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립 배경2. 초기3. 전성기: 고전기(1453 ~ 1566)
3.1. 메흐메트 2세(1451 ~ 1481):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과 제국으로서3.2. 중앙 집권화3.3. 셀림 1세(1512 ~ 1520): 맘루크 왕조 정복3.4. 쉴레이만 1세(1520 ~ 1566)3.5. 문화적 전성기
4. 제국의 딜레마5. 쇠퇴 이유6. 마흐무트 2세의 개혁, 18087. 영토 상실8. '유럽의 환자'8.1. 동유럽 영향력 상실: 크림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9. 멸망과 새로운 시작[clearfix]
1. 성립 배경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를 사로잡고 그 군세를 대파한[1] 알프 아르슬란 이후 셀주크 제국 본가에서 떨어져 나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세력을 규합하며 소아시아를 호령하던 룸 술탄국은 십자군 전쟁을 맞은 이후로 심심하면 형제간 반목질과 반란으로 비실대면서 마누일 1세 콤니노스 황제 이후 덩달아 비실대던 동로마 제국과 함께 아웅다웅하고 있었는데, 1243년 몽골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룸 술탄국을 조공국으로 만들어버리고 50여 년에 걸쳐 역사의 장에서 내려올 동안[2] 룸 술탄국은 분열을 거듭한다.
2. 초기
2.1. 건국과 확장(1299 ~ 1362)
룸 셀주크가 분열되면서 튀르크멘 영주(Bey)들이 아나톨리아에 할거하여 여러 아나톨리아 베이국이 세워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오스만이었는데,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어로 작성된 최초의 연대기인 《오스만 가문의 역사(Tevârîḫ-i Âl-i ʿOs̱man, تواريخ آل عثمان)》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샤로, 원래 이란 서부와 중앙아시아 방면의 튀르크멘(오우즈)[3] 유목민의 수장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5만 호의 튀르크멘과 타타르인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로 도망가 룸 셀주크에 귀부했다. 그는 몽골제국의 침략이 좀 잦아든 뒤에는 돌아가려 했으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다 익사해버렸고[4] 그 후 그의 아들인 에르투으룰은 그대로 정착하여 룸 술탄 측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해 공을 인정받아 아나톨리아 중부의 카라자다으(Karacadağ)라는 산지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되었다.[5] 신생국가 오스만 베이국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에르투으룰은 봉지를 쇠위트(Söğüt)로 이전당했다.그의 아들이 바로 오스만 베이국의 건국자로 여겨지는 오스만 1세(재위기간: 1299년 ~ 1326년)이며, 그는 룸 셀주크로부터 독립을 꾀했고, 당시 아나톨리아 북서부 지역에 남아있던 동로마 세력을 격파했다. 2대 술탄 오르한 가지(재위기간: 1326 ~ 1362)는 1324년,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의 주요 도시중 하나였던 부르사를 점령하여 새로운 오스만 베이국의 본거지로 삼았다. 부르사는 오스만이 처음으로 점령한 동로마의 주요 도시로, 부르사의 함락은 곧 동로마령 아나톨리아의 붕괴를 의미했다. 부르사의 함락 이후에도 니코메디아와 니케아 등 요새화된 대도시들이 남아있었으나, 니코메디아가 1341년에 함락되면서 동로마의 아나톨리아에서의 세력은 사실상 일소되었다.[6]
당시 오스만 수장들은 가잔 한(غازان خان, Ghāzān Khān)과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한(ابو سعيد بهادر خان, Abū Sa`īd Bahādur Khān) 명의의 화폐를 주조하고 훌라구 가문에게 공납을 바치는 속국이었으나 1335년 아부 사이드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일 한국이 분열되는 틈을 타 발칸반도에 진출하여 그 위용을 떨치고 일백 년 후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을 기반을 닦았다.
참고로, 오르한 가지가 재위를 시작한 지 5년 후인 1330년에는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 왕국을 포사다 전투에서 이기며 독립해 왈라키아 공국을 세웠고, 6년 후인 1331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에서는 이반 알렉산더르가 제국의 제2의 중흥을 시작하게된다. 1331년의 세르비아 왕국에서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주변 3국 또한 전성기를 맞이하며 힘을 키우게 된다.
1330년 여러 베이들의 영토로 분열된 아나톨리아. 북서쪽 마르마라 해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가 오스만의 영역이었다.
2.2. 파죽지세: 1차 전성기(14세기)
이후 오스만 술탄국[7]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베이국들을 복속시켜가며 소아시아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에, 팔레올로고스 내전으로 동로마 제국이 완전히 몰락해가는 틈을 타 유럽에 진출하여 동로마 제국을 속국화하였다.2.2.1. 당시 주변국들의 상황
당시 동로마 제국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황제들이 무능했거나 폭군이었다기보다, 일이 제대로 꼬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우선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함락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은 팔레올로고스 왕가의 초대 황제 미하일 8세는 수도를 복구하고 제국의 국방을 위해 국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그 뒤를 이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국방력을 희생하더라도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스만 베이국을 비롯한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다. 사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는 유럽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알짜 영토는 바로 아나톨리아 반도였다. 결국, 이후 동로마 제국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뭘 하고 싶어도 병사와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동로마 제국은 그 이후인 안드로니코스 3세 때조차 튀르크의 침공으로 아시아 영토를 잃을지언정 그럭저럭 싸우기도 했고, 그리스 쪽 영토를 수복하기도 했으나 그의 죽음 이후 어린 나이의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하자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진 섭정,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를 불신하던 황후, 대주교, 그리고 그 수하였다가 배신한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코스'가 섭정이 수도를 비우자[8] 그를 반역자로 선포, 내전에 돌입한다.
이 팔레올로고스 내전(1341 ~ 1354)은 세르비아와 교황과 튀르크 용병(이때 오스만의 술탄 오르한도 칸타쿠제노스 편에 참여했다)들이 모두 참여하면서 오랜기간 지속되었고, 또 이 기간에 악명높은 중세 흑사병까지 덮쳐 동로마는 개판이 되어버린다. 그 와중에 1354년 대지진이 아나톨리아와 유럽을 잇는 천혜의 요새인 칼리폴리스 요새를 강타했고 손 안 들이고 칼리폴리스를 차지한 오스만은 처음으로 발칸 반도에 발을 내딛는다. 동로마 제국은 칼리폴리스 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스만 측은 당연히 묵살했고, 이후 14세기 동안 오스만은 발칸 남부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또한 바로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혼란을 틈 타 그리스 북부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유일하게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술탄국을 막아낼 능력을 지녔던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마저 그의 제국을 안정화시키기 전에 급사(1355)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스테판 5세는 아버지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후계자를 가지지 못하고 죽었기에 세르비아 제국은 순식간에 사분오열되어 몰락하게 된다. 또다른 세력인 불가리아 제2제국 역시 세르비아 제국과 비슷하게 제위 계승 문제로 3개로 쪼개지는 바람에 오스만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멸망한다.
2.2.2. 코소보 전투와 발칸 & 아나톨리아 반도 장악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은 오스만은 1389년의 1차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공국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 1329~1389)'를 전사시키고[9], 세르비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393, 1395, 1396년에는 각각 3개로 나뉘어져있던 불가리아 제2제국의 잔해들을 모두 병탄하는 위엄을 떨치며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하지만, 왈라키아 지방으로의 진출은 실패하는데, 이는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였던 미르체아 1세가 '카라노바사 전투(1394)'와 '로비네 전투(1394)' 등에서 승리하면서 바예지트 1세의 튀르크군을 철퇴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왈라키아 군 역시 상당한 타격을 입어 전투 후,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 왕국으로 도피(1395)하게 된다.
한편, 오스만의 세력이 나날이 강해져만가자 오스만을 막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이 헝가리 왕국의 왕, 지기스문트의 주도로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결성하였으나,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트 1세는 1396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대패시키는 위엄을 보였다. 이 시기를 오스만의 1차 전성기로 본다. 이시기 오스만의 영토는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북부에 이르게 되었다.
바예지트 1세의 별명이 이을드름(Yıldırım), 튀르키예어로 뇌제(雷帝)였는데, '뇌제'라는 말은 지휘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2.3. 위기와 내전(15세기 초)
2.3.1. 티무르와 앙카라 전투 (1402)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제패한 바예지트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는 등 역사책에 기술될 내용을 약간 더 앞당기는 듯 싶었으나 동쪽에서 갑자기 티무르라는 인물이 나타나 칭기즈 칸 가문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후 아나톨리아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만 술탄국은 아나톨리아 지방에 할거하던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을 병합하였는데, 이로 인해 쫓겨난 군주들이 티무르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때다 싶었던 티무르가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니코폴리스 전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싸움에는 자신 있었던 당대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트 1세는 티무르와의 전쟁을 위해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제패한 대군을 직접 이끌고 출병했지만, 앙카라 전투에서 완패하여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히고 만다.
