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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관련 틀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Закавказская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республика | |
국기 | |
1918년 4월 22일 ~ 1918년 5월 28일 | |
수도 | 트빌리시 |
언어 | 조지아어, 아르메니아어 아제르바이잔어 |
민족 |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
정치체제 | 공화제 |
종교 |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이슬람 |
역사 | • 1918년 4월 22일: 정부 수립 • 1918년 5월 28일: 멸망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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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어 | Закавка́зская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респу́блика (Zakavkazskaya demokraticheskaya federativnaya respublika) |
아르메니아어 | Անդրկովկասի Ժողովրդավարական Դաշնային Հանրապետութիւն (Andrkovkasi Žołovrdavarakan Dašnayin Hanrapetutʿiwn)[1] |
아제르바이잔어 | زاقافقازیا قوشما خالق جومهورییتی (Zaqafqaziya Qoşma Xalq Cümhuriyyəti)[2] |
조지아어 | ამიერკავკასიის დემოკრატიული ფედერაციული რესპუბლიკა (amierk'avk'asiis demokratiuli pederatsiuli respublika) |
캅카스 지방에 1918년 4월 22일부터 동년 5월 28일까지 존속한 국가이다. '자캅카스'라는 표현은 러시아어 '자캅카지예(Закавказье)'에서 유래한 것으로 '캅카스 너머'의 의미를 가진다.
2. 역사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서게 되면서 동년 3월 9일에 부왕령을 대신하는 자캅카스 특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10월 혁명 중인 11월 11일에 세워지는 멘셰비키계 자캅카스 위원부로 이어지게 된다. 그 후, 1918년 3월 3일 볼셰비키 정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캅카스 지역을 상실하게 됐다.1918년 2월, 자캅카스 의회가 트빌리시에서 열린다. 이 당시 세 주체(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는 국경을 따로 긋지 않고 연방에 속하는 정당들을 구성해 이해관계를 대변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세력은 규모 순서대로 조지아 멘셰비키, 아제르바이잔 무사바트, 아르메니아 혁명연맹이었다. 볼셰비키는 이 공화국의 가입을 거부하고 바쿠에 소비에트 정부를 건국했다.
1918년 4월 9일,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실질적인 기능을 개시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연방 내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이자 유일하게 최종적인 독립을 추구한 세력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는 아이디어에 관심이 없거나 적대적이기도 하였다. 이 문제의 원인은 당연히 오스만 제국의 진군이었고 1918년 3월 바쿠 학살로 스테판 샤후먄을 위시한 볼셰비키에 이를 박박 갈았던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환영하였다. 물론 조지아, 특히 아르메니아가 이를 끔찍한 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자캅카스 연방의 내분은 오스만 문제에만 그치지 않았다. 세 세력은 각각 다른 곳에 줄을 대고 있었다. 조지아는 국체 보전을 위해 오스만에게 쥐약같은 동맹인 독일 제국에게 의탁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아르메니아는 이미 떠난 러시아군에게 계속 개입을 호소하면서 협상국인 프랑스와 영국을 끌어들이고 싶어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처음부터 이 연방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을 받았는데, 나머지 두 나라의 공적인 오스만과 육로를 연결하고 오스만군을 환영하는 것이 이들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의 해산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오스만 제국과 직접 대립을 선택한 아르메니아의 ARF와의 견해 차이였다. 조지아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베를린에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들을 심어 두고 에리히 루덴도르프로부터 독립 보장 약속을 받아 둔 상황이었는데 아르메니아가 어쨌건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과 최후 결전을 하겠다고 나선 이상 협의 가능한 부분이 더이상 없었다. 조지아 멘셰비키의 유력 인사였던 Noi Zhordania는 연방 해산 전야인 5월 25일 아르메니아측 대표단 일원인 Alexander Khatisian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익사할 수는 없다. 우리 인민들은 우리 스스로 가능한 것들을 보전할 것이다. 당신들도 오스만 제국과 협의점을 찾을 의무가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3]
그 다음 날 자캅카스 연방은 5월 26일 조지아 멘셰비키의 주도로 의회를 해산하고, 같은 날 조지아 민주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본인들이 원하던 대로 독일 제국의 승인을 받는다. 달리 방법이 없어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5월 28일에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으로 각각 분리 독립한다.
3. 멸망 이후
세 국가는 자캅카스에 속하던 시절 국경을 따로 긋지 않았으나 각자 독립하면서 서로 협의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영토 선언을 한다. 그나마 셋 중 조지아의 국경을 긋는 것은 가장 쉬웠다. 조지아인들이 사는 땅을 따라 선을 그으면 잘 닫힌 국경이 나왔기 때문, 비록 모든 국경에 걸쳐 영토 분쟁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잘 닫힌 도형을 구성한 상황에서 밀고 당기는 것이었기에 뒤의 두 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쉬운 문제에 속했다.하지만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서로 완전히 섞여 살았던 탓에 경계를 쉽게 그을 수 없었다. 두 민족은 완전히 섞여 살았기에 국토를 딱딱 떨어지게 분리하려면 강제이주 따위의 무언가가 선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일찍이 대학살 등의 여파로 반튀르크 감정이 격화된 아르메니아의 입장상 이를 협상으로 타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양국의 영토 주장은 하나같이 과격하기 그지없었는데, 아르메니아는 카라바흐 서부 산악지대 전부로부터 소캅카스 산맥을 따라 조지아의 아르메니아인 구역까지 포함하는 국경선을 긋고자 하였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은 구 예레반 주의 영역에서 나히체반을 요구하고 반 호수를 반분하고자 하였다. 후일 벌어지는 쌍방간의 대규모 강제추방과 학살 문제는 오스만 제국 문제를 배제한다면 여기에서 시작된다.
