 일시적이나마 핵심 구역인 투라이프 성벽을 넘기도 했고, 격퇴되긴 했으나 사우디 수비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와중에 많은 주민들이 성을 나와 항복했고, 환영을 받았다.

5.5.4. 압둘라의 항복과 멸망

5개월에 달하는 공방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집트군이 철수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압둘라는 병력과 보급품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승산이 없다 여겨 항복 협상에 나섰다. 이브라힘 파샤도 바로 공격을 멈췄고, 압둘라는 주민들의 안전 보장 및 직접 코스탄티니예로 향해 술탄에 운명을 맡긴다는 조건 하에 항복했다. 압둘라가 이집트 진영으로 오자 이브라힘 파샤는 그를 위로하며 맞았다. 이로써 양측 합산 3천여 희생을 치른 끝에 디리야는 항복했고, 카이로에서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사우디의 재기를 염려한 무함마드 알리의 명으로 디리야는 성벽과 시가지는 물론, 녹지까지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이집트 병사들은 시가지를 약탈, 방화했고 디리야의 카디이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의 손자인 술라이만 빈 압둘라 등 와하비 울라마들을 대포 등으로 잔혹히 처형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리야드 남쪽의 만푸하에 정착했다. 4백의 호송 병력과 카이로로 보내진 압둘라 등 250여 사우디 왕족과 30여 알 앗셰이크 가문원들은 무함마드 알리의 환대를 받은 후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압둘라는 3일간 조리돌림 당한 후 강제 음악 청취와 함께 처형되었다. 압둘라의 머리는 박격포로 부서졌고, 몸은 단검이 박힌 채로 내걸렸다.[13] (1818년 12월) 한편 네지드 도시들을 성벽을 허문 이브라힘 파샤는 1819년 초엽 알 아흐사로 진격, 일대를 쉽게 복속시킨 후 20여년 만에 바니 칼리드 연맹을 재건해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 삼았다. 아시르에서는 1818년에 함무드가 사망한 후 사우디 편에 선 아들 아흐마드에 대한 토벌이 이루어졌고, 아부 아리쉬 토후국 역시 멸망되어 그 영토는 자이디 이맘국에 주어졌다. 4월에 디리야로 돌아온 이브라힘 파샤는 8월까지 남은 시가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한 그는 옛 사우디 귀족들을 카르지 총독 압둘라 빈 술레이만 빈 아피산, 알 아흐사 총독 파흐드 빈 술레이만은 빈 아피산, 두르마 수비대장 무타이브 빈 이브라힘 빈 아피산 등을 카르지 주변에서 연회에 초대한 후 처형했다. 카르지 학살 후 이브라힘 파샤는 메디나를 거치며 후자일란을 그곳에 유폐시킨 후, 12월에 이집트로 돌아왔다. 불과 1년여 지난 후인 1821년부터 이집트는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도우며 네지드 지방을 신경 쓰지 못했고, 여러 와하비 봉기가 일어난 끝에 1824년 압둘라의 당숙 투르키가 술라이만 빈 압둘라의 사촌 압둘라흐만 빈 하산과 함께 리야드를 함락하며 2차 사우디 국가(네지드 토후국)을 건국한다. 다만 파괴된 디리야는 다시 수도가 되지 못하고 리야드가 네지드의 중심지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6. 창작물에서

Roblox의 군사 외교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로 형성 가능한 국가이다

대체역사물에서는 썩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는 편이다. 이 시기 아라비아 반도는 한국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은 배경인지라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나온다면 십중팔구 악역으로 등장한다. 이는 디리야 토후국이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인 와하비즘의 산실이기 때문이다.[14] 보통 디리야 토후국과 사우드 가문이 초기에 몰락한다면 와하비즘이 확산되지 않고, 더 나아가 와하비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 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 역시 현재보다 완화되었을 것이라는 논지로 시나리오가 전개된다. 게다가 디리야 토후국은 18세기에 별다른 기반 없이 순수 정복으로 영토를 확장한 드문 사례인데다 기존 종교를 부정하는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당시에도 피정복지의 반발이 엄청났고, 따라서 대체역사물에서도 '기존 질서의 파괴자'라는 악당 타이틀을 붙여 주기에 딱 좋다.

7. 국기

파일:디리야 에미레이트 국기.png

Rise of nations(roblox)에서 디리야 에미레이트를 형성 시 해당 국기로 바뀐다.

8. 영토

파일:디리야 에미레이트 라오네 형성시 지도.png
초록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디리야 에미레이트의 영토다

9. 역대 군주

  • 무함마드 빈 사우드 (1744 ~ 1765)
  •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1765 ~ 1803)
  •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1803 ~ 1814)
  • 압둘라 빈 사우드 (1814 ~ 1818)

여담으로 4명의 군주 모두 명확한 부자 상속을 이루었다. 형제 상속을 한 현대 사우디 왕실과 현저히 비교되는 부분.

[1] 현재 리야드 시가지 남부[2] 본래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던 바니 칼리드는 1669년 오스만 주둔군을 축출하고 알 아흐사를 장악했다.[3] 전체 이름은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 빈 구라이르 알 하미드 알 칼리디. 1752년에 축출되어 카르지로 망명했고, 아라이르 빈 두자인이 집권한다.[4] 이후 이븐 압둘 와합의 후손들은 알 앗-셰이크라 불리며 사우드 왕조의 종교 부문을 담당하는 셰이크 혹은 무프티로 활약했다. 다만 무함마드의 동생 투나얀은 디리야 서약에 반대했다.[5] 현재는 원래 리야드 남쪽의 별개의 도시였으나 20세기 말엽의 시가지 대확장 후 현재에는 리야드 시가지 남쪽의 구이다.[6] 후자일란 이븐 하마드 앗 타미미 총독 선임[7] 술레이만 빈 아파시안 총독 선임[8] 함무드의 병력은 한때 아덴에까지 이르렀다고도 한다[9] 이븐 간남에 따르면 낙타 3만 마리와 양과 염소 20만 마리[10] 일부 부족이 자카트를 바치는 것에 그쳤다[11] 카티리 '술탄' 자파르 빈 알리 빈 오마르 빈 바드르와 얼마 후 뒤를 이은 알리 빈 바드르 빈 알리 빈 자파르[12] 사우드에게 자신이 공격해 수복할테니 포로들을 풀어주지 말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이미 석방된 후였고, 사우드는 뒤늦게 그들을 재차 체포하려 했지만 이미 바레인에 당도한 후였다[13] 술라이만 빈 압둘라 역시 강제로 음악을 들으며 처형되었다[14] 보다 정확히는 와하비즘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하브가 이후 사우드 가문과 손을 잡고 참모이자 이념가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