2.3.2. 내전기간: 1402 ~ 1413
- 둘째 아들 쉴레이만 첼레비, 셋째 아들 이사 첼레비 vs 넷째 아들 메흐메트 첼레비
술탄은 굴욕을 이기지 못해 자살(또는 병사)하고 오스만은 바예지트의 네 아들 사이의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또한, 이전까지 정복했던 튀르크계 소국들도 티무르에 의해 모조리 독립을 되찾았으며, 동로마 제국을 포함한 유럽의 신하국들도 상딩수가 독립하였다. 이로인해 오스만은 약 십여 년간의 암울한 전간기를 맞으며 혼란에 빠진다. 이른바 오스만 공위시대.
바예지트 1세의 장남은 1400년에 요절했으므로 사실상 둘째 쉴레이만이 전투 당시 수도 에디르네에서 루멜리아, 즉 유럽을 관정하고 있었다. 셋째 이사는 부르사, 넷째 메흐메트는 아마시아를 맡아 각각 아나톨리아를 통치했다. 바예지트 1세가 죽기 전까지 세형제는 나름대로 협력하며 오스만을 통치하였다.
그러던 1403년, 바예지트는 티무르 진영에서 죽었고 티무르는 메흐메트를 술탄으로 지목했다. 그러자 사실상 장남이던 쉴레이만과 동생 이사가 반발하며 내전이 발발하였다. 먼저 1403년에 이사와 메흐메트가 싸웠는데 후자가 승리하여 부르사에 입성하였고, 이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재차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카라만 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그는 목욕 중에 메흐메트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된다. (1406년)
* 쉴레이만 vs 메흐메트·무사
- 무사 vs 메흐메트
2.4. 빠른 회복: 1413 ~ 1451
술탄으로 즉위한 메흐메트 1세는 제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모두 주살하고 아나톨리아와 유럽의 영토를 어느 정도 규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럽의 신하국들에게 다소 지나친 요구를 하며 오스만의 위엄을 과시했던 바예지트와는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며 신하국으로서 붙잡아두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티무르 제국을 의식하여 대체로 현상 유지 정책을 폈다. 또한 메흐메트 1세는 그의 치세에 일어난 많은 반란을 진압했고, 이후 무라트 2세때의 재확장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왈라키아를 굴복시켜 발칸 반도의 신하국들을 오스만 술탄국의 지배하에 붙잡아 두었다. 이후 무라트 2세 때인 1421~1422년에 들어서 아나톨리아 남서쪽의 여러 소국들을 재병합했고, 1428년에는 한때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였던 카라만까지 합병했다.2.4.1. 바르나 전투
한편, 1402년 오스만 술탄국이 앙카라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의 몰락에 안심하며 오스만이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강성해지는 것을 방치해왔다.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국이 다시금 강성해지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왔고, 오스만 술탄국이 또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자 유럽 각국에 구원 요청을 급박하게 보내왔고, 마침내 1444년, 동유럽의 각국들이 대규모 십자군을 편성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바르나 전투에서 무라트 2세에게 궤멸되었고,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도 오스만 술탄국이 승리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사실상 확정나게 되었고, 오스만 술탄국은 다시금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3. 전성기: 고전기(1453 ~ 1566)
3.1. 메흐메트 2세(1451 ~ 1481):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과 제국으로서
자세한 내용은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메흐메트 2세 초상화.)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묘사한 그림.)
1451년 술탄의 자리에 오른 메흐메트 2세(20세)가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 오스만은 변경 공국에서 제국으로 신분이 급상승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은 뒤 스스로를 '로마 황제(Kayser-i Rum)'라 칭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기존의 기독교 성당 등을 모스크로 개조하는 등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서 도시를 개조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1453) 이후의 정복 사업은 아래와 같다.
3.1.1. 메흐메트 2세와 그후
- 1458년 라구사 공화국(속국)
- 1459년 세르비아 공국
- 1460년 모레아
- 1461년 잔다르 베이국과 트라페준타 제국
- 1462년 왈라키아 공국[10](속국)
- 1462년 보스니아
- 1468년 알바니아
- 1473년 아크 코윤루의 변경
- 1478년 크림 칸국(속국)
- 1479년 이피로스 지역
- 1479년 에비아
- 1484년 몰다비아 공국(속국)
- 1501년 두라초
- 1503년 베네치아의 모레아 거점인 모돈과 코론
- 1504년 몰다비아 합병
- 1517년 맘루크 왕조
3.2. 중앙 집권화
1300년부터 1453년 즈음까지 오스만 지도층은 이슬람의 세력을 확장하고 방어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기는 가지(Gazi)[11]들과, 성직자, 학자 등 지식인 계층인 일미예(İlmiye)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튀르크계였는데, 동쪽에서 몽골이 맹위를 떨치자 서쪽으로 피신하던 중 나름 훌륭한 지휘관인 데다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오스만에게 주목하게 된 것. 즉 일종의 귀족계급이라고 보면 된다.이후 그들은 오스만의 개국공신 세력으로서 군사와 행정 양쪽에 걸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지만, 그로 인해 술탄은 전제 군주라기보다 가지와 일미예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때때로 타협을 하는 등 제1인자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술탄들의 노력 결실이, 바로 예니체리와 예니체리 징집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다. 즉 군사적으로 '새로운 피'를 수혈하려고 시도했으며, 그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되자 데브시르메로 관료 예비군도 징집하기 시작한 것. 이후 데브시르메 징집자들은 술탄 메흐메트 2세 치하에 이르러 일종의 여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일종의 왕권 강화 방법(중앙집권화)이었던 것.
여기서 데브시르메란 예니체리 양성 제도를 뜻하지만, 비단 예니체리뿐만이 아니라 기술자나 예술가, 종교인, 정치가 등도 양성했다. 징집한 소년들의 자질을 검사한 뒤, 군인 체질이다 싶으면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이라는 과정을 이수시켜 예니체리로 만들고, 군인으로 만들어도 좋지만 그러기에는 영특함이 아깝다고 생각될 경우 이츠 오을란(İç oğlan) 과정을 가르쳐 관료로 만들었다. 또한 예니체리로 만든 뒤에도 건축이나 기타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재능을 보일 경우 그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리하면, '데브시르메=예니체리 징집제도'가 아니라는 말.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 집권화를 확립'이라는 말도, 사실 '예니체리'가 아니라 '데브시르메 출신자'로 바꾸어야 옳다.
14세기 초부터 술탄은 그저 거의 동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튀르크멘 지배자라기보다는 절대적 군주라는 논리가 진화하기 시작하였고, 고위 관료와 야전군사령관들은 이에 치열하게 논박했다. 이 관계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으로 극적으로 변한다. 이 정복으로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된 메흐메트 2세는 가끔 독립적인 행보를 했던 거물급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았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직후 재상이자 튀르크멘 명문 출신인 할릴 파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 후임 재상으로 데브시르메 출신인 자아노스 파샤를 임명했다. 이로써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하락,[12]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집권화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이런 흐름은 데브시르메 출신자들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메흐메트 2세는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술탄은 이론적이긴 하나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고, 신료들에 대해 생살여탈권마저 가지고 있었다.
3.3. 셀림 1세(1512 ~ 1520): 맘루크 왕조 정복
(셀림 1세(1512 ~ 1520) 초상화.)
1514년 셀림 1세는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 제국을 격파하고 유프라테스 너머로 진출하며 1517년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의 영토였던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를 비롯한 히자즈 지역을 손에 넣었고, 아랍권으로의 진출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인 알 무타와킬 3세가 칼리파 칭호를 셀림 1세에게 양도하면서 이후 오스만의 군주들은 칼리파를 겸하게 되어 수니파 이슬람권의 종주국 노릇을 하게 된다.
