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에서 바라본 시가지
트라브존 성채와 수도교 유적
1. 개요
튀르키예어 : Trabzon그리스어 : Τραπεζούντα / Tραπεζοῦς
영어 : Trabzon / Trebizond / Trapezus
라즈어 : ტამტრა
조지아어 : ტრაპიზონი
튀르키예 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 인구는 약 71만 명 가량 된다. 트라브존주의 주도이다. 중세 동로마 제국 계열 국가인 트라페준타 제국의 수도였고, 지금도 튀르키예 동북부 (폰토스)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구도심에는 동로마 시기 성벽과 성당 등의 유적이 있고, 도시 외곽의 수멜라 수도원 역시 유명하다. 튀르키예 내에서는 다혈질적인 보수 동네이자 트라브존스포르의 연고지로 알려져 있다.
2. 상세
성벽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수멜라 수도원
영어로는 트레비존드(Trebizond)로 알려지기도 했고, 라틴어로는 트라페주스(Trapezus)로 불렸는데 고대 그리스어의 영향이다. 그리스어(폰토스 그리스어 및 현대 그리스어)로는 트라페준다(Τραπεζούντα).[1]
트라페주스 (Tραπεζοῦς)란 지명은 '탁자'란 뜻인 트라페자 (τράπεζα)에서 유래했는데, 도시 배후의 탁자형 언덕을 가리킨 것이다. 현대 그리스어 및 폰토스 그리스어로는 트라페준타 (Τραπεζούντα)로 불린다. 라즈어로는 탐트라 (ტამტრა), 조지아어로는 트라피조니 (ტრაპიზონი), 아르메니아어로는 트라피존 (Տրապիզոն)으로 불린다.
한편 사다리꼴을 영어로 Trapezoid 혹은 Trapezium, 등세모근을 영어로 Trapezius muscle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놀랍게도 트라브존과 어원이 같다. 이유는 트라브존이라는 도시는 도시를 흐르는 두 하천 사이의 사다리꼴 모양의 언덕에서 기원하였고, 트라브존이라는 도시명(라틴어 트라페주스, 그리스어 트라페준타)이 사다리꼴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트라브존 사람들은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는데 특히 축구에 열광적이다. 축구구단 트라브존스포르(Trabzonspor)[2]라는 축구구단은 이 지역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많은 트라브존 사람들이 팬으로서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튀르키예에서는 아다나 다음으로 성질있는 지역으로 여겨진다. 강한 사투리 억양과 특유의 마초문화가 있어서 튀르키예 내에서는 건드리지 말자는 이미지가 있다. 남여 모두 해당하며 트라브존 사람들은 이걸 스작 칸르(Sıcak Kanlı - 열혈인)란 말로 표현하면서 자랑스러워 한다. 지중해 지역의 다혈질적인 성격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종교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지역이지만 종교를 떠나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가정이 많다. 예절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고 손님을 상당히 잘 대접하지만 튀르키예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면 대놓고 시정해야하거나 비판받을수 있다. 보수적인 지역적 틍성 탓에 평범한 낚시용품점에서도 소총쯤은 팔고, 집집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방범용 총기 하나쯤은 당연히 있는 지역이다.
총기가 많은 지역이지만 대부분 가정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모셔두기 때문에 총기사고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특이한 지역이다. 경찰력이 좋아서 치안이 매우 안전하다. 그렇지만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간혹있다. 시내 메이단이나 인구 밀집 지역은 무장 경찰들이 시민 안전을 위해서 철통 경계를 하며 트라브존 지역 작은 마을에도 치안공백을 채우는 잔다르마가 없을 정도로 경찰인력이 많고 치안이 좋다.
현재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이후로 "그리스인"[3]은 찾아볼 수 없지만, 놀랍게도 노년층에서는 폰토스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꽤 된다고 한다. 인종 구분 기준이 소속 종교여서 그렇고, 트라브존에서 폰토스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무슬림이다. 그외에 라즈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3. 역사
본래 일대에는 라즈인의 조상 격인 콜키스계 마크로니아 부족과 아나톨리아계 할디아 (할리베스)인이 거주했고, 히타이트에 저항하며 자치를 지켰다. 그러던 기원전 756년, 시노페 출신 밀레투스 상인들이 당도하여 트라페주스를 건설해 10대 흑해 거점 중 하나로 삼았다. 식민도시로써 시노페에 연공을 바치던 트라페주스는 헬라권과 아케메네스 제국간 환전으로 부를 쌓으며 점차 자립했다. 기원전 400년 경에는 쿠낙사 전투 후 철수하던 크세노폰의 1만 그리스 용병단이 트라페주스에서 마침내 바다와 만나 '탈라타, 탈라타'라 반가움을 표했고, 도시와 대립하던 콜키스계 모시노이키 부족을 격파[4]해 주는 대가로 선박을 제공받았다. 다만 예상했던 스파르타 함대가 오지 않아 용병단은 수륙 양면으로 비티니아까지 향해야 했고, 이는 크세노폰이 저술한 아나바시스의 후반부를 이룬다.
