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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앗 디리야의 앗 투라이프 지구 | |
| 아랍어 | حي الطريف في الدرعية | ||
| 영어 | At-Turaif District in ad-Dir'iyah | ||
| 프랑스어 | District d’at-Turaif à ad-Dir’iyah | ||
| 국가·위치 | 리야드 |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 지정번호 | 1329 | ||
| 등재연도 | 2010년 | ||
| 등재기준 | (ⅳ)[1], (ⅴ)[2], (ⅵ)[3] | }}} | |
기둥 하단부만 남아있는 무함마드 빈 사우드 모스크
와디 하니파를 따라 조성된 디리야의 각 구역들
1. 개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서북쪽의 와디 하니파 협곡에 남아있는 1차 사우디 국가, 즉 디리야 토후국의 수도 유적. 앗 디리야, 아드 디리야, 알 디리야로도 표기되지만 사우디 관광청의 디리야 (Diriyah) 표기를 따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사우디 대표 관광지 중 하나로 거듭난 앗-투라이프 일대가 전부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디리야는 와디 하니파 협곡을 따라 조성된 여러 구역들이 합쳐진 광역 도시였다. 물론 디리야 토후국 시기 앗-투라이프가 중심적으로 개발되었고, 궁전과 사원들이 밀집한 중심 구역인 것은 맞다. 디리야는 또한 리야드 도에 속한 디리야 주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20세기 후반부터 조성된 새 시가지의 인구는 약 7만명이다. 2020년대 들어서는 비전 2030의 일환으로 디리야 인근을 글로벌 문화 역사 단지로 개발하는 디리야 게이트 사업이 진행되며 주변이 공사판이 되었다.2. 역사
투라이프 구역의 중심부
사드 빈 사우드 왕자 궁전. 안쪽의 넓은 중정은 마굿간으로 쓰였다.
디리야 일대는 본래 아랍 부족들 중 라비아 계열인 하니파 부족이 거주했고, 따라서 리야드 서쪽의 협곡은 와디 하니파라 불렸다. 서기 627년, 무함마드가 보낸 무함마드 이븐 마슬라마 알 안사리의 원정대가 일대를 공격해 부족장 투마마 빈 우탈을 사로잡았다.[4] 사우드 왕가의 조상인 므루드 가문 역시 하니파 부족의 일파였고, 본래 카티프 인근에 살았다. 그러던 1446년, 므루다 부족장 마니 이븐 라비아 알 무라이디는 하즈르 (리야드) 남쪽의 만푸하에 살던 친척 이븐 디르아를 방문했다. 이븐 디르아의 도움으로 경작이 가능한 땅이었지만 당시 거의 무주지에 가깝던 와디 하니파의 구사이바와 알 물라이비드 일대를 얻은 마니는 이듬해 일족과 함께 이주했고, 고향 앗 두르우 혹은 땅을 내어준 친척 이븐 디르아의 이름을 따서 앗 디리야 (الدرعية)라는 도시를 세웠다.
마니를 시작으로 그의 후손들은 농업과 무역을 바탕으로 디리야를 발진시켰고, 이로써 인구가 불어나며 디리야 셰이크국이란 정치체가 확립되었다. 1463년 마니를 계승한 아들 라비아는 야지드 부족과 싸우며 와디 하니파를 따라 앗 나이마, 알 와실 일대를 정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력이 커지자 내분이 발생했다. 1654년 들어서는 셰이크 마크란의 두 아들 라비아와 무크린의 후손들이 각각 알 와탄과 알 무크린 파벌을 이루어 내전을 벌이고 외세도 침공해 오면서 디리야 셰이크국은 더욱 약해졌다. 그러던 1727년 무크린의 증손자인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무크린 계파의 세력을 모아 내전을 종식시켰고, 디리야의 농업을 증진하며 세력을 키웠다. 1744년에는 네지드 곳곳을 전전하던 와하브파 사상가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하브를 수용했고, 이듬해 디리야 서약을 맺으며 지하드 (성전)에 나서기 시작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교리로 무장한 디리야의 군대는 빠르게 네지드 지방을 석권했고, 이로써 세워진 디리야 토후국의 수도로써 디리야는 사우드 왕가에 복속한 부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더욱 발전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인근 리야드의 다함 빈 다와스는 나머지 네지드 도시들이 굴복하는 도중에도 끝까지 저항했고, 디리야와 27년간 17번의 전투를 벌였다. 양측의 전쟁에서는 4천여명이 사망했고, 1750년대 디리야에는 성탑을 지닌 두 성벽이 세워졌다. 1765년 알 아흐사의 바니 칼리드 토후국 군주 우라이르 빈 두자인이 디리야를 포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그 무렵 즉위한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는 1773년 마침내 리야드를 정복했고, 1788년에는 마침내 네지드를 통일한다. 더 나아가 압둘아지즈는 1795년 알 아흐사를 정복했고, 1803년 11월 디리야의 모스크에서 예배 도중 쿠르드 인에게 암살되었다.
그럼에도 다음 군주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는 기세를 이어가 1805년 히자즈를 정복하며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한다. 제국에 달하는 국가의 수도가 된 디리야는 히자즈, 알 아흐사, 이라크, 시리아, 예멘, 오만 등지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인해 활발한 무역 도시가 되어 번영했다. 디리야 중에서도 앗 투라이프가 왕성으로 개발되어 이맘 무함마드 빈 사우드 모스크, 살와 궁전, 사드 빈 사우드 궁전, 이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궁전, 보물고, 모디 모스크 등의 건물이 세워졌다. 하지만 디리야 토후국의 전성기는 짧았다. 두 성지를 잃은 오스만 제국은 근대화를 이루던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게 디리야 토후국 공격을 부탁했고, 이에 이집트 군대가 1812년부터 히자즈에 상륙해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1818년 봄에는 무함마드 알리의 장남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1만 군대가 디리야를 포위했다.