3.4. 쉴레이만 1세(1520 ~ 1566)
맘루크 왕조 정복 이후의 정복 사업은 아래와 같다.- 1522년 로도스 섬
- 1526년 동헝가리 왕국[13](속국)
- 1536년 이라크
- 1538년 예멘
- 1549년 반과 1551년 리비아
- 1555년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 1556년 알제리 일대
- 1566년 키클라데스 제도
쉴레이만 1세 사후
- 이 시기 제국의 위상
쉴레이만 1세의 긴 재위 기간(1520 ~ 1566)이 끝날 무렵, 제국의 영토는 3대륙에 걸쳐 227만 3720 km²에 달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부터 1566년 쉴레이만 1세 사망 시까지의 시기를 고전기(Klasik Çağ)라고 하며 이 시기의 제국은 한번 떴다 하면 모든 국가를 긴장 태웠을 정도의 막강한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3.4.1. 미친 듯한 영토 확장
15-17세기 유럽, 이란 방면 팽창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악마의 가호를 받는 무적의 군대 정도로 취급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15, 16, 17세기 오스만 제국을 보면 불가리아 제2제국(1389), 세르비아 공국(1459), 보스니아 왕국(1462), 왈라키아 공국(1462), 몰다비아 공국(1484) 등을 철근처럼 씹어먹으며 땅을 넓혀나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렇듯 미친 듯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3.4.1.1. 영토 확장의 이유 1: 군공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목민 국가로 시작하여 군주의 군사적 능력과 업적이 곧 군주의 정치 생명과 통치력으로 직결되었던 오스만 제국의 특성 때문이었다. 시조 에르투으룰 이래로 오스만의 군주들은 어떻게든 군공을 쌓아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 유목 귀족과 전사들에게 전리품과 토지를 하사해 지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과 유럽 방면으로의 영토 확장은 스스로를 이교도와 불신자들을 무찌르고 이슬람의 깃발을 유럽에 꽂는 성전사이자, 신앙심 깊은 군주로 선전할 수 있었고 이슬람 성전사(Ghazi)들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오스만의 군주들은 즉위하는대로 군공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다음으로, 각 지방의 총독이나 대총독은 각자 맡은 지방에 주둔하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관까지 겸했다. 즉 지방 행정 단위와 군대 편제가 일치되어 있었고, 그런 만큼 총독이 근무 평가와 승진 여부를 따질 때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공이었다. 이런 탓에 오스만 제국 궁정이나 지방관들 가운데에는 언제나 호전파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16세기 후반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부터는 이들이 아예 중앙 정부의 뜻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군사 원정을 단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3.4.1.2. 영토 확장의 이유 2: 이교도 정복
또 다른 이유로는, 바로 위에 소개했듯이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 1세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가지(Gazi)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방법의 일환으로 오스만은 가지를 자칭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오르한 역시 가지를 칭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교도를 복속시켜, 이슬람의 땅을 넓힌다'는 것은 마치 오스만 제국의 국시처럼 되어버렸다. 3대 군주인 무라트 1세 때부터는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힌 관계로 가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개국 공신들로 자리를 잡은 가지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과 함께 공신 세력으로 자리 잡은 성직자들도 가지들과 의견을 같이했다.다만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팽창주의는 이전이나 근현대 들어와서 보이는 이슬람 극단주의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오스만조와 아나톨리아 가지들에게 있어 '성전'은 정치적으로 비무슬림들이 다스리고 있는 이교도의 땅을 정벌하여 무슬림들이 다스리는 땅을 넒히자는거지, 비무슬림 자체를 없에고 박멸하자는게 아니다. 오스만 제국 내부적으로도 일괄적인 무슬림 유일주의를 폈다면 당장 제국 내 세입에서 안정까지 작살날 게 뻔한데 이교도들을 단순히 정복이 아니라 무조건 개종, 절멸시키는 발상은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발상이었고, 오히려 16-17세기 들어 아나톨리아 내륙과 동부, 아제르바이잔 등에서 부흥한 시아파 사파비조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는 알레비계열 수피즘의 영향력을 받은 반란군들이 훨씬 더 교조적으로 굴었다.
3.4.2.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다
또한, 제국의 황제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자신을 '로마 황제(카이세리-룸)',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칭하였고 튀르크인들은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가령 16세기 전반에 헝가리 영토를 두고 합스부르크 황가와 조약을 맺을 때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당시 합스부르크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나름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동시에 스페인의 왕이었고 그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황제 대리로서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우위에 서서 체결[14]한 두 번의 조약에서 카를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스페인 국왕'으로만 표기되고, 페르디난트도 '로마의 황제 대리'가 아니라 '독일 왕'으로 표기되었다.서로마와 동로마를 별개의 국가로 생각하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당대의 인식으로 따지든 정치적 · 역사적 정통성으로 따지든 여러모로 봐도 동로마는 로마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제국이 아닌 로마 제국 그 자체였으니 로마 제국을 쓰러뜨린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로마 황제를 자처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주장을 두 가지 근거로 뒷받침했는데, 먼저 로마 제국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를 수도로 하는 제국의 군주라는 것. 그리고 선대 술탄인 오르한이 동로마 황녀와 정략 결혼한 적이 있으므로 동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유럽 입장에서는 무관심한 태도로 나왔지만,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입장에서는 조금 거슬렸던 모양. 이후 쉴레이만 1세 시대에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체결한 조약에서, 쉴레이만은 '황제' 로 표기된 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는 황제 칭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스페인 왕'으로만 표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 황제는 대 유럽용, 술탄 내지는 파디샤는 이슬람 세계 전용 명칭이고, 대내적으로는 튀르크인의 전통적인 군주 칭호인 칸이라고 통칭했다. 아타튀르크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망하자 칸 역시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라이벌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사파비 왕조들도 비슷하게 전근대 다민족, 다종교 제국들은 각기 다른 신민들에게 다른 직함과 명분을 내걸고 통치자로 군림했다.[15] 이러니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부터는 저런 다민족 제국들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해체되어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만 하더라도 자국의 유럽계 신하들과 주변국들에는 이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아랍계가 주도하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아라비아~이집트 일대는 정통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게서 양위 받은 칼리파로서의 권위를, 아나톨리아와 캅카스, 타타르족이 지배하는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에서는 칭기즈 칸을 계승한 카간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했다. 이 중에서도 로마 제국, 특히 동로마 제국의 유산은 종교적 차이를 떠나서 지중해권 전체의 아랍인들과 이집트 등지에도 강렬한 문화적 자취를 남긴 가장 힘이 센 직함에 속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특히 "대제"로까지 칭송받는 쉴레이만 1세의 치세(1520 ~ 1566)는 오스만 제국의 최대 번영기로, 당시 카를 5세 치하의 서유럽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1차 빈 공방전이 있었고, (결국은 물러나긴 했지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16]는 사치와 부의 극을 달렸으며 수많은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3.5. 문화적 전성기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에 비견되기까지 하는 오스만 제국 최대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푸즐리(Fuzûlî), '시인들의 술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키(Bâkî) 등이 모두 쉴레이만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했다. 또한, 쉴레이만 본인도 무히비(Muhibbi, '연인' 이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시를 남겼으며, 제국 각지에 수많은 모스크를 짓는 한편 메카와 예루살렘의 모스크를 수리했다.
1530년대에는 에게 해의 제노바인들과 베네치아인들의 거점이 남김없이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오스만 군대가 이탈리아에까지 상륙했고 로마 함락이 멀지 않은 듯싶었다.
4. 제국의 딜레마
그러나 로마도, 빈도 함락되는 일은 없었고, 쉴레이만 1세의 치세 이후 오스만 제국은 점진적인 정체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새 영토를 얻는 등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강국이었다.4.1. 정체기: 베네치아, 서유럽, 페르시아와의 지속적 전쟁
쉴레이만 1세 사후 베네치아와의 길고 긴 물량전과 레판토 해전(1571)의 패전,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정체기에 들어간다. 베네치아가 수백 년에 걸쳐 영토를 상실하긴 했지만, 당대의 최고 부국답게 국가의 모든 물량을 다 동원해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특히 크레타 섬을 두고 무려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의 휴전도 없이 계속 싸웠다. 17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던 와중에는 십수 년에 불과하긴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집어먹기도 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베네치아도 멸망.4.1.1. 레판토 해전(1571)
레판토 해전에서 패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키프로스 장악이 유럽의 팔을 자른 것에 비할 수 있다면, 우리의 패배는 고작 수염을 자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평했고 실제로 레판토에서 상실한 함대는 겨우 2년 만에 3배의 규모로 재건한 뒤 스페인이 1535년 뺏은 튀니지를 탈환했다. 물론 배는 그렇다 쳐도 경험 많은 수병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으니 전투력은 많이 손실을 보았겠지만 말이다.실제로 레판토 해전으로부터 45년 후인 1616년 7월 14일,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키프로스 섬 인근인 켈리도니아 곶에서 스페인 해군과 오스만 해군이 사흘 간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 이 켈리도니아 곶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은 갤리선 55척과 군인 12,000명이라는 많은 병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약 7분의 1 밖에 안 되는 갈레온 5척과 1,600명의 병력을 가진 스페인 해군에게 33척의 갤리선이 격침 또는 손상당하고 3,200명의 군인들이 사망하는 치욕적인 참패를 겪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당한 경험 많은 고참병과 노련한 선원들의 손실이 이 때까지도 미처 회복되지 못했던 것이다.#
4.1.2. 아나톨리아의 젤랄리 반란(1596~1609)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1596년부터 1609년까지 13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아나돌루(=아나톨리아) 내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크게 곤경을 겪었다. 이 반란은 일명 젤랄리(Celâlîler)라 불리는 집단들이 주도했다. 젤라리스는 군대에서 해고당하자 먹고 살기 위해 지방 마을들을 습격하여 약탈을 일삼는 탈영병 출신들로 구성된 도적들이었는데, 이들의 기세가 뜻밖에도 매우 강해서 토벌에 나선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아들 하산 파샤가 1602년 토카트(Tokat)에서 오히려 역습을 당해 살해당할 정도였다.이런 곤경에 처한 오스만 제국은 젤랄리들의 지도자들을 지방 도시들의 총독이나 지사로 임명하여 그들끼리의 내분을 조장해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지만,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을 정복하러 나섰던 무시무시했던 오스만 제국이 고작 지방의 반란군들도 제대로 이기지 못해 오히려 그들한테 관직을 주며 달랬다는 것에서 제국의 국력이 얼마나 쇠퇴했는지를 짐작케 한다출처.