콜키스 인들과 무역을 지속하던 트라페주스는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나톨리아 정복 후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다만 페르시아 문화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았고, 도시 동쪽 민트리온 산의 샘은 미트라 신에게 헌정되어 성스럽다고 여겨졌다. 기원전 2세기 트라페주스는 파르나케스 1세에 의해 폰토스 왕국령이 되었고, 기원전 1세기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폰토스 해군의 기지로 삼았다. 기원전 66년 미트리다테스 전쟁 후 로마는 일대를 갈라티아 왕국에게 주었고, 몇년 후 로마 속국이 된 폰토스 령으로 회복되었다. 다만 폰토스 왕국은 서기 62년 로마 제국령 카파도키아 속주로 병합되었고, 트라페주스는 로마 제국 흑해 함대의 해군 기지가 되었다. 로마 시기 도시는 자치권인 키비타스 리베라를 받아 자체적인 사법권을 지녔고, 자체 동전을 주조했다.
베스파시아누스 치세에 트라페주스에서 지가나 고개를 넘어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새 도로가 세워졌고, 129년에는 순행 중이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하여 항만 시설 등을 보강했다. 193-94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간의 내전 시에 트라페주스는 후자의 편을 들었다가, 전자의 승리 후 처벌을 받았다. 257년 트라페주스는 2중 성벽에 1만에 달하는 수비대가 있었음에도 고트족에게 함락되어 약탈당했고, 재건되기가 무섭게 이듬해에는 사산 제국군에게 다시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도시의 재건은 3세기 말엽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일단락되었다. 그 무렵 트라페주스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기독교도 에우게니오스가 민트리온 산의 미트라 신상을 파괴했다가 처형되어 순교자가 되었다. 에우게니오스는 후일 도시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3.1. 동로마 제국기의 번영
트라브존 칼레시. 동로마 시기 성벽이다
박해를 피해 폰토스 산맥으로 숨어든 기독교도들은 270년 바젤론 수도원, 386년 스멜라 수도원을 세웠다. 기독교화 후 시가지 동부의 미트라 신전인 미트라이온은 파나기아 테오스케파스토스 수도원의 납골당이 되었다. 4세기 들어 트라페주스는 주교구가 되었고, 니케아 공의회에도 현지 주교가 참석했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지진으로 붕괴했던 성벽이 재건되었고, 라지카 전쟁 (548-57년) 시기 트라페주스는 사산 제국을 견제하는 군사 거점으로써 중시되었다. 그 무렵 세워진 성 바실리오스 성당에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초사화가 걸려 있었다 한다. 7세기 무렵에는 기독교화 당시 폐쇄되었던 대학인 판디다크테리온이 재개장하여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가르쳤고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학생들이 몰렸다. 이로써 트라페주스는 교육 도시로써 문화적 명성을 얻었다.
9세기 초에는 폰토스 지방에 할디아 테마가 설립되었고, 트라페주스는 그 치소로써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며 발전했다. 따라서 기존에 포티 대주교구에 속하던 트라페주스는 그 무렵 자체적인 라지카 대주교구의 치소가 되며 행정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폰토스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도시는 흑해 무역의 중심 항구 중 하나였고, 특히 동로마산 비단을 주로 수출했다. 10세기 무슬림 지리가 아불 페다는 라지카 지방의 최대 항구로써 무슬림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며 동로마 비단을 중동으로 수입했다고 기록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이탈리아 상인 역시 자주 왕래하며 유럽과 아시아 간의 중개 무역을 했고, 실크로드를 통한 아랍-페르시아 카라반 상인들도 간혹 육로로 트라페주스를 오갔다. 동로마 당국은 관세인 콤메르키아로이를 통해 많은 수익을 거두었고, 교역로 보호를 위해 해안을 따라 많은 요새를 세웠다. 11세기 무렵 트라페주스는 중세 그리스어 발음인 '트라페준타'로 불리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던 도시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 제국에게 점령되었다가, 1075년 카파도키아 출신 장군 테오도로스 가브라스가 점령했다.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황제는 테오도로스를 할디아 테마의 총독에 봉했고, 그는 튀르크 에미르들과 조지아 왕국 모두를 격파하며 폰토스 대부분 지방을 정복해 영토로 삼았다. 1097년 테오도로스는 1차 십자군을 틈타 소아시아 서부 수복전에 나선 알렉시오스 1세를 도와 활약했다. 하지만 이듬해 바이부르트에서 다니슈멘드 군에게 패배한 테오도로스는 이슬람 개종을 거부하고 잔혹히 처형되었다. 사후 그의 아들들이 총독을 맡아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트라페준타는 본토와 동떨어진 입지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령으로 굳건히 유지되었다.
