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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어 | הוֹרְדוֹס | |
| 고전 그리스어 | Ἡρῴδης | |
| 한국어 | 공동번역 성서 | 헤로데 |
| 가톨릭 | ||
| 개신교 | 헤롯 | |
1. 개요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진 고대 로마의 속국이다. 에돔 혈통의 왕가가 다스렸다.참고로 쉬운 이해를 위해 설명하자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존재한 국가는 이스라엘로서, 에돔족속의 선조인 에사오의 동생인 야곱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로마의 속국이 되면서 로마에서 기존의 이스라엘 왕조가 아닌 에돔 혈통의 헤롯 가문을 일종의 바지사장으로 세웠다고 할 수 있다.
2. 이름
신약 성경이나 역사 기록에 남은 '헤로데'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Ἡρῴδης(헤로데스)', 히브리어로는 'הוֹרְדוֹס(호르도스)'이다. 가문명을 비롯하여 인명에도 사용된다.헤롯왕이라 하면 보통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나라의 아기들을 학살한 헤로데 대왕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대가 이어진 동명의 임금이 많다. 성경에서만 따져도 무려 4명, 실제로는 7명이라서 착각하기 쉽다. 그나마 성경에서는 구분한다.
영어로는 'Herod'. 뜻은 '영웅의 아들'로서 'Hero'(히어로)와 어원이 같다.
3. 역사
3.1. 헤로데 대왕(헤로데 1세)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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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헤로데 대왕#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헤로데 대왕#|]]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헤로데가 권자에 올랐을 때 그에게는 다양한 정적이 있었다. 백성은 로마인들의 후광으로 권력을 얻은 이두매아 출신의 '반半 유다인'인 그가 못내 의심스러웠다. 귀족들도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 헤로데는 탁월한 통치자였지만 독재자로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그의 가정사는 비극적이었다.
John J. Collins, John P. Meier, Carolyn Osiek《21세기 제롬 성경 주해 03: 역사적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The Jerome Biblical Cmmentar for the Twenty-First Century: Judaism in the Time of Jesus, The Historical Jesus and Early Christianity in Context(2022), 송혜경 번역, 성서와함께, 2025, pp.51-54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 때문에 유다인들이 헤로데를 좋아한다는 오해가 인터넷에 퍼져있으나, 이건 당대의 인식과 현대의 인식을 뒤섞은 해석이다. 헤로데가 당대 유다인들에게 미움 받았던 군주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베들레헴 유아 학살에 대한 역사적 진위 여부를 논외로 하더라도, 헤로데가 매우 잔혹한 군주였다는 것은 성경과 성경 외 문헌에서 교차검증이 되며, 사제 가문 및 열혈당원들과의 대립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헤로데가 어떻게 취급 받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대 유다인들에게, 헤로데는 유다인조차 아닌 에돔(이두매아) 출신의 비정통 이방인 군주에 불과했다.[1]John J. Collins, John P. Meier, Carolyn Osiek《21세기 제롬 성경 주해 03: 역사적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The Jerome Biblical Cmmentar for the Twenty-First Century: Judaism in the Time of Jesus, The Historical Jesus and Early Christianity in Context(2022), 송혜경 번역, 성서와함께, 2025, pp.51-54
특히나 이런 혈통적 약점에 더하여, 하스몬 왕조 출신이 아니라는 미약한 정치적 정통성은 헤로데의 인기를 저하시켰다. 헤로데 역시도 이런 정통성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히르카노스 2세의 외손녀인(따라서 하스몬 가문 출신인) 마리암네Mariamne 1세와 결혼하여 정통성과 법적 명분을 보강했으나, 결과적으로 장모(이자 히르카노스 2세의 딸)인 알렉산드라를 처형하고, 마리암네가 낳아준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를 처형하고, 처남(이자 하스몬 가문 출신 대사제) 아리스토불로스를 암살하고, 아내(이자 헤로데의 왕위 명분) 마리암네 1세를 처형함으로써 헤로데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약화시켜버렸다. 이는 자기 통치의 명분을 스스로 날려버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대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점에서[2] 심각한 반감을 초래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다음 평가에서 볼 수 있듯 당대의 정치권 기준으로도 헤로데는 지나치게 도덕덕 흠결이 있었다.