4.2. 쇠퇴의 시작, 대튀르크 전쟁
특히 1683년 시도한 2차 빈 공방전은 침체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신을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일발 역전시킬 기회였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이 패배를 만회하려고 무스타파 2세가 친정한 젠타 전투는 더 참담했는데 8만의 병력으로 5만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 했건만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3만의 사상자를 냈고 술탄의 하렘 궁녀들, 87문의 대포와 오스만 왕가의 보물, 오스만 제국의 국새까지 빼앗겼다. 무스타파 2세는 겨우 살아 돌아갔다. 반면에 오스트리아군 피해는 고작 500명의 사상자. 그러다 보니 오스트리아도 놀랐을 정도였다. 이때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은 사부아 공자 외젠. 그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한마디로 상대를 잘못 만난 셈이다. 이 젠타 전투로 인해 이제는 유럽의 군세가 오스만을 능가한다는 것이 드러났고 더 이상의 대유럽 정복전쟁은 불가능해졌다.4.3. 중흥기
17세기 말엽 흔들리던 오스만 제국은 아흐메트 3세의 지도력 하에 한숨을 돌린다. 1711년 프루트 전투에서는 무려 표트르 대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아조프와 몰다비아를 되찾는다. 그리고 1715년에는 베네치아로부터 모레아를 수복하며 1683년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가 참전, 명장인 사부아 공자 외젠의 지휘 하에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북부를 점령해버린다. 이로써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에서 제국은 다뉴브 방어선을 포기하며 발칸 지배력이 불안해진다.4.3.1. 튤립 시대
현실을 자각한 아흐메트 3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포병을 중심으로 군사 장교들을 초청하여 서양식 군대 체계에 입각한 장교들을 양성한다. 비록 예니체리들의 반발로 제한적인 개혁에 그쳤지만, 오스만 제국군은 점진적이나마 질적 향상을 이루어낸다. 한편 예술과 문화에 심취해 있던 아흐메트 3세와 그의 궁정은 튤립을 중심으로 한 평화와 예술의 시대를 구가하며 코스탄티니예에 많은 건물들을 세운다.4.3.2. 1735 ~ 1739, 러시아-튀르크 전쟁
젠타 전투의 패전 이후 오스만은 유럽 정복을 포기하고 영토 유지에만 전념하게 된다. 단, 이 시점까지도 오스만은 유럽 내의 강대국 중 하나였다. 대표적으로 1735년~1739년에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있는데, 이때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아군으로 참전하자, 오스만은 오스트리아를 세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시켜, 과거 잃은 영토(세르비아, 바나트 남부, 보스니아 북부)를 제법 수복할 수 있었다.4.3.3.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 정책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근대화의 흐름에서 뒤쳐지는 동안, 러시아 제국은 18세기부터 서구화된 군사 제도를 도입하며 계속 팽창하였다. 부동항을 얻는 것을 지상 과제로 내세운 러시아는 발트 해로의 진출을 꾀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흑해와 지중해로의 진출을 전격 시도하기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시도가 자신들과 한 판 벌이겠다는 말과도 같았고, 결국 자국의 영토가 짓밟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오스만 역시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러시아는 국력에서 이미 오스만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오스만 제국과 수 차례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벌였으며, 이 중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흑해와 카스피 해, 캅카스 방면의 영토를 상당수 잃었으며, 동유럽 영토들도 유럽과 러시아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켜 죄다 독립하는 바람에 인구와 영토가 크게 약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에게는 항상 어찌 못하고 쩔쩔매는 처지가 되어버린 탓에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한 시대의 강자는 어느샌가 "유럽의 환자"라고까지 불리며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5. 쇠퇴 이유
5.1. 왕권 추락
연이은 정복으로 인해 비대해진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쉴레이만 1세는 사법 제도의 정립과 예니체리의 확대 등 여러 관료주의적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것은 관료제의 비대화를 불러왔다. 또한,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을 도와 개국 공신으로 활약했던 가지 세력은 이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했다.메흐메트 2세 시대부터 쉴레이만 치세 초기까지는 데브시르메 징집자 세력이 여당, 옛 개국 공신 세력이 야당으로서 서로 정치적으로 견제하며 황제에 대한 충성을 경쟁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데브시르메 징집자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두 세력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전제군주로 군림해 온 황제의 입지가 굉장히 애매해지게 된다.
5.1.1. 1534 ~ 1656, 여인들의 왕조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동안 하렘 출신 황후의 정치적 위상이 격상되었다. 본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쉴레이만 대제 이전까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쉴레이만 1세가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였던 휘렘 술탄을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하고 결혼하게 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하렘 출신 황후들이 생겨났다. 쉴레이만 사후 무능한 술탄들이 줄줄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태후들이나 황후가 실질적으로 술탄의 자리에 오르면서 종전의 절대 군주적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술탄들이 무능한 데다 그저 하렘의 후궁들과 향락에 빠져 사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일례로 1주일에 4번 있었던 국무 회의를 쉴레이만 1세 이후의 술탄들은 1번만 참석하거나, 나중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고 재상에게 회의를 주재하며 다 알아서 하라고 했다.황후와 태후들, 거기에 황녀들의 힘[17]이 강해져 이들이 나랏일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휘렘 술탄이 쉴레이만 1세와 결혼식을 하고 황후로 책봉된 1534년부터 투르한 하티제 술탄(Turhan Hatice Sultan)의 권력이 쾨프륄뤼 가문으로 넘어간 1656년까지의 기간을 여인들의 왕조(Kadınlar Saltanatı)(직역하면 "여성들의 지배")라고 부른다.
5.1.2. 경제적 부담 → 인플레이션
이 와중에 스페인령 아메리카발 물가 혁명이 오스만 제국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이미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화된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더는 가중되는 부담을 버틸 수가 없었다. 정복지의 지주 계급으로서 군비의 약 절반 가까이 지탱해 주던 티마를르 시파히들이 감당을 못하고 몰락하자 티마를르 시파히들이 부담하던 군비까지 중앙에서 전부 떠안아야 했다.따라서 끝없이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재정적 출혈은 이제 오스만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다만 대포를 비롯한 화기의 발달로 기병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대신 보병이 대두되기 시작하자,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티마를르 시파히의 수를 줄이고 봉토를 중앙 정부가 몰수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상비군을 갖추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즉 티마를르 시파히가 가지고 있던 봉토가 고스란히 제국 정부로 들어갔더라면 '재정적 출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맞지 않는 말이 되었겠지만, 문제는 예니체리들이 일으켰다. 이 위기는 쉴레이만 1세의 정책으로 막강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이후 경제권까지 넘보기 시작하던 예니체리 계급에게는 세력 확장에게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예니체리들은 떨어진 수입만큼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무력'으로 토지를 강탈하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을 해댔는데, 오스만 제국의 세수는 대부분 이런 농토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특권층인 예니체리들이 토지를 집어먹는 만큼 가뜩이나 좋지 못한 오스만 제국의 재정 위기는 심화하여 통화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585년 오스만 제국은 태후 사피예 술탄과 관료들의 주도로 공용 화폐였던 "악체(Akçe)화"[18]의 평가절하를 결정했다. 1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순은 100%이었던 것이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은 함유율 80%로 떨어졌고, 다시 백 년이 지난 1600년에는 34%로 급락했다. 다시 백년이 지나 1700년이 되면 15%, 또 1800년에는 6%. 더는 버틸 수가 없게 된 오스만 제국은 결국 1687년에 쿠루쉬(Kuruş)를 도입했다. 이 쿠루쉬화는 120악체=40파라=1쿠루쉬의 가치를 가졌으며, 이후 1843년 1월 5일, 100쿠루쉬(=400파라=1200악체)의 가치를 가진 금화인 튀르키예 리라화가 도입될 때까지 법정 최고액 통화였다. 이후 1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은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맛보았고, 쉴레이만 1세 사후 20년 만에 오스만 제국은 차츰 멸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5.1.3. 예니체리의 실권 장악
수치상 급료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악체화의 실질 가치가 폭락하다 보니 실질적으로는 예니체리들의 급료가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이들은 떨어진 수입에 반발해 폭동도 자주 일으키게 되었고, 무력을 뒷바탕으로 상공업 분야에 손아귀를 뻗치기도 했다.예니체리들은 오스만 제국을 일종의 폴란드식 귀족 공화국으로 만들어 술탄을 쥐고 흔들며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개혁 시도를 무력으로 중단시켰던 폴란드의 귀족들처럼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5.2. 불안한 정복지들
한편 쉴레이만 1세가 정복한 영토들의 상황도 모두 시원치 않았다.5.2.1. 페르시아 지역
사파비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획득했던 영토 중 타브리즈를 비롯한 상당한 부분은 결국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그냥 돌려줬다. 군세에서는 오스만이 압도적이지만 페르시아는 찰디란 전투의 패배 이후 전면전으로 나서지 않고 방어 모드에 올인하고 전면전을 피하며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다 보니 보급 능력이 딸리고 서유럽, 러시아와도 전쟁하던 오스만으로서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그나마 획득한 영토도 유지를 못 했고 영토를 되찾으려는 페르시아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 시기의 영향으로 중세 시대의 영광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5.2.2. 동유럽 지역
특히 동유럽 영토는 가혹한 세금과 통치를 일삼는 오스만 제국을 증오하여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켰다. 헝가리는 수탈과 전쟁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풍요로웠던 옥토가 졸지에 황무지로 변해버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넘어오는 약탈자들과 해적들에 의해 피폐해졌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오스만 제국의 재정 악화를 메우기 위한 세금을 가혹할 정도로 높게 매겼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근본주의로 통치한 것은 아니기에 종교가 원인은 아니다. 오스만 제국의 중심 민족인 튀르크인은 애초부터 이슬람과 거리가 먼 세속적인 민족이라서 제국 내의 타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다.5.3. 지중해 무역의 몰락
오스만 제국은 마르마라 해 연안에서 탄생했는데, 이 바다는 공해와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내해로서 역내의 문화적 통일성을 촉진한다는 측면에서 강의 기능을 할 만큼 작으면서도 상당한 규모의 역내 교역을 가능케 할 만큼 컸다. 게다가 마르마라 해는 고립된 위치에 있지 않았다.북동쪽으로는 흑해, 남동쪽으로는 에게 해와 동지중해를 면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탁월한 해상력을 발휘해서 이 세 내해를 모두 지배했다. 유럽 최대의 강인 다뉴브 강 하류는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오스만 제국은 이를 이용해서 유럽 북쪽으로 빈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오스만 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그리고 유럽의 경쟁국들을 모두 합한 것 이상으로, 비옥한 토지와 강과 바다를 쉽게 이용할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무역도 한몫 했다. 최적의 명당자리인 코스탄티니예를 근거지로 삼아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육상과 해상 무역, 그리고 흑해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상과 해상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후추, 생강, 계피, 정향, 육두구, 메이스(mace, 육두구 껍질을 말린 향료), 커민, 사프란 등등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크게 호사스러운 품목이 아니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향신료들은 오직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해상 운송은 믿을 만한 수단이 아니었고, 지도조차 없었던 당시에는 아프리카 대륙에 믿을 만한 물길은 없었다. 아시아 지역의 향신료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영토를 가로지르는 방법 뿐이었다.