3.2. 트라페준타 제국의 수도
1204년 4월,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이 일시 멸망하자 조지아에 망명해 있던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조지아의 도움으로 폰토스를 장악하고 동로마 잔존국 중 하나인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웠다. 비록 파키메레스, 라자로풀로스, 베사리온 등 일부 동로마 사가들이 라지카 변경국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콤니노스 황가의 적통으로써 트라페준타 황제들은 '전 로마인의 황제'를 칭했다. 한때 흑해 남안 대부분과 크림 반도 남부까지 차지했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1212년 룸 셀주크에게 시노페를 상실하며 폰토스 동부로 축소되었고, 이후 알렉시오스 1세는 내정과 무역에만 치중했다. 따라서 수도 트라페준타는 흑해 최대의 무역항으로 번영했고, 관세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다.1222년 알렉시오스 1세의 사후 계승한 사위 안드로니코스 1세 기도스는 룸 셀주크와 휴전을 맺었다. 하지만 룸 셀주크령 시노페의 라이스 (태수) 에투메스는 크림 반도에서 트라페준타로 향하던 조운선이 폭풍을 만나 시노페 항구 쪽으로 밀려오자 그대로 나포하고, 트라페준타 귀족 알렉시오스 파크티아레스를 사로잡았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1세가 보복 원정을 가해 시노페 시장을 약탈하고 항구의 선박들을 나포, 선원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에투메스는 사로잡은 선박, 인원, 물품 전부를 석방했고 안드로니코스 1세는 트라페준타에 개선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술탄 케이쿠바트 1세 (혹은 그의 아들 혹은 바이부르트 아미르 무기트 앗 딘 투그리 샤)는 에르주룸에 대군을 결집시킨 후 트라페준타로 진격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 역시 폰토스와 라지카의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여 수도 방어를 준비했다.
3.2.1. 룸 셀주크의 포위 (1223년)
1223년 봄, 룸 셀주크 군은 현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폰토스 산맥의 지가나 고개를 넘어 진군했다. 성당에서 예배 중이던 안드로니코스 1세는 테오도로스 폴레마르케스 휘하의 정찰대의 보고를 받자 성찬과 함께 5백의 기병대를 편성해 출격, 2천의 룸 셀주크 선발대를 격파한 후 복귀했다. '현지인들이 여태 본 가장 큰 병력'과 함께 성 에우게니오스 수도원에 진영을 차린 케이쿠바트 1세는 동쪽 성벽 밖의 시장 (메이단)을 불태운 후 성벽을 포위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성채에서 상부 도시로 이동해 파나기아 크리소케팔로스 성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며칠간 (화살 세례를 받으며) 성벽을 정찰한 케이쿠바트 1세는 시타델 (성채) 쪽을 집중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에 다수 수비대의 강한 저항으로 공격은 실패했고, 다음날 포위군은 성벽이 비교적 낮은 하부 도시의 해안 접경부를 공격했다.라자로풀로스는 튀르크 군이 나팔 신호와 함께 큰 함성을 지르며 공격했고 무장 기병대, 돌팔매병, 궁병, 방패병 순서로 병력을 배치해 그 사이에 파성추를 운반했다고 기록했다. 성문에 대한 집중 공격이 이어지던 때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술탄의 진영 방비가 허술한 것을 눈치 채고는 기병대와 함께 성채를 나와 공격했다. 본진이 혼란에 빠진 것을 알게 되자 케이쿠바트 1세는 공격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후 양측의 기병대끼리 벌어진 전투에서 시노페 태수 에투메스, 술탄의 오촌, 트라페주스 군사령관 요르요스 토르니케스 등이 전사했다. 점차 본진에 다다른 룸 셀주크 병력이 불어나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안전히 성채로 철수했고, 큰 피해에 분노한 술탄은 성 에우게니오스 수도원을 바닥까지 완전히 파괴해 분풀이했다. 다음날 룸 셀주크 군은 아랍 심벌즈, 딸랑이, 리비아 타악기 등을 울리며 다시 성벽을 공격했다.