디리야 토후국의 마지막 국왕 압둘라 빈 사우드는 5개월 넘게 결사 항전했고, 그의 동생 파이살을 포함한 2천 여명이 전사했다. 이집트군도 수천 여명이 전사했고, 이브라힘 파샤는 9월에 증원 병력을 받은 후에야 재차 공세에 나설 수 있었다. 화력을 앞세운 이집트군의 공격에 디리야 북부가 점령되었고, 앗 투라이프 역시 함락 위기에 놓였다. 이에 많은 주민들이 성을 나가 항복하고 식량도 부족해지자 압둘라는 결국 항복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항복 당시의 약속을 어기고 디리야의 성벽과 시가지는 물론, 녹지까지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이집트 병사들은 시가지를 약탈, 방화했고 와하브파 성직자들을 잔혹히 처형했다. 압둘라는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고, 이브라힘 파샤는 1819년 8월에 폐허가 된 디리야를 떠나 이집트로 돌아갔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리야드 남쪽의 만푸하에 정착했다.
2.1. 디리야 토후국 멸망 후
와디 하니파 협곡 위의 성벽
살와 궁전 일대의 항공 사진
이집트군이 떠난 후 기존 디리야 토후국의 귀족이던 우야이나 부족장의 아들 무함마드 빈 미샤리 빈 무암마르는 디리야를 일정 수준 재건한 후 감옥에서 탈출한 압둘라의 동생 미샤리 빈 사우드를 모셔와 이맘으로 선포했다. 무함마드의 재건 사업과 농사 증진으로 디리야를 떠났던 주민 중 상당수가 돌아왔고, 이에 네지드가 다시 통일될 것을 우려한 바니 칼리드 연맹이 1819년 말엽 리야드와 연합해 무함마드의 동맹인 만푸하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820년, 네지드 대부분을 재통합한 무함마드는 주군으로 모시던 미샤리 빈 사우드를 돌연 체포한 후 스스로 이맘이 되었다. 마침 아부쉬 아가의 이집트군이 카심을 점령하자 무함마드는 오스만 술탄에 복속을 표하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기존의 동맹이던 사우드 왕족 투르키 빈 압둘라가 두르마에서 봉기했고, 무함마드는 아들 미샤리를 보내 토벌했으나 실패했다.[5]
사우드 왕실에 충성하던 세력을 모은 투르키는 디리야로 나아가 왕궁을 포위했고, 무함마드는 항복했지만 이미 미샤리를 이집트 측에 넘긴 죄로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다만 뒤이어 칼릴 아가와 파이살 앗 다위쉬가 이끄는 이집트군이 남하하자 투르키는 디리야를 떠나 은둔했다가 이집트군이 떠난 후 이르카에 나타났고, 리야드의 이집트군과 싸웠다. 2번의 포위 끝에 리야드 주둔 이집트군이 항복하고 떠나며 투르키는 리야드를 점령했다. (1824년 말엽) 투르키는 기존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디리야 대신 리야드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디리야는 역사 속에서 잊혀져 모래 속에서 쇠락했고, 서양 여행자들은 '모래 속의 폼페이'로 묘사했다. 20세기 초엽 무함마드 빈 사우드 모스크가 기존 위치의 남쪽에 복원된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 투라이프 근처에 새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1980년대 들어 유적 복원이 본격화되었다.
2010년대 들어 비전 2030의 관광 산업 중시 경향에 따라 디리야의 앗 투라이프 유적지는 대대적인 정비를 거치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로 급부상 하고 있다. 2017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20조 이상을 투자해 디리야 주변에 고급 빌라, 타운하우스, 커뮤니티센터, 병원, 쇼핑센터를 건설하는 디리야 게이트 사업에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 네옴 시티 다음 가는 대규모 사업으로 여겨지며, 백여 대의 크레인이 줄지어 공사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023년 10월에는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디리야를 방문해다. 디리야 개발과 연계하여 와디 하니파에도 10km에 달하는 보행로가 정비되어 2025년 가을에 완공될 예정이다. 2030년 무렵 디리야 게이트 사업이 완료되면 디리야는 리야드를 넘어 사우디아라비아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3. 관광
노을 무렵의 살와 궁전
복원된 디리야의 건물 내부를 걷는 관광객들
밤의 디지털 다큐멘터리
리야드 광역권 내에 있지만 교통편은 좋지 않다. 지하철 레드라인은 국왕 사우드 대학에서 끊기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도 이르카 구역에 가는 것이 대중교통으로는 가장 가깝게 가는 것이다. 이르카에서 현지인에게 수소문.. 해서 와디 하니파 협곡에 놓인 산책로를 따라 7km 가량 걸으면 디리야 유적지에 닿을 수 있지만 더운 날씨에 쉽지 않은 여정이다. 중간에 고위층 저택이나 왕실 궁전도 있어서 외국인으로 보이면 검문도 하는데, 간혹 영어가 잘 안 통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그냥 KAFD (킹 압둘라 금융지구)까지 지하철로 간 후에 택시를 타는 편이 그나마 저렴한 편이다. 다만 5만원 (140 리얄) 이상 부르면 흥정을 시도해 볼 것..
일단 관광 단지로 꾸며둔 입구에 도착하면 안내원들이
[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4] 투마마는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 무함마드 사후 알 야마마에서 선지자를 칭하며 거병한 무사일라마와 싸운다[5] 미샤리에 의해 리야드 총독으로 봉해졌던 투르키는 간신히 탈출해 저항을 이어갔고, 무함마드의 아들 미샤리가 리야드 총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