수백 명의 중간 상인들이 관여하고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으로 향하는 향신료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유럽 상류층은 식량에 소비하는 만큼의 비용을 향신료를 사는 데 쏟아부었다. 오늘날 아랍의 산유국들이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듯이 향신료 교역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부가 이전되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은 지구상에서 최적의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해 있고, 유럽에서 가장 긴 강에 접근 가능했으며, 적당한 규모의 3개의 내해와 접해 있고, 당대의 가장 수익성 높은 교역로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15세기와 16세기에 패권을 장악하려고 애쓰는 동안, 제국 밖에서 일어난 기술 혁명은 인간과 인간이, 나라와 나라가 서로 교류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지리를 이용하는 방식까지도 바꾸고 있었다.
이베리아 국가들은 향신료 무역에서 오스만 제국과 기타 위험들을 피해갈 방법을 찾았고, 그들이 생각해낸 해법은 원양 항해였다.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 항로와 신대륙의 발견이 일어났고, 접근 가능한 영역이 새롭게 확장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건너 서반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조달한 금과 은은 스페인이 서유럽 제국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제국으로 부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구세계에서 천대받았던 땅이 신세계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 반대 현상도 일어났다. 신기술은 마르마라 해를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가장 안전한 지형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변모시켰고, 따라서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나침반과 포문(砲門) 같은 신기술들이 발명되면서 예전에는 죽음을 무릅써야 가능했던 해상 운송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5.4. 군사력 약화
5.4.1. 보병: 예니체리의 군벌화 → 크림 칸국이 대체
한편 예니체리의 엘리트 군사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이 붕괴하고 군벌화가 촉진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하였다. 예니체리들의 전투력 쇠퇴로 생긴 공백은 크림 칸국의 군사력이 대신했다.이 관계는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서 오스만 황제와 크림 칸의 유대 관계가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18세기 말 오스만 황통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계승할 후보로 크림 칸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크림 칸국 항목 참조.
5.4.2. 기병: 시파히의 붕괴
예니체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엘리트 군제의 또 다른 축이었던 티마르 제도와 티마를르 시파히 또한 붕괴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제도들은 정복지의 부족으로 인해 붕괴가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 기병대였던 티마를르 시파히는 티마르 제도를 통해 정복지를 봉토로 하사받았는데, 제국의 팽창이 한계에 이르자 더 이상의 봉토가 나올 리가 없었고 티마르 제도 자체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티마르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던 티마를르 시파히 또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이렇게 오스만 제국 군사력의 양익이 모두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도중 무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진, 거란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군사적 쇠퇴기에 들어가던 북송이 세계 최고의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한 것처럼, 오스만 역시 군사적 쇠퇴기에 들어가던 17, 18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튤립 시대(Lâle Devri)'라 불리는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았다.
6. 마흐무트 2세의 개혁, 1808
1808년에 제위에 오른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사촌형이었던 셀림 3세가 니자므 제디드 개혁을 통해 왕권을 농단하는 예니체리들을 박살 내려다가 도리어 암살당한 것을 잊지 않고 예니체리들을 안심시키면서 민심을 얻고 최신 병기와 새 편제를 도입해 친위대를 양성했다. 뒤늦게 조짐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챈 예니체리들은 술탄을 쫓아내기 위해 평소 밥 먹듯이 하던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흐무트 2세는 몰래 양성한 친위군을 직접 지휘하여 예니체리를 개박살냈다. 이때 유럽에서 들여온 대포 15문의 30분에 걸친 포격에 예니체리 만여 명이 갈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일생 일대이자 전 오스만 가문의 원수였던 예니체리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아직 진통이 남아 있었다.이 무렵의 권력 구조 양상을 보면, 이미 쉴레이만 1세 재위 기간 중 권력은 군주 개인에서 그의 해방 노예, 피후원자라 할 수 있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데브시르메 관료들은 그 이전부터 통제받지 않는 특권 집단으로 자리 잡은 예니체리 계급이나 태후, 황후와 결탁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을 장악했는데, 이는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크림 반도, 남쪽으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알제리, 동쪽으로는 캅카스와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비대해진 제국을 술탄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진 까닭에 영토를 다스리고 유지할 행정 관료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브시르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친히 군사 원정을 벌이거나 통치를 하는 황제는 필요가 없어지고 관료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황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이 시기에 즉위한 황제 가운데 대다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거나 나이가 어려 태후의 섭정이 필요했다. 결국 오스만 2세나 무라트 4세의 경우를 제외하면 19세기의 마흐무트 2세와 압뒬하미트 2세가 통치하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전제 군주로 군림했던 황제는 없었다.
국가의 권력은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재상과 파샤 가문으로 넘어갔다. 술탄의 권력이 있던 곳에는 예니체리 군벌을 등에 업은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 옛 관례들의 자리는 새로운 관례들이 차지했다. 데브시르메에 의한 관료 등용은 지배 계급의 권력 세습으로 대체되었다. "아직은" 코스탄티니예의 중앙 정부가 실제로 통치권을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군주들이 권력을 다지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6.1. 메흐메드 알리의 반란과 이집트의 준독립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방 총독의 권세가 대단히 강력했다.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 한해서지만 군사권과 행정권, 경찰권을 보유했으며, 제국의 중앙 정부가 파견한 법관의 판결만 떨어진다면 법을 집행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다보니 무늬만 중앙 집권이지 실질적으론 봉건제에다 지방 자치나 다름없었다. 특히 황제의 명을 받고 총독으로 내려왔을 터인 이들은 제국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중앙 정부가 파견한 법관을 우습게 보는 것도 모자라 점차 독립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했고, 19세기가 되면 현 튀르키예 국경 밖의 영토는 전부 준 독립화했다. 당대 이집트도 실제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총독 통치 하에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법관을 파견하는 한편 각지의 주요 도시에 예니체리 군단을 주둔시킨 다음 예니체리가 주둔하는 도시는 그 지방을 관할하는 총독이라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코스탄티니예의 예니체리가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등 변질되자 이들도 지방의 마피아 비슷한 조직으로 변화하여, 총독 견제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 틈을 탄 총독들이 힘을 길러 중앙을 무시하고 군벌로 성장한다.이렇게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된 지방들 중 오스만 제국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제국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곳이 이집트였다. 알바니아 출신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는 이집트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서구식 조병창을 건설하고 유럽식 교육을 도입하는 등 기세등등하게 근대화를 진행하는 중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중앙군이 일개 독립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술탄 마흐무트 2세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그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에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메흐메드 알리는 자신의 세력을 키울 기회로 보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 키프로스와 시리아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이를 승락했다.