포위군은 창, 돌, 화살 등의 발사체를 날리며 총공세에 나섰다. 이에 수비대는 포위군의 화살이 바닥나기를 기다린 후, 라즈인 기병대를 출격시켜 적을 물러나게 했다. 다음날 술탄이 큰 소리로 항복을 요구하자, 안드로니코스 1세는 평화 회담을 위해 사절을 보내라 회신했다. 이에 파견된 술탄의 사절 앞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창고의 풍족한 보급품을 보여주었다. 이를 보고받은 술탄은 심란해졌고, 전세가 기울었다 여긴 마추카의 산악인들이 밤을 틈타 룸 셀주크 진영을 기습해 말과 사람을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분노한 술탄은 성 에우게니오스 수도원 터에 병사들과 매춘부들을 불러 음란 행각을 벌이는 등 모욕을 벌였다. 한편 라자로풀로스에 따르면 그날 밤, 성 에우게니오스가 술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성내 서민들을 대표한다며 그들이 내통해 성을 넘기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술탄은 다음날 성문으로 다시 공격을 가했는데, 그때 갑자기 벼락과 강풍을 동반한 돌풍이 몰아쳤고 폭우와 함께 홍수와 산사태까지 벌어졌다. 주민들이 성 에우게니오스의 기적이라 여긴 돌풍으로 룸 셀주크 군 상당수가 익사하거나 토사에 매몰되었고, 케이쿠바트 1세는 잔여 병력과 도주했다. 하지만 쿠라토레이온에서 마추카 기병들에게 사로잡힌 술탄은 '노예처럼' 수갑이 채워져 트라페준타로 넘겨졌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그를 예우하며 연공 및 병력 제공 의무 등 룸 셀주크에 대한 종속을 끝내는 조건으로 방했다. 관용적 처사에 감격한 케이쿠바트 1세는 매년 트라페준타에 아랍 종마를 선물하고, 성 에우게니오스 수도원의 재건을 위해 돈을 보냈다. 다만 1230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잘랄 웃 딘 밍부르누와 동맹하고 그 패잔병도 수용한 후, 술탄은 다시 연공 및 병력 제공을 강제했다.
3.2.2. 경제적, 문화적 번영
룸 셀주크에 복속했지만 13세기의 트라페준타는 유럽과 페르시아, 흑해 연안을 잇는 무역 도시로써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특히 1258년 일 칸국의 바그다드 함락 후 실크로드 카라반 교역로가 북쪽으로 이동하며 더 많은 제노바, 베네치아 상인들이 도시를 찾게 되었다. 흑해 무역 확보를 위해 1306년 제노바 공화국은 트라페준타 항구 서쪽에 레온카스트론 요새를 구매했고,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질세라 그 서쪽 수백 미터 지점에 무역 거점을 세웠다. 두 거점들에는 이탈리아 인들이 정착해 유럽 혹은 라틴 구역으로 불렸고,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그 무렵 원나라에서 귀환하던 마르코 폴로가 트라페준타에서 육로 여정을 끝내고 배에 올라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본래 트라페준타 제국은 라틴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 심지어 룸 셀주크와도 동맹하여 니케아 제국 및 복원된 동로마 제국에 맞섰다.다만 1280년대 종주국인 일 칸국의 압박으로 요안니스 2세는 '전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며 동로마와 화친했고, 미하일 8세의 딸과 결혼했다. 1282년 요안니스 2세의 부재를 틈타 이메레티 왕국의 다비드 1세가 트라페준타를 포위했으나 점령에 실패한다. 콤니노스-팔레올로고스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후계자 알렉시오스 2세는 310년에 대화재로 전소된 대학을 재건했고, 30년 이상 재위하며 학문과 예술을 후원했다. 페르시아 천문학을 유학한 그리고리오스 히오니아데스는 새 천문학교와 함께 페르시아 밖 최고의 천문대를 세웠다. 히오니아데스 천문대는 정확한 일식 예측 덕에 황실 및 교회에게 애용되었다. 그리고리오스가 그리스어로 번역한 샴스웃딘 알 부하리, 나시룻딘 투시, 압둘라흐만 알 카지니의 천문서들은 아스트롤라베와 함께 서유럽으로 전해져 르네상스의 기반 중 하나가 되었다.
국력을 키운 알렉시오스 2세는 흑해 무역을 독점하려던 제노바와 전쟁을 벌였다가 1314년에 화친했고, 1319년에는 베네치아에게 제노바와 같은 조건의 통상 조약을 허락하며 두 공화국의 경쟁을 유도했다. 또한 그는 시노페의 튀르크 해군을 막기 위해 항구에도 성벽을 건설했고, 더욱 안전해진 트라페준타는 더욱 번영했다. 그러나 1330년 알렉시오스 2세가 사망하고 이후 황제들이 연이어 요절 혹은 어린 나이에 폐위되며 혼란에 빠졌고, 1340년부터 호족 세력과 스콜라리 (군부) 등이 황제를 옹립하며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1340-41년에 튀르크 군이 두 차례 트라페준타를 공격했으나 여제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는 직접 수비를 이끌고 마침 전염병이 엄습하는 행운 덕에 격퇴해낼 수 있었다. 1348년에도 튀르크 군이 침공했으나 미하일이 3일 간의 격전 끝에 격퇴했다.