이는 헤로데가 부인과 아들들을 비롯한 가족들을 처형하자 옥타비아누스가 한 말이다. 가족마저 잔혹하게 처형하지만, 백성에게는 신실한 유다교 신자임을 어필해야 했던(따라서 그의 돼지라면 목숨만은 안전하던) 헤로데를 비꼬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낮은 인기는 다시 정통성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왔다.[4]
동시대 유다인 당사자들이 남긴 사료에서는 일관적으로 헤로데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며 신약 성경 뿐 아니라 요세푸스 역시도 헤로데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일관적으로 묘사한다.
가령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에서는 헤로데의 죽음에 대한 일화가 등장한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장례 시 조문 행렬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이들를 감금하고 자신이 죽을 때 같이 사형시켜서 온 유다 전체가 애도하도록 계획했다는 것이다.(《유다 고대사》17.6.6.) 또한 헤로데가 죽자 그에게 억눌려있던 유다 곳곳에서 반란과 시위가 일어났다고 요세푸스는 언급한다.(《유다 전쟁사》2.56.-65.) 당연히 이는 마태오 복음서의 유아 학살 이야기처럼 그 역사학적 신빙성에는 비평이 필요하다. 그러나 헤로데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와는 별개로, 동시대 유다인들의 기록에서 그가 일관적으로 부정적으로 언급된다는 건 분명하다.
물론 '동시대 유다인'이 아닌 2천년 후의 오늘날의 평가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에돔 출신이라는 혈통적 문제, 왕위의 비정통성 같은 건 현대인에게는 사실 아무래도 좋은 문제이고, 잔혹성은 별로 와닿지 않는 문제이며, 그보다는 국익을 증진하고 토목 인프라를 건설하는 노회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당대 유다인들의 평가와 정통성이야 어떻든, 헤로데는 일단 신민들을 경제적으로 풍유롭게 했으며 자기 시대만큼은 로마의 직접 통치로부터 국가를 보전하였다. 헤로데가 신민으로부터 받았던 증오와 그럼에도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을 짧게 요약하면 결국 이렇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의 왕, 종교적 유다교인, 그러나 종족상 이두매아인인 헤로데는 양면적인 문화 정책을 취했다. ... 그는 일련의 로마 정치인들로부터 존중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에게 증오를 받았으나, 유다인들을 번영하게 했고 로마의 직접 지배를 막았다.[5]
S. G. F. Brandon, Religion in Ancient History: Studies in Ideas, Men and Events, New York: Scribner, 1969, pp.219-222.
S. G. F. Brandon, Religion in Ancient History: Studies in Ideas, Men and Events, New York: Scribner, 1969, pp.219-222.
3.2. 헤로데 사두정치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은 적자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고, 그의 영토는 아들(서자) 셋과 여동생에게 분할된다. 하지만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받은 게 아니었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아우구스투스가 이들의 왕의 지위를 인정하나 통치권을 박탈한다.| | | ||
| 헤로데 사두정치 | |||
|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 ||
| 헤로데 안티파스 | 헤로데 안티파스 | ||
| 헤로데 필립보 2세 | 헤로데 필립보 2세 | ||
| 살로메 1세 | 데카폴리스 | ||
|| 헤로데 아르켈라오스(Ἀρχέλαος) ||사실상의 적자. 유대·사마리아·이두메아 상속. ||
| 헤로데 안티파스 | 아르켈라오스의 동복 동생. 갈릴래아·페레아 상속. |
| 헤로데 필립보 2세 | 아르켈라오스의 이복 동생. 이투레아(골란 고원과 바타네아)·트라코니티스 상속. |
| 살로메 1세 | 헤로데 대왕의 여동생. 얌니아 등 상속. |
헤로데 아르켈라오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메아를 아우르는 가장 넓은 땅을 물려받았으나 강압통치 때문에 기원후 6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폐위되어 갈리아에서 죽었다. 그의 영토는 사마리아와 이두메아를 포함하여 그대로 로마 제국의 유다이아 속주가 된다.