근대화된 이집트군과 오스만군의 협공에 그리스 독립군은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독립군에게 온정적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개국이 오스만에게 유혈진압을 중단하고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는데 오스만이 이를 거부하자 열강들은 나바리노 해전으로 실력행사를 보여주었고 결국 오스만은 본격적으로 개입한 러시아에게 먼지나게 두드려 맞고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했다. 대가를 바라고 술탄을 도와 참전했는데 전쟁에 지면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자 메흐메드 알리는 이전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약속한 시리아를 요구함과 동시에 중앙 정부를 상대로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술탄은 이를 거부했고 격분한 메흐메드 알리는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군은 연이은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뒤 곧장 코스탄티니예로 향했다. 개혁이 완료되지도 않았고 예니체리가 남긴 상처가 여러 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오스만군은 어처구니없는 졸전을 펼쳤다. 오스만 제국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럽 열강의 도움으로 제위와 팔레스타인 영토는 보존했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으나 시리아를 통째로 무하마드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외교권에 치명타를 주어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을 더욱 깔보게 된다.
분통이 터진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을 가속하면서 메흐메드 알리를 손봐줄 그 날만 기다리고 있었고, 메흐메드 알리가 시리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곧바로 8만 대군으로 시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서구식으로 훈련된 4만여 명의 이집트군의 반격에 의해 또 털렸으며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전 오스만 제국 해군이 메흐메드 알리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마흐무트 2세는 홧병으로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약해졌는가를 전 유럽에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오스만의 연이은 졸전을 보고 황당해진 유럽 열강들은 이집트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영국이 함대를 파견해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침공 위협을 해 보이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후원을 믿은 메흐메드 알리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서야 이집트는 침공을 중단한 후 시리아를 도로 돌려주고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알리는 최초의 목적인 이집트와 수단, 팔레스타인의 세습을 확립했고, 이후 195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왕조를 설립하게 된다.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총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권력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19]
7. 영토 상실
17세기 ~ 1878년 튀니지 상실 전까지 오스만 조의 영토 손실
7.1. 민족주의 열풍
7.1.1. 그리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전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 사상은 오스만 제국에도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남동유럽 지역의 그리스인(아직까지는 그리스인이라기보단 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지만)들은 한때 오스만 제국의 다수 민족을 차지하고 있었고, 비록 즘미라는 이름으로 무슬림보다 못한 처지였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사업과 무역을 통해 부를 이루고,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문들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파나리오테스(Φαναριώτες)라고 불리는 이 가문들은 오늘날 이스탄불의 페네르(Fener, 오늘날에도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동네)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했다.파나리오테스의 발생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탄생한 신흥 부르주아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파나리오테스는 그리스계 또는, 그리스화된 루마니아계나 알바니아계 혈통으로 16세기 후반에 서서히 출현하기 시작해 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남동유럽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점차 부를 축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페네르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 성당 근처에 저택을 짓고 모여 살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에 따라 제국 내 모든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세속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선출에 개입하는 등, 점차 큰 권력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과 서구의 정치, 외교적 교류가 증대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초부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서방 교류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관직인 드라고만(Dragoman)을 세습,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이에 대한 대가로 도나우 공국(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의 대공이 되어 정치적 권력을 키워나갔다.
이로써 18세기 내내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나날이 높아져만 갔으며, 이 시기 그리스인들의 힘을 억압하기 위해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특정 복장의 제한, 말 사용의 제한, 거주지의 제한, 가옥 크기의 제한 등 제약을 가하려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거의 지켜지지 못했다. 당연히 기득권을 획득한 파나리오테스들은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되는 오스만 제국에 충성했으며, 오스만 제국도 서구와의 외교, 협상, 무역을 위해서 이들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호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존은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유입하는 19세기 초에 깨어지기 시작한다.
파나리오테스 가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빨리 서구 문명을 접할 수 있었으며, 거상, 드라고만, 전문 통역사 등으로 관직에 진출한 파나리오테스들은 자식들을 서구식으로 교육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교육에서 고대 그리스 고전, 문학, 법 등을 통해 그리스적 정체성을 굳건히 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 안에서 고대 그리스의 판헬레니즘적 마인드를 갖춘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814년 에데사에서 파나리오테스들이 주축이 되어 성립한 비밀 결사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 필리키 에테리아)는 그리스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꾸려졌으며,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당시 파나리오테스 가문이 통치하던 도나우 공국에서 독립된 그리스 민족의 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스만 제국 또한 이를 알고 있었으며, 민족주의의 위험성 또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에 대해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정교회를 믿는 것은 기존대로 허락하되, 그리스 역사 교육을 금지하고 그리스어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하지만 나날이 늘어가기 시작하는 독립주의자들은 성당을 중심으로 '비밀학교'를 열어 교육을 계속했으며, 그리스인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렇게 해서 1821년 2월 21일 친우회가 주축이 되어 도나우 공국에서 반 오스만 봉기가 일어났다. 이 반란은 곧 오스만 제국에게 제압되었으나, 이에 자극받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인들이 3월 17일 반란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10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θεόδωρος κολοκοτρώνης)가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도시 내의 튀르크인 3만 6천 명을 학살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리스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반란의 불길은 크레타, 마케도니아, 중부 그리스, 에게 해 제도, 키프로스 등으로 이어졌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한 반란은 펠로폰네소스에서의 반란이었으며, 이 와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처형,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의 그리스인의 학살,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의 참전과 영, 프, 러 열강 3개국의 개입, 나바리노 해전, 1828-29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 등이 이어져 1832년 그리스 왕국이 건국되었다.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의 초상.
그리스 독립 전쟁은 이전까지 간혹 그리스인들이 벌여온 반란과 본질에서 배경 및 내용이 달랐다. 이전까지의 그리스인들의 항쟁은 어디까지나 반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명분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은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적인 자긍심과 민족성에 호소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 민족주의를 토대로 그리스인이 왜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해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민족주의 사상을 통해 세웠다는 점이다. 민족주의 이전까지 단순히 로마인(Rumlar, Ρωμαίοι)이라고 불린 - 그나마도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정교회를 믿는 모든 민족을 이렇게 불렀다. -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엘리네스(Έλληνες, Hellenes)라고 부르고 자신들의 민족적 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찾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7.1.2. 보스니아, 알바니아, 루마니아(왈라키아 공국), 불가리아
그리스의 독립 이후 민족주의는 들불처럼 오스만 제국에 번지기 시작했으며, 곧 오스만의 영토였던 남동유럽 지역의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등의 민족들도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며 하나둘 봉기하기 시작했다.특히 루마니아인의 경우 파나리오테스가 다스린 도나우 공국에 속해있으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상류층들은 그리스어로 의사 소통하고 그리스어로 예배를 보는 등, 철저히 그리스화 되어 있었지만 차츰 오늘날의 루마니아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각의 민족 집단들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고대 일리리아, 고대 불가르족, 고대 로마인 등등 스스로 민족사를 이데올로기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등 대규모 재해석, 언어 순화 운동이 펼쳐진다.[20]
7.2. 오스만의 개혁: 탄지마트, 범이슬람주의
한편 오스만 제국에서는 제국 내 민족들의 독립 시도를 저지하고,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그들의 정체성을 일치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839년 탄지마트 개혁은 즘미와 무슬림의 차이를 없애고, 이전까지 무슬림에게만 부과되었던 의무 병역을 즘미에게도 부과하되 즘미에게만 부과되던 종교세를 면제하는 식으로 오스만 제국 내 모든 신민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하지만 즘미들은 군대 가기를 싫어해서 병역 의무의 부과에 대해 "차라리 세금을 내겠다!"며 반발했고, 무슬림들은 무슬림 나름대로 즘미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다. 지즈야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비무슬림인 즘미들에게 부과되는 지즈야는 빈민들에게는 상당한 고액의 세금을 요구했지만 중산층, 부유층에게는 별로 큰 세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즘미들 가운데 빈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빠져나가고, 즘미들 스스로가 계급적으로나 교양적으로나 엘리트화되어갔다. 인구교환과 추방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의 비무슬림 가문들은 여전히 상당한 재력을 자랑하는 나름대로의 엘리트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그동안 내던 세금대신 군대로 가서 몸으로 때우라고 하면 당연히 반발이 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탄지마트 개혁은 이뿐만 아니라 유럽 열강의 간섭, 제국내 반동 세력의 반발 등도 원인이었지만 이로써 실패로 끝나고, 그 대신 나타난 압뒬하미트 2세(II. Abdülhamit)는 탄지마트 시대의 중앙 집권 강화는 유지하되 오스만 제국의 구심력을 칼리파로 대표되는 범이슬람주의로 상정했다. 심지어 제국 내 공용어를 아랍어로 하려 하는 등, 이 시기에는 남동유럽 지역과 중동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을 기독교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개입하려는 부동항 개척을 위한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에 맞서 이슬람을 중심으로 뭉치려 시도했다.