1347년 9월, 트라페준타에 흑사병이 엄습했으나 큰 타격은 없었다. 한편 내전의 초기에 제노바 인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있었고, 이에 제노바 공화국은 1349년 카파의 트라페준타 함대를 격파했다. 이에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시내의 라틴인들을 학살했고, 미하일은 레온카스트론의 완전한 할양 및 베네치아와의 단교를 조건으로 겨우 제노바와 화친할 수 있었다. 1349년 미하일의 폐위 후 집권한 알렉시오스 3세가 스콜라리 세력을 억누르고 40년 넘게 재위하며 트라페준타는 안정을 찾았다. 알렉시오스 3세는 조부 알렉시오스 2세처럼 예술과 과학을 적극 후원했고, 시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트라페준타 출신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그리스 고전과 당대 학문을 비교한 첫 학자들이었고, 바실리오스 베사리온과 트라페준타의 요르요스 등은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5]
1390년 알렉시오스 3세의 뒤를 이은 마누일 3세 역시 부친처럼 안정적으로 27년 재위했다. 비록 1398년 오스만 제국, 1400년에는 티무르 제국에 복속했으나 앙카라 전투로 오스만, 1405년 티무르 사후 티무르 군대의 철수로 인해 두 제국에게서 모두 벗어날 수 있었다. 1417년 마누일 3세가 사망하자 아들 알렉시오스 4세가 즉위해 다시 제노바와 대립했고, 이에 제노바 공화국은 재차 트라페준타 함대를 격파한 후 도시 인근 수도원을 개조해 요새로 삼았다. 그후 알렉시오스 4세는 흑양 왕조에 복속하고 제노바와 휴전을 맺었지만, 1429년 4월 유배된 아들 요안니스 4세가 제노바 함대와 함께 트라페준타 인근에 상륙하자 그에 맞서기 위해 출정했다가 암살되었다. 요안니스 4세는 제노바의 봉쇄 위협에 베네치아와 협력했고, 1442년 트라페준타로 향하던 오스만 함대가 침몰하며 위기를 넘겼다.
트라페준타는 14-16세기 유럽 문학에서 신화적인 장소로 알려졌고, 세르반테스 등이 소설과 연극 등에서 소유욕을 드러냈다. 1451년 요안니스 4세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맹 제안을 거절하고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에 복속했다. 그 무렵 백양 왕조에 의탁하던 사파비야의 지도자 셰이크 주나이드가 트라페준타를 기습 점령하려 했으나 요안니스 4세는 소수의 병력만으로 반격을 가해 격퇴했다. 그러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메흐메트 2세는 요안니스 3세를 그곳으로 소환해 트라페준타 선박에 대한 통행세 인상을 선포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트라페준타는 정치적으로 더욱 자립했고, 많은 동로마 지식인들이 망명해오며 문화적으로 더욱 번성했다. 이미 트라페준타 출신의 그리스인 학자들은 이탈리아에서 큰 존경을 받으며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3.2.3. 트라페준타 함락 (1461년)
1456년, 메흐메트 2세의 명으로 오스만령 아마시아 총독 히지르 파샤가 수륙 양면으로 트라페준타를 포위 공격했다. 오스만 군은 근교와 시장을 약탈했고, 2천의 주민을 사로잡았다. 이미 역병이 퍼진 터라 견디기 어려워진 요안니스 4세는 주민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금화 2천닢의 연공을 약속하며 휴전을 맺었다. 1458년 요안니스 4세가 파견한 동생 다비드는 술탄과 만나 휴전을 공식 체결했으나, 연공 액수는 금화 3천닢으로 인상되었다. 다만 높은 보스포루스 통행세와 늘어난 연공 때문에 트라페준타의 경제는 어려워졌다. 요안니스 4세는 미녀로 유명하던 자신의 딸 테오도라 콤니니 (데스피나 하툰)을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과 결혼시켜 후자로부터 트라페준타 보호를 약속받았다. 또한 잔다르 왕조, 카라만 왕조, 조지아 왕국 등과 대오스만 동맹을 맺은 요안니스 4세는 1459년 4월에 사망했다.본래 요안니스 4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5세가 후계자였으나, 위기 상황에 연장자가 통치해야 한다고 여긴 귀족들에 의해 다비드가 마지막 황제로 추대되었다. 1460년, 다비드는 우준 하산에게 중재를 청하며 연공 액수 인하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흑양 왕조와 대립하던 우준 하산은 오히려 오스만 측과 휴전을 맺었다. 이미 1460년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을 멸하고 아마스라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는 유일하게 남은 옛 동로마 제국의 육상 영토인 트라페준타 정복을 위해 다비드의 연공 납부 거부를 명분 삼아 보병 8만, 기병 6만, 210척의 함대를 동원해 출정했다. (1461년 봄) 다비드는 미하일 알리게리, 루도비코 다 볼로냐 등을 서유럽에 보내 원군을 요청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우선 목적을 숨긴 채 앙카라로 진군하던 메흐메트 2세는 잔다르 왕조를 멸한 후 악천후에도 아나톨리아 고원을 통해 진군했다.
