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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카 Чека | |
<colbgcolor=#cc0000><colcolor=#ffd700> 창설 | 1917년 12월 5일 |
해산 | 1922년 2월 6일 |
위치 | 페트로그라드, 루뱐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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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어: Всеросси́йск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коми́ссия по борьбе́ с контрреволю́цией и сабота́жем[1], ВЧК, Че́ка영어: All-Russian Extraordinary Commission for Combating Counter-Revolution and Sabotage, VChK, Cheka
체카는 정치경찰로 10월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2] 내에서 반혁명 및 방해 공작 활동과 그에 대한 모든 시도를 근절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러시아 내전 동안 테러 예방과 반대 세력 숙청[3] 그리고 투기와 부패 단속을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볼셰비키의 반대 세력을 제압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나아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설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체카 요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던 체키스트는 이후 소련 정치경찰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체카는 향후 악명을 떨치게 되는 NKVD, KGB와 같은 소련 정보기관의 시초가 되었다.
2. 역사
1917년 11월 7일,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러시아 공화국을 해산시키고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인민위원회의[4]가 정식으로 설립되면서 반혁명 세력과의 싸움을 위해 특별 위원회를 설립할 필요성이 확대되었고,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야코프 페테르스를 중심으로 반혁명과 방해 공작을 퇴치하기 위한 전러시아 특별위원회, 통칭 체카가 설립되었다.1918년 3월 3일, 볼셰비키가 독일 제국과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하자, 그동안 갈등을 빚어왔던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은 물론이오, 볼셰비키를 지지했던 좌파 사회혁명당과 아나키스트 세력과의 관계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체카 창설 초기에는 좌파 사회혁명당 세력도 참여하고 있었지만, 1918년 8월 30일에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파니 카플란이 레닌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벌어지면서[5] 체카는 본격적으로 사회혁명당 전체, 녹색군[6], 흑위대[7]와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8] 같은 아나키스트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체카는 적색 테러와 같은 내부 탄압, 탈영병 색출 및 처형, 철도에 대한 방해 공작 예방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했고, 어느 정도 전황이 안정되자 방첩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이후 1922년 2월 6일, 조직 개편을 통해 인민위원회의 직속에서 내무인민위원회 예하 국가정치국으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진 후, 체카는 크렘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전러시아 보험회사의 소유였던 건물을 본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건물은 훗날 루뱐카로 알려진 소련 비밀경찰 본부의 상징이 되었다.
3. 의의
체카는 반대 세력을 탄압한다는 점에서는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이었던 공안질서수호국, 통칭 오흐라나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체카는 단순히 내부 단속에서 그쳤던 오흐라나에서 더 나아가 반대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테러 전략을 구사했고, 특히 러시아 내전에서 적색 테러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반대파 정치인 암살, 즉결 재판과 총살 등 과격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반체제 세력을 단속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런 면에서 체카는 차라리 프랑스 혁명기 자코뱅파의 비밀경찰과 더 닮았다.[출처]체카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타 사회주의 계열 정당과는 다르게, 공산당을 철저히 혁명을 기획하는 조직으로 구축하고자 했던 레닌의 유산이었다.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 동안 체카가 보인 무자비함과 잔인한 처형은 프랑스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통치하던 시기와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시기와 별반 다를게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반대 세력을 체계적으로 제거한다는 점에서 체카는 러시아 내 다른 정당들이 갖추지 못했던 볼셰비키만의 이점이었고, 차르 일가 총살과 크론슈타트, 탐보프 반란 등에서의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수립할 수 있었다.
체카는 반대 파벌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반대 세력을 테러, 선동, 분열시키는 최초의 현대적 정치경찰이었다.
그러나 1922년 소비에트 연방(소련) 이 수립된 이후 증거에 의존하지 않으며 법률과 절차에 의거하지 않고 분노와 광기에 의한 무자비한 숙청이 문제됨을 인지하고 철저히 금지했다. 실제 6.25 전쟁(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저질렀던 즉결처분 (비투회) 를 보고 그 무자비한 대숙청을 저질렀던 스탈린 서기장 조차도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국군이 적에게 동조한 부역자 내지는 적에게 동조, 협조, 방조 내지는 정권에 위협이 될 것 같은 사람들, 지휘관에게 거슬리는 부하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즉결처분 방식을 두고 미국과 영국이 극렬하게 반발한 적이 있다. (서울 홍재리 집단총살 사건 참고)
[1] 브세라시스카야 츠리즈븨차이나야 까미시야 빠 바리볘 스 콘트르발류치에이 이 사바타졤.[2] 당시 국호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3] 혁명 당시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미온적이거나 중립을 지키거나 달관했던 이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혁명에 동참하지 않은 반동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치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평범한 노동자나 심지어 글도 모르는 촌구석 무지렁이 농부들이었다. 이를 영화화 한 것이 1992년에 개봉된 체키스트(The Chekist).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진 영화로 꽤나 충격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되는 인간을 살처분하는 광경에 보는 사람의 영혼이 피폐해질 정도다. 특히 처형 대상자들을 지하실로 데리고가 벌거벗겨서 총살시키는 장면과 시체들을 줄에 메달아 지하실에서 꺼내는 장면들은 매우 잔혹하다.[4] 소련 장관회의의 전신이 되는 조직이다.[5] 해당 암살 시도로 레닌은 중상을 입었고,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6] 곡물 징발에 반발한 농민이 주축이 된 무장 단체.[7]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자체적인 무장 집단인 적위대를 유지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 전역에서 만들어진 아나키스트들의 무장 단체였다. 이후 체카와의 지속적인 충돌로 인해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하고, 나머지는 후에 흑군에 흡수된다.[8] 네스토르 마흐노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 지역의 흑위대를 중심으로 결성한 무장 단체로 사실상 흑위대를 계승했으며, 흑위대보다 수는 적었던 대신 더욱 잘 조직되어 있었다. 흑군의 이러한 조직 구조는 이후 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들의 민병대에 영향을 준다.[출처]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혁명 1917-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