오스만 제국사 전체에 걸쳐 기독교, 소수종교, 알레비파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도 이때의 일이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드라고만에 채용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박해와 이에 맞선 독립 요구도 이 시기에 불거진 문제이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은 갈가리 찢어지기 시작했다.
8. '유럽의 환자'
8.1. 동유럽 영향력 상실: 크림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8.1.1. 1821 ~ 1829, 그리스 독립전쟁
비록 오스만 제국의 중근동 영토의 정세가 일시적으로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반대편 유럽 영토는 1821년부터 1829년 사이에 발발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는 등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8.1.2. 탄지마트 개혁
오스만 제국은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을 통해 근대식의 의회 제도와 헌법을 도입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지만, 국내 보수 세력의 반발과 속셈을 알아차린 열강의 간섭으로 인해 좌절한다.8.1.3. 1853, 크림 전쟁: 승리
1853년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서 발발한 크림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유럽 연합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승리하였으나 제국의 피폐화를 가속시켰다.8.1.4. 1877 ~ 1878, 제2차 동방전쟁: 패배
승리도 부질없이 20년 후 다시 쳐들어온 러시아에게 결국 참패했다.8.1.5. 내부 불만에 대한 가혹한 진압: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렇게 동유럽의 영향력을 잃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형국의 유지를 위하여 범튀르크주의를 제창하고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일으키는 등, 국내의 소수 민족 및 불만 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범이슬람주의도 있었다고 하지만,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아랍인이고 아르메니아인 무슬림 몇십여만명도 가차없이 학살했듯이 되려 범튀르크주의가 범이슬람주의를 덮어버렸다.8.1.6. 여전한 열세
하지만 이럼에도 오스만의 상황은 여전히 유럽과 러시아에게 뒤처져 있었다. 가뜩이나 인구가 1914년 기준 1852만에 불과하여[21] 유럽, 러시아보다 적은 데다 경제 수준도 굉장히 떨어졌다.[22]사실 1830년대부터 시작된 탄지마트 등 여러가지 개혁, 근대화 정책을 통해 의복, 제도 등은 수도 코스탄티니예를 중심으로 진작 서구화 되었다. 지리적으로 서유럽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 이슬람 세력들의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유럽과의 교류, 튤립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 문물들과 서구 문화는 예전부터 소개되고 있었다. 이미 18세기 말에 코스탄티니예에서 오스만 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 열렸다. 멸망하기 직전 서구화에 올인했던 크림 칸국보다는 시기가 다소 늦지만 탄지마트 자체가 양무운동(1860), 메이지 유신(1868)보다 시작이 수십년 앞선 것이다.
이외에도 철도 부설, 서구식 군제 개편과 서유럽산 무기 도입, 무장등 물질적인 근대화의 속도는 빨랐다. 서구 열강들보다는 다소 느리긴 했지만 전근대적인 무장이었을거라는 일부의 편견과는 달리 19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군의 무장 자체는 충실히 근대화되고 있었다. 뒤에 나올 공군은 물론이고 당대에 극소수 국가들만 보유하고 있던 잠수함도 도입할 정도로 군 현대화에 열의를 보였다. 19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군의 문제는 무장의 전근대성보다는 장교진의 전문성 부진, 전술 문제가 컸다.[23]
그러나 산업화가 미진해 경제는 1차 산업인 농업에 여전히 의존하다 보니 다른 산업은 굉장히 낙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많은 비용이 드는 개혁을 무리할 정도로 강행하다 보니 재정 적자가 심할 수밖에 없고 이를 메우려고 국민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 제국의 국민들은 높은 세금에 시달렸다.
9. 멸망과 새로운 시작
9.1. 쿠데타와 제1차 세계 대전
압뒬하미트 2세는 미트하트 헌법을 폐지하고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켜 독재를 하고 있었다. 결국 1908년 청년 튀르크당 장교들의 쿠데타(청년 튀르크 혁명)가 일어났고 압뒬하미트 2세는 헌법과 입헌군주제 부활을 선언, 이듬해 퇴위했다. 동생 메흐메트 5세가 즉위했으나 이미 실권은 쿠데타 세력들의 정당인 통일진보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으로 혼란스러워진 오스만의 상황을 보고 오스만의 영토를 노리는 새로운 세력들이 나타났다.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틈타 명목상 오스만 영토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정식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했으며, 1911년 제국주의 열강 중 후발주자였던 이탈리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령 리비아를 침공해 리비아와 도데카니사 제도를 뜯어가는 일이 벌어졌고, 급기야 1912년에는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한 나라들인 세르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이 발칸 동맹을 체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를 노리고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지배하던 나라들한테 패하는 추태를 보이며 에노스-미디아 선 서쪽의 유럽 영토를 토해내는 굴욕의 정점을 찍었다(...). 그나마 발칸 동맹국들끼리 싸운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의 뒤통수를 치며 에디르네를 위시로 한 동트라키아를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편 발칸 전쟁에서 공을 쌓은 이스마일 엔베르라는 군인이 1913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전쟁부 장관(국방장관)이 되어 술탄을 무력화하고 제국의 실권자로 군림하였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게 접근[24]하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0월 29일 동맹국 측에 참전을 결정한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처럼 참전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론이 친영파와 친독파로 나뉘어 싸우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근대식 해군 양성을 위해 영국에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및 다수의 군함[25] 을 발주해 인수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인수받는 날짜가 딱 1914년 8월이었다) 군함이 필요하단 이유로 대영제국의 해군상 나으리께서 먹튀를 하시는 바람에 여론이 들끓고 말았다. 그럼에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당시 영국 지중해 함대에 쫓겨 코스탄티니예로 피난 와 있던 독일 군함 2척[26]을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오스만에게 무상 양도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만다. 정작 오스만은 무상 양도에 대해 인정한 적도 없고, 양도받은 군함도 장교와 수병 전부 독일인이었다.(사실상 선적만 오스만으로 옮겼던 셈) 이 말만 오스만 소속이지 사실상 독일 제국 소속이던 두 척의 배가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함대를 독단적으로 공격하면서 결국 강제로 참전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27]
여담으로 이때 메흐메트 5세는 이스마일 엔베르의 협박을 받았는지 칼리프로서 지하드를 선포했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상 칼리프가 선포한 최후의 지하드다. 하지만 지하드 선언으로 들고 일어나길 기도했던 영국령 인도 제국의 무슬림들은 영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오히려 이슬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아랍인들이 오스만의 지하드 선언을 거부하며 영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는 등, 뭔가 나사가 여럿 풀린 지하드였다.
참전 이전엔 주변 열강들 평가로나, 자체적인 평가로나 유럽의 환자 취급을 벗어나지 못한 것 치곤 막상 1차대전에 참여하니 오스만 제국은 옛날의 군사대국 시절의 기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건 아닌지 의외로 분전하며 협상국을 엿먹였다. 적어도 열강들 중엔 약체라는 인식은 이미 있었지만 여기 비교해도 너무도 졸전하여 결국 독일에게 짐이 되어 버린 오스트리아에 비하면 오히려 기대치보다 잘 싸운 셈.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야 말할 것도 없고,[28] 쿠트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영국군 중동 원정군을 무려 4개 사단이나 박살내 버려 한동안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로 오스만군이 몰려오는거 아닌가 전전긍긍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오스만 제국 지도부가 주전선으로 생각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 러시아와의 캅카스 전선에서는 극한의 자연환경과 혹한, 그리고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참패를 거듭해[29] 반과 에르주룸, 트라브존 등을 빼앗기며 아나톨리아 본토로 쭉쭉 밀리는 상황이 벌어졌고 오스만 지도부는 이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자국 내 소수민족에게 돌리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아시리아인 대학살을 비롯한 악명높은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를 대거 저지르게 되었다. 겔리볼루,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보여준 감투정신도 무색하게 막상 그나마 남아 있던 국력의 태반은 캅카스 산맥 오지의 엄동설한에 수십만 단위로 꼴아박은 오스만 제국은 그 망하는 과정에서 제국 역사상 전반적인 조류였던 관용적인 국정 기조에 비교하면 등골이 서늘할 만큼의 대량학살을 저지르며 현대까지도 중동의 평화를 가로막는 "우리 종파가 정권 잡지 않으면 무조건 죽음!"이란 살벌한 종파주의적 분열의 큰 씨앗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전범국이란 오명과 함께 세브르 조약에서 실질적인 열강의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며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등 복수심에 불타는 전직 속주 신흥 세력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으로 전락했다.