조지아 왕국과의 국경에서 무력 시위를 벌인 메흐메트 2세는 백양 왕조를 압박, 우준 하산에게 불간섭을 조건으로 한 휴전을 맺었다. 이로써 트라페준타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킨 술탄은 트라페준타로 진격했다. 이미 신임 시노페 총독 카심 파샤가 이끄는 해군이 32일간 해상 봉쇄를 가하던 1461년 8월, 메흐메트 2세가 포위마에 당도해 다비드에게 영지 하사 및 성내 주민 전체에 대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굳건한 성벽을 기반으로 저항을 고려하던 다비드는 대신 요르요스 아미루체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운명을 언급하며 원군이 오지 않는다며 설득하자 항복해 술탄의 자비를 구하기로 했다. 공격과 파괴를 고려하던 메흐메트 2세 역시 대재상 마흐무트 파샤의 설득에 항복을 수용했고, 다비드는 주민 대표단과 함께 성을 나와 복속을 표했다. 술탄은 그와 악수하고 선물을 주며 다독였다.
8월 15일, 메흐메트 2세는 트라페준타에 입성했다.[6] 함락을 두고 우준 하산의 원군을 기대하던 주민들이 수탉이 울면 항복하겠다며 시간을 끌었지만, 한밤 중에 울며 그대로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궁전의 탑에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있다가 투신했다는 이야기로 기존 황궁은 카라 크즌 사라이 (검은 소녀 궁전)로 명명되었다. 방어 태세와 주민들을 시찰한 메흐메트 2세는 파나기아 크리소케팔로스 성당을 파티흐 모스크로, 성 에우게니오스 성당에서 예배드린 후 예니 주마 (새 금요) 모스크로 개조했다. 또한 성채에 4백의 예니체리를 배치했고, 8백의 남자 아이들이 예니체리로 징집되었다. 주민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되거나 노예가 되거나 도시 근교로 재정착되었다. 1463년 1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연금되어 있던 다비드는 세 아들들과 함께 처형되었다.[7]
3.3.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2세는 튀르크식으로 트라브존이라 명명된 도시에 카심 파샤를 총독에 봉했고, 히즈르 파샤에게 폰토스 산지 전역의 복속을 일임시켰다. 이후 많은 튀르크 인들이 일대에 정착했고, 그리스 정교도들이 일부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15세기 후반 바예지트 2세의 차남 셀림 1세가 트라브존 산작베이 (총독)으로 재임했고, 그 기간인 1494년에 쉴레이만 1세가 트라브존 황궁에서 탄생했다. 오스만 조정은 종종 현지 체프니 튀르크인 혹은 라즈인 베이들을 총독으로 선임했다. 1523년 기준 (성벽 내의) 트라브존에는 약 1천 5백 가구가 거주했고 기독교도 85%, 무슬림 15%로 구성되었다. 기독교도 중 1/10 정도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 트라브존은 룸 에얄레트, 에르진잔-바이부르트 에얄레트, 아나돌루 에얄레트, 1533년 에르주룸 에얄레트를 거쳐 1598년 자체적인 트라브존 에얄레트의 치소가 되었다.16-17세기 트라브존 에얄레트는 유럽 전선에 종종 파병했고, 17세기 말까지 현지 기독교도 중 상당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오스만 제국 하의 안정을 누리며 트라브존에는 부유한 상인 계층이 형성되었고, 입실란티스 가문 등 기독교도들은 문화와 경제 및 정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트라페준타 제국 시기처럼 중요한 흑해 무역항이었기에 다양한 유럽국들의 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카자르 왕조와 오스만 제국 간의 평화가 정착된 19세기 중반부터 트라브존은 페르시아 물품이 유럽으로 향하는 주요 교역장이었다. 한편 1835년 미국 선교단의 유입과 함께 수백개의 그리스/튀르크/아르메니아계 근대 학교들이 세워진 트라브존은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은 도시 중 하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현지인 학교와 함께 미국 학교 1개, 프랑스 학교 5개, 페르시아 학교 1개, 몇 개의 이탈리아 학교 등 국제학교들도 세워졌다.