헤로데 대왕의 다섯째 부인(측실) 클레오파트라 소생인 헤로데 필립보 2세는 바타네아 등을 물려받는다. 34년 헤로데 필립보 2세는 자식 없이 죽어 대가 끊기게 되고, 바타네아는 시리아 속주에 편입된다. 그러다가 37년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바타네아 왕위에 오른다.
갈릴래아와 페레아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다가 39년 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폐위당한 뒤 그의 조카이자 바타네아의 왕인 아그리파스 1세의 손에 들어간다. 41년 아그리파스 1세가 유대 왕위에 오르면서 유다이아 속주는 그의 치하에 자치권을 누렸는데, 44년 그의 사망 이후 유다이아 속주가 다시 로마 제국의 직할령이 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갈릴래아와 페레아가 유다이아 속주에 편입된다.
3.3.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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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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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헤로데 왕조/역대 국왕#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헤로데 왕조/역대 국왕#|]]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 에돔(이두매아)과 유다인의 종교적 차이는 하스몬 왕조의 동화 정책으로 상당히 희석되었으나 종족적으로는 상호 구별이 되었고, 이는 이두매아인 뿐만 아니라 유다교로 개종한 다른 이방인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1세기 교회에서 '이방인' 계열 신자 다수는 이전에 유다교로 개종하여 종교적으론 이미 유다인에 동화된 집단 출신이지만, 초대 교회는 악의 없는 맥락에서도 이들을 '이방인', '희랍인' 등으로 부르며 '유다인'과 구별했다.) 그래서 '이두매아인'이라는 꼬리표는 헤로데를 평생 따라다니는 정치적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였다.[2] 아무리 권력 앞에선 가족도 없다지만, 장모, 아내, 아들, 처남을 살해하는 경우는 고대 기준으로도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헤로데는 왕가의 사위 자격으로 통치한 왕이다.[3] 마크로비우스Macrobius,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2.4.1.[4] 인기와 정통성이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희랍 정치학에서 '대중적 인기'는 민주정의 요소가 아니라 왕정의 요소였고, 헬레니즘화된 이스라엘 역시도 왕과 대사제의 대중적 인기는 그 자체로 정통성의 요인이었다. 가령 하스몬 가문의 시몬 마카베오는 대사제로 즉위할 때 대사제의 권한을 백성과 사제들이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확인 받고 동의 받는 절차를 따랐다.(1마카 14,41-49) 하스몬 군주가 왕과 대사제를 겸한다는 파격적인 행보가 가능했던 것도 대중의 지지가 정통성을 뒷받침하던 헬레니즘의 영향이다. "하스몬 왕조는 유다 통치 권력의 주체로 부상하게 되면서, 차독 가문이 아닌 자신들의 가문에서 대사제직을 수행하는 과감한 일탈을 시도하는데, 사실 이러한 사태는 다분히 헬레니즘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그리스적 정치 관행에 따르면, 공식적인 축제의 자리에서 민중(demos)에 의해 고위 관직이 임명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김혜윤, 《신구약 중간 시기》, 바오로딸, 2025, p.219.[5] King of the Jews and a Jew by religion, yet an Idumaean by race, Herod pursued what appears to be an ambivalent cultural policy. ...... He won and held the respect of a series of Roman statesmen, and, despite the hatred of the Jews, he made them prosperous and preserved them while he lived from direct subjugation to 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