9.2.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튀르키예의 시작
그리고 이때 일어난 사람이 1차 대전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였다. 그는 본래 술탄 메흐메트 6세의 명으로 아나톨리아 내륙을 장악한 독립 분자들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1919년 삼순으로 파견되었지만, 그곳에서 독립군에 가담하고는 협상국에 항복한 술탄 정부를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같은해 시바스에서 대국민의회(Türkiye Büyük Milli Meclisi, TBMM)[30]를 열고, 군대를 모아 아나톨리아 앙카라를 거점으로 3년에 이르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을 펼친 끝에, 그리스군을 패퇴시킨 후 술탄을 폐위시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우는데 성공했다.그 다음엔 그리스군도 격퇴하였고 협상국과 새로운 협상을 체결,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로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1922년부로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도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앙카라로 이전했다.
9.3. 최후의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의 멸망으로 그나마 뭉쳐 있던 서아시아권의 이슬람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더 이상 뭉치는 일은 없었다.[31] 뭉치더라도 그저 이득에 따라 할 뿐이지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배신하거나 협조도 하지 않으니 제대로 뭉쳐질 리가 없었다.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이슬람권의 분열은 국제 무대에서 이슬람권의 추락을 의미했다. 그나마 아랍연맹과 OPEC, 이슬람 협력기구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 기구들은 그저 이득을 위해서 뭉친 연맹에 불과해서 진정한 연합이 아니다. 당장에 중동전쟁만 봐도 이슬람 국가들의 단합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이슬람권은 지금까지도 서구에 정치, 경제, 기술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특히나 이슬람권은 날이 갈수록 서구권과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으며 열세인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튀르키예에서는 서구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이 굉장히 커서 유럽이 두려워하던 과거 오스만 제국을 동경하는 이들이 많다. 튀르키예 역사학계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많이 띄워주고 있다. 튀르키예 정부도 국가의 자존심을 세울 때 항상 내세우는 것이 오스만 제국이다.
그러나 과거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키예에게 지배받았던 시리아나 이라크,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 예멘, 이집트, 튀니지 같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 국가들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싫어하는데다 오히려 이를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인들의 입지는 되려 기독교를 믿던 그리스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같은 남유럽 민족들보다 더 낮았기 때문이다. 당장에 오스만 제국의 하렘 후궁들만 찾아봐도 대부분이 유럽과 튀르키예 출신이지 아랍 출신은 소수였거나 거의 드물었다.
[1] 사실 여기에는 로마노스 4세에 반대하여 5만 명의 대군 중 2만 명을 수도로 돌려버린 막강한 수도 관료 귀족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공이 지대했다... 이후 로마노스 4세가 어찌어찌해서 풀려나오기는 했는데 황제를 갈아치우다가 사망한다.[2] 당시 룸 술탄국을 지배하던 종주국이던 몽골 제국의 계승 제국 중 하나이던 일칸국의 몽골족들이 룸 술탄국의 최후의 술탄이 죽은 뒤에 후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고 그냥 사라져버렸다. 비록 룸 술탄국에서 술탄이 주도하지는 않더라도 술탄의 이름을 빌려 일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이 잦자, 술탄은 폐위되셨소이다를 계속 시전하느니 차라리 총독을 보내자는 쪽으로 이야기된 것.[3] 구체적으로는 카이(قای, Qay) 씨족에 매여있음을 전하고 있다. 다만 오스만 왕가의 사료의 신빙성을 볼 때 의심을 품는 학자가 많으며, 오스만 왕가가 자신들의 기원을 튀르크멘 씨족에서 찾는다고 해서 오스만 지배층의 정체성은 튀르크멘이나 튀르크가 될 수 없다. 오스만의 지배층은 튀르크를 '무뢰배'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고, 아나톨리아의 튀르크멘 집단들과 자신들을 구분했기 때문이다.[4] 때문에 쉴레이만샤의 무덤은 시리아에 있다. 쉴레이만샤(오스만) 참조.[5] 카라자다으가 앙카라 인근에 있다고 해서 에르투글이 앙카라 도시 자체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카라자다으 산의 지도를 봐도 앙카라 도시에서 꽤 거리가 있다. 앙카라에서는 1290년에 상인 길드인 '아히 형제단'이 공화국을 세워 일 한국에서 반독립을 했다. 오스만국이 앙카라 도시를 차지한 때는 오르한 치하인 1356년이다.[6] 그러나 일부 요새 도시들은 계속해서 동로마의 기치를 휘날리며 항전했는데, 이들은 동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실상 독립 세력이였다. 하지만 이들 도시들도 1390년 필라델피아가 함락되면서 모두 함락되게 된다.[7] 3대 군주인 무라트 1세부터 술탄을 칭했다.[8] 아카이아 공국의 항복을 받으러[9] 세르비아의 입장에선 비록 코소보 전투에서 패했으나 전투의 무대가 된 코소보는 오스만에 맞서 싸운 성지로 여겨졌는데, 전투 이후 오스만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알바니아계 민족이 하나둘 뿌리를 박아 알바니아인들의 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수백 년 후인 1998년 벌어진 코소보 전쟁의 단초가 된다.[10]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보이보드)이었던 인물은 바로 블라드 가시공이다. 메흐메트 2세가 제국에 항거하던 블라드 가시공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가시공의 친동생인 라두를 공작에 임명했던 것이다.[11] 간단히 이야기해서 이슬람 세계의 십자군이라고 보면 된다.[12] 역대 재상 가운데 처형된 건 그가 첫 번째.[13] 1570년부터는 트란실바니아 공국.[14] 헝가리 서부만 떼어주고 중부와 동부는 오스만이 먹은 데다, 서부를 떼어주는 대가로 연공을 요구했다. 물론 합스부르크 측은 말로만 보내주겠다고 했지 제대로 보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스만은 이를 구실로 합스부르크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15] 동아시아에서는 원나라와 청나라가 이랬다. 그러니까 원나라 쿠빌라이의 경우 자국 한족들에게는 원나라 세조였고 몽골인들에게는 세첸 칸이었다. 마찬가지로 홍타이지도 만주족에게는 고신 온초 활랴순 언두링어 한 몽골족에겐 아구다 오루시옝치 나이람다구 복다 칸 한족에겐 청 태종이었다.[16]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오스만 제국 멸망 8년 뒤인 1930년에 무스타파 케말의 명으로 우편법 개혁이 단행되면서 공식화되었고, 쉴레이만 당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랍식 표기인 알 쿠스탄티니야(al-Qusṭanṭīniyya)의 튀르크식 발음인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로 불렸다.[17] 셀림 2세 제위 기간에는 황후도, 태후도 아닌 셀림 2세의 누나 미흐리마흐 술탄이 정치에 개입했다. 태후 역할을 할 휘렘 술탄은 셀림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18] 악체는 오스만 시절의 화폐로 1악체는 은 1.154g으로 만들어졌다. 전근대 화폐들이 다 그렇지만, 은에다 주석이나 아연을 섞는 식이었다.[19] 다만 당시 기록을 보면 이때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 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오는 지역이 남동유럽 다음으로 바로 이집트였다. 그래서 이집트가 완벽하게 독립했을 때는 오스만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20] 다만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과는 해당 사항이 없으니 생략한다.[21] 특히 근 100년간 많은 영토를 상실하면서 있던 인구도 대부분 날려먹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나톨리아 반도는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지역이었다.[22] 1914년 기준으로 영국이나 러시아, 독일에 비하면 국가 총 GDP가 1/10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신흥 열강으로 떠오른 일본과 비교해도 1/3에 불과했다.[23] 파이타흐트: 압뒬하미트 등 제국 말기를 배경으로 한 튀르키예 사극에서 서구화된 제국의 시대상을 볼 수 있다.[24] 참고로 당시 술탄이던 메흐메트 5세는 독일과 손을 잡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으로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25] 이 두 척의 전함이 애진코트와 HMS 에린이다.[26] 몰트케급 순양전함 '괴벤(SMS Goeben)', 경순양함 '브레슬라우(SMS Breslau)' 함[27] 괴벤은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어서도 현역으로 남아 제2차 세계 대전때는 소련 해군이 튀르키예 영해로 오지 못하게 하는 견제역할로 운항했다. 튀르키예가 NATO에 가입한 뒤 프랑스에서 근대화 개장을 했고 무려 1960년대까지 현역(!!!)으로 활동, 최장수 드레드노트급 순양전함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으나 결국 1971년, 스크랩된다.[28] 아이러니한 것은 이 전투를 일으킨 사람이 앞서 오스만 전함 2척을 꿀꺽한 그 처칠이다. 덕분에 처칠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다.[29] 일례로 1914년 12월부터 1915년 1월 사이에 있었던 사리카미스 전투(Sarıkamış Muharebesi)에서 험준한 캅카스의 지형과 혹한의 겨울철 날씨, 거의 없다시피한 오스만군의 보급과 부대 간의 연락 불통, 그리고 엔베르의 무작정 닥돌 전술 고집이라는 환장할 콤보로 오스만은 단 4일 만에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의 80%를 잃는 대패를 당한다.[30] 참고로 오늘날까지도 튀르키예 국회 역할을 맡고 있다.[31] 훗날 아랍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아랍국인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등이 통합을 의논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성사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