세 나라 중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예외적으로 꽤 온건하게 국경을 확정한다. 조지아/다게스탄/아제르인이 섞여 살고 자연적으로 딱 떨어지는 국경이 아니던 자카탈(Zakatal) 지역에서 분쟁이 있었으나 두 나라는 적백내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이 문제를 서둘러 마무리짓는다. 이러한 노력에도 결국 볼셰비키의 진주를 막지는 못하지만.
곧이어 1920년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이들은 독립 정부를 상실한 채 아제르바이잔 SSR, 아르메니아 SSR, 그루지야 SSR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들은 레닌의 제안에 따라 1922년 3월 12일에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을 이루어 동년 12월 30일에 소련 창설 가맹국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936년 12월 5일에 개별 공화국으로 해체하면서 캅카스 지역을 아우르는 연방국가는 사라지게 된다.
북캅카스 지역도 잠시 이들의 영역이 되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 다시 러시아령이 되어 테레크 주에 속하게 됐다. 하지만 여기도 훗날 러시아인들과 북캅카스의 다양한 민족들이 반란과 봉기로 이곳에도 북캅카스 토후국, 테레크 소비에트 공화국, 쿠반-흑해 소비에트 공화국, 스타브로폴 소비에트 공화국 등이 나타났으며, 북캅카스 토후국은 북캅카스 산악 공화국을 거쳐 산악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편됐고, 러시아인 중심의 쿠반흑해, 스타브로폴, 테레크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통합되어 북캅카스 소비에트 공화국이 됐다. 물론 소련에게 점령된 이후 각각 여러 민족들의 이름을 딴 지명으로 부른 주가 되다가 러시아 SFSR의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들이 됐다.
4. 내각 명단
총리 | 아카키 치헨켈리 (აკაკი ჩხენკელი, 1874년 ~ 1959년, 조지아인) |
외무부장 | 아카키 치헨켈리 |
내무부장 | 노에 라미슈빌리 (ნოე რამიშვილი, 1881년 ~ 1930년[4], 조지아인) |
재무부장 | 알레크산드르 하티샨 (Ալեքսանդր Խատիսեան, 1874년 ~ 1945년, 아르메니아인) |
교통부장 | 후다다트 배이 맬리크아슬라노프 (Xudadat bəy Məlik-Aslanov, 1879년 ~ 1935년[5], 아제르바이잔인) |
법무부장 | 패탤리 한 호이스키 (Fətəli xan Xoyski, 1875년 ~ 1920년[6], 아제르바이잔인) |
전쟁부장 | 그리골 기오르가제 (გრიგოლ გიორგაძე, 1879년 ~ 1937년[7], 조지아인) |
농림부장 | 노에 호메리키 (ნოე ხომერიკი, 1883년 ~ 1923년[8], 조지아인) |
교육부장 | 내시브 배이 유시프배일리 (Nəsib bəy Yusifbəyli, 1881년 ~ 1920년[9], 아제르바이잔인) |
상공부장 | 맴매드해샌 하즌스키 (Məmmədhəsən Hacınski, 1875년 ~ 1931년[10], 아제르바이잔인) |
보급부장 | 아베티크 사하캰 (Աւետիք Սահակեան, 1863년 ~ 1933년, 아르메니아인) |
복지부장 | 호브한네스 카자즈누니 (Հովհաննես Քաջազնունի, 1868년 ~ 1938년[11], 아르메니아인) |
노동부장 | 아라마이스 예르즌캰 (Արամայիս Երզնկյան, 1879년 ~ 1938년[12], 아르메니아인) |
감사원장 | 이브라힘 배이 헤이대로프 (İbrahim bəy Heydərov, 1879년 ~ 1945년, 레즈긴계 아제르바이잔인) |
[1] 현대 아르메니아어 표기는 'Անդրկովկասյան Դեմոկրատական Ֆեդերատիվ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2] 아제르바이잔 독립선언서에 쓰인 표기이다. 현대어로 옮기면 'Zaqafqaziya Demokratik Federativ Respublikası'.[3] Hovannisian, Armenia on the road to independence p.185, 1918[4]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뒤 암살당함.[5] 바쿠에서 반동분자 혐의로 수감되어 옥사함.[6]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트빌리시에서 암살당함.[7] 반동분자 혐의로 카자흐 SSR 알마티로 추방됨.[8] 반소항쟁인 8월 봉기의 주동 혐의로 체카에 의해 목숨을 잃음.[9] 퀴르대미르(Kürdəmir)에서 암살당함.[10] 반동분자 혐의로 트빌리시에서 옥사함.[11] 반동분자 혐의로 예레반에서 옥사함.[12] 반동분자 혐의로 옥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