1845년에는 우체국이 세워졌고 여러 새 교회 및 모스크와 함께 극장, 사진관, 인쇄소, 은행 등이 설립되었다. 1867년 행정 개편으로 트라브존 에얄레트는 트라브존 빌라예트로 개편되었다. 번영하던 트라브존 경제는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타격을 입었다. 그 무렵 여러 기독교도 및 유대교도 주민들이 농지를 찾아 러시아 제국령 오데사 등 흑해 북안 도시들로 이주했는데, 그중에는 밥 딜런의 조부모도 있었다. 동시에 많은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도 이주해 무역, 은행업, 제과업, 직물업, 교육, 정치, 행정 등에 종사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학살을 피해 다수의 체르케스 인이 트라브존에 유입되며 무슬림 비율을 높혔다. 1895년 하미디예 학살 시에 트라브존 빌라예트에서도 2천여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었는데, 그나마 다른 아나톨리아 주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3.4. 근현대
하미디예 학살 후 많은 아르메니아인 학자, 음악가, 사진가, 화가 등의 지식인들은 러시아나 프랑스 등지로 이주했다. 19세기 말엽 트라브존에는 많은 서구인들이 상주했고, 그들이 발행한 신문은 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1901년 영국 기업이 트라브존 항구에 크레인을 설치했다. 1912년에는 메이단 광장에 수메르 오페라 하우스가 개장했다. 하지만 트라브존의 번영과 평화는 1차 대전 발발과 함께 많은 청년들이 러시아 군과의 사리카미쉬 전투에서 전사하며 종식되었다. 1914-15년 겨울에는 러시아 해군이 항만 일대를 5차례 포격하며 1천 3백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1915년 7월, 군부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지시에 따라 대부분의 성인 남성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5차례에 걸쳐 귀뮈쉬하네 광산으로 추방되었고, 총독 제말 아즈미는 수천의 노약자들을 배에 태운 후 침몰시켜 학살했다.그외에도 전후 전범 재판에서의 증언에 따르면 오스만 군은 트라브존 인근에서 5천의 아르메니아 주민을 교회에 집결시킨 후 방화해 태워 죽였다 한다. 그나마 트라브존 인근 마을 중 아라클르에서는 무슬림 주민들이 아르메니아 이웃들을 지켜준 일도 있었다. 1915-16년 겨울의 트라브존 전역 끝에 1916년 3월, 러시아 군이 라지스탄 (라지카)를 장악했다. 다만 무슬림 주민들의 게릴라 전으로 러시아 군은 40일이 지나서야 트라브존에 접근했고, 현지 오스만 당국은 유력자들과 회담한 후 그리스 정교회의 대주교 크리산토스 필리피디스에게 도시를 넘겼다. 크리산토스는 무슬림 주민들도 보호할 것을 서약했고, 오스만 군이 철수한 직후인 4월 15일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와 니콜라이 유데니비치가 이끄는 러시아 군이 트라브존을 무혈 점령했다. 다만 오스만 군이 철수하며 일부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를 살해했다.
러시아 군이 당도했을 때에 트라브존의 아르메니아인은 5백에 불과했다. 시장이 된 크리산토스는 폰토스 공화국 설립을 지지하며 오스만-러시아 제국간 휴전을 중재했으나 실패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러시아 주둔군은 약탈을 일삼았다. 크리산토스는 이를 겨우 통제했고, 1918년 2월 러시아 군이 철수하며 오스만 령으로 수복되었다. 같은해 봄, 오스만 제국은 신생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과 국경 논의를 위해 트라브존 평화 회담을 열었으나 아르메니아 대표단과의 충돌로 결렬되었다. 따라서 오스만 군의 캅카스 진격은 그해 10월 종전까지 이어진다. 종전 후 12월, 트라브존 부시장 하프즈 메흐메트는 의회에서 (독일로 망명한) 제말 아즈미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1919년 초에는 트라브존에서 전범 재판이 열렸고, 제말 아즈미에는 궐석 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터키 독립 전쟁 시기 일부 폰토스 그리스인 단체들이 무스타파 케말의 튀르크 민족주의에 반발하며 무장 봉기를 시도했으나, 트라브존 주민들은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크리산토스의 보호를 기억하는 무슬림 주민들 역시 기독교도 인사들의 체포에 반발하며 시위했고, 트라브존 대표단은 에르주룸 의회에서 무스타파 케말의 지도자 선출을 반대했다. 트라브존 당국은 이웃한 기레순 출신인 토팔 오스만의 그리스인 학살에 반대했고, 항만 노동자들이 무장하여 그의 도시 진입을 막았다. 한편 크리산토스는 1919년 파리 강화 회담에서 폰토스 공화국 설립을 주장했으나 그리스 정부마저 너무 취약하다며 반대해 무산되었고 터키 대국민 의회의 사형 선고로 트라브존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스탄불의 오스만 조정을 지지하던 트라브존은 결국 터키 공화국에 소속되었고, 첫 야당인 2단체 (이킨지 그룹)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 8월, 5백여 그리스 정교도 남성들이 노역을 명분으로 소집된 후 감금을 거쳐 추방되었고 그들의 집들은 약탈되었다. 현지 튀르크 민병대는 적어도 10여명의 청소년들을 살해하거나 납치 및 강간하기도 했다. 이렇듯 트라브존에서도 간혹 학살이나 추방이 있었고, 이는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시까지 이어진다. 1923년 3월, 이킨지 그룹의 당수 격으로 민족 다양성을 옹호하던 트라브존의 정치인 알리 쉬크뤼 베이가 앙카라에서 실종된 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토팔 오스만은 저항하다 참수되어 의회 앞에 시신이 효수되었다. 다만 기레순이 토팔 오스만의 기념비 및 동상이 세워지며 알리 쉬크뤼 베이를 영웅으로 여기는 트라브존과 현재까지 지역 감정이 이어지고 있다.[8] 1926년에는 하프즈 메흐메트가 무스타파 케말을 암살하려는 이즈미르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3.5. 현대
