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1:01:18

폰토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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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공화국
Δημοκρατία του Πόντου
Dimokratía tou Pód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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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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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 개요2. 독립 추진과 러시아 제국의 점령3. 튀르키예인들의 대량 학살과 민족 자결주의4. 건국 무산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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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흑해 남부 해안지역인 폰토스흑해 그리스인들이 제안한 국가이다.

2. 독립 추진과 러시아 제국의 점령

1904년 폰토스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비밀 단체인 폰토스 협회가 메르지폰에서 설립되었다.
이 비밀 단체는 상당한 지지를 얻었고, 훗날 아테네 대교구장이 될 대주교 크리산토스 필리포데스가 폰토스 공화국의 독립을 추진하는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흑해 그리스인 단체는 메르지폰에 있는 폰토스 협회와 연결되었고, 러시아 제국미국에서 폰토스 독립 국가를 건국하기 위한 로비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트라브존러시아 제국의 군대에 함락되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군은 러시아 내전에 집중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철수했다.

3. 튀르키예인들의 대량 학살과 민족 자결주의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그리고 오스만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트레비존드 지방의 그리스인들은 청년 튀르크당에 의해, 나중에는 케말주의 튀르키예군에 의해 대량 학살을 당했다.

두 학살 모두 튀르크인들이 조만간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원주민들에게 영토를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과 투르크화 정책 때문이었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의 튀르키예의 산악지대를 통한 죽음의 행진, 악명 높은 아나톨리아의 노동대대의 강제노동, 토팔 오스만의 비정규군에 의한 학살로 약 35만 명의 흑해 그리스인이 사망했다.

하지만 튀르키예 당국이 학살자 토팔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거부했고, 지역 투르크인들은 토팔을 도시 밖으로 내쫓았다.
그 도시의 지역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의 체포에 항의했다.

죽음의 행진에서 탈출한 흑해 그리스인들은 여성과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갔고,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을 보호하는 호신 단체를 결성했다. 그 호신 단체는 6만 명 이상의 흑해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했다. 민족 자결주의 법안의 제12항은 "튀르키예의 지배하에 있는 비 튀르키예 민족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삶의 안전과 절대적인 자율적 발전의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법안은 폰토스 지역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전역의 비 투르크계 주민들을 조직하기 위한 중요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윌슨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폰토스 공화국의 건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과 전쟁 중에 러시아에 정착한 흑해 그리스인들의 송환을 위한 재정 지불 절차를 시작했다.

4. 건국 무산

1919년 4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영토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파리 강화 회의에서 크리산토스는 폰토스의 독립을 위한 협상에 참여했다.
그는 폰토스 공화국의 수립을 위한 18페이지의 지지각서를 제시했으며, 제안된 폰토스 공화국은 트라브존, 삼순, 시노프, 아마시아를 포함하고 현대 튀르키예의 북동부 흑해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회의에서 베니젤로스는 폰토스 공화국이 그리스 왕국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기에는 너무 멀고, 튀르키예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폰토스 공화국의 설립에 반대하였고, 논의는 대체로 종결되었다.
이후 베니젤로스의 주장으로 트라브존 지역이 윌슨 아르메니아의 일부로 지정되나 아르메니아 또한 볼셰비키의 점령과 잇달은 튀르키예-아르메니아 전쟁 패전으로 인해 터키의 일부가 된다.

1921년 폰토스의 정교회 남성 대부분은 추방되어 에르주룸의 노동 대대로 보내졌다.
이 시기에 아마시아의 "튀르키예 독립 특별 재판소"는 튀르키예의 민족주의자 무스타파 케말(훗날 아타튀르크)에 의해 통제되었다.

5. 이후

1923년 로잔 조약 이후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인구 교류의 일환으로 흑해 그리스인 공동체의 상당 부분이 재정착했다.
기록에 따르면 인구 교환의 일환으로 182,169명의 흑해 그리스인들이 이주했다.
대부분의 흑해 그리스인들은 소련으로 떠났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리스 왕국으로 이주하여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