1920년대의 인구 교환으로 트라페준타 시 자체에서 5만, 빌라예트 전체에서 10만에 달하는 흑해 그리스인이 그리스로 이주되어 네아트라페준타 등의 도시를 세워 정착했다. 20세기 중반 트라브존은 담배, 견과류 등을 수출했다. 하지만 2차 대전 시기 나치 독일의 흑해 연안 장악으로 해운이 사실상 멈추며 트라브존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20세기 후반 서서히 도시 개발과 항구 최신화가 이루어지며 지방의 인구가 유입되었고, 해안을 따라 고속도로가 세워져 다른 도시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또한 트라브존은 함시라 불리는 흑해 멸치 산지로 유명해졌고, 그외에 헤이즐넛과 차가 특산물이다. 지금도 남쪽 교외의 그리스계 무슬림들은 룸자라 불리는 폰토스 그리스어를 쓴다.4. 관광지
* 아야 소피아: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와는 이름만 같다. 규모도 훨씬 작고, 인지도도 떨어지고... 그래도 여기는 모스크로 개조당한 적은 없다. 다만, 그리스인 (엄밀히 말하면 정교회인)의 퇴거로 인해 성당으로 쓰이지는 않고, 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 2010년대 들어 갈수록 이슬람화되는 튀르키예 사회 분위기를 타고 모스크로 전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실제로 공사까지 들어갔지만, 지역 법원에서 제동을 걸어서 아직도 박물관으로 있다.[9]
* 수멜라 수도원: 트라브존 방문시 빠뜨릴 수 없는 곳. 산세 절벽에 세워진 것만으로 인상적이다. 로마 제국 분열 직전 까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역시 정교회의 퇴거로 현재는 수도원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최근에 튀르키예 종교부가 정교회 전례가 거행되는 것을 허락해서 화제가 되었다. 다만 보수를 위해 공사가 한창이며, 방문 인원도 제한되어 있다. 수멜라 수도원에는 유명한 성모 마리아 이콘이 있는데, 전쟁 이후 그리스인들이 추방될 때 수멜라 수도원에 거주하던 한 수도자가 이 이콘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만 아는 곳에 묻어두고 있다가 1950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해 파보니 이콘이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로 가져가 새 수멜라 수도원을 세워 그곳에 모셔두었다. 현재도 이 이콘은 새 수멜라 수도원에 모셔져있다.
- 우준괼 : 시내에서 동남쪽 60km 지점의 협곡에 위치한 호수. 로키산맥과 같은 절경으로 유명하다.
5. 교통
트라브존 공항이 있다.6. 기타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영지로 되어 있으며 변장도 20을 요구한다.도시의 중세사는 트라페준타 제국과 같이 보면 도움이 된다. 이 제국의 역사가 곧 트라브존의 역사이다.
지역 연고 구단 트라브존스포르에서 뛰었던 이을용, 셰놀 귀네슈, 석현준의 영향으로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다.
흑해의 휴양지이고 트라브존스포르 때문에 스포츠 인프라가 괜찮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전지 훈련지로 많은 선택을 받는 편이다
[1] ντ는 d음가를 가진다. 또한 어중 어미에 해당되는 ντ의 경우 nd로 발음된다. 때문에 Ντομάτα라고 쓰고 '도마타'라고 읽는 것.[2] 트라브존+스포르(spor, 체육 운동경기). 트라브존 소속 운동팀이라는 뜻.[3] 정확히 말하면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 참고로 튀르키예 현지에서는 튀르키예 국적인 정교회 그리스인은 Rum, 즉 로마인이라 부른다.[4] 크세노폰은 병력을 양옆으로 길고 얕게 배치했고, 콜키스 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력을 양분하자 남겨뒀던 예비대와 함께 그 사이로 돌격해 격파했다.[5] 특히 전자는 추기경에 올라 유력한 교황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6] 공교롭게도 그 날은 약 2세기 전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날이다[7] 술탄은 1461년 10월, 거의 쓰지 않은 무기와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왔다. 1464년에는 교황 피우스 2세가 사망하며 트라페준타 제국의 재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8] 현재까지도 보수파 및 민족주의 정치인들이 트라브존에 대한 지역차별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9]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와 달리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모스크였던 적이 없다 보니 모스크로 전용할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