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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대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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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대만

1. 개요2. 역사
2.1. 국부천대 이전2.2. 국부천대 이후2.3. 종결
3. 그 외의 세력
3.1. 봉천군벌3.2. 중국공산당(국공내전)3.3. 성스차이 군벌
4. 관련 문서

1. 개요

소련국부천대 이전 중화민국, 그리고 대만의 관계를 다루는 문서.

2. 역사

2.1. 국부천대 이전

1913년 중화민국과 러시아 제국이 수교했다.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제3세계민족주의를 지원함으로써 고립을 벗어나려고 했고 이는 쑨원국공합작 노선과 일치했다. 이에 소련은 군사고문 등을 내전상황의 중국에 파견했는데 이 관계는 장제스 집권기까지 지속되었다.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국공합작을 깨고 국민당내 공산당원을 숙청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냉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과의 관계는 깨지 않았다.

소련은 국공 양당이 치열하게 싸우는 1920-30년대에 중국국민당에게는 미하일 보로딘을 파견하여 국가 대 국가의 지원을 해 주었고 중국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을 통한 당대당의 지원하는 등 양측 모두와 관계를 유지했다.

소련은 블라디미르 레닌 이후 일국사회주의론을 펼쳤기 때문에 실리적으로 쑨원 사후 중국국민당의 주도권을 쥐게 된 장제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오히려 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을 경계했다.

1927년, 1929년 두 번 단교했는데 1927년에는 국민당이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폭동을 소련의 사주라고 비난하면서 단교했고 1929년에는 중동로 사건 때문이다. 1932년 외교 관계를 재개했다.

소련의 국민당, 공산당과 동시에 유지해 온 우호관계는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으로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이 사망하면서 파국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화민국과 소련은 1945년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었으며 1946년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중화민국은 몽골의 독립을 승인하였지만 1953년 철회하였다.

1946년 소련은 점령 중이던 만주를 원래 중화민국에 반환해야 했지만 공산당에게 넘겼고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을 지원함으로서 양국 간의 관계는 다시 약화되기 시작했다.

2.2. 국부천대 이후

결국 국공내전의 승자는 공산당이 되었고 중국 대륙을 잃은 중화민국과는 1949년에 단교하고 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승인했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소련은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당시에는 중국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으며 1954년 미중상호방위조약[1]이 체결되자 이를 비난했다. 대만도 소련을 아구(俄寇)[2]라는 멸칭으로 불렀고 중국을 소련의 앞잡이, 괴뢰라고 비난했으며 소련을 괴뢰 정권 중국을 내세워 중국 대륙을 강점한 침략자로 규정했다.[3][4] 대만은 중소우호조약 위반과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 지원을 문제삼아 소련을 유엔에 제소하기도 했으며 유엔 총회는 소련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유엔총회결의 505호 소련의 위성국이던 몽골 인민공화국도 1945년 독립을 인정했지만 소련과 단교한 후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승인을 취소해 버렸다. 대만에서 반공항아(反共抗俄)[5]라는 선전문구가 나올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 장제스가 직접 작사한 중공과 소련을 비난하고 대륙을 수복하자는 내용을 담은 노래인 반공복국가도 있으며 중국에 대한 소련의 침략 행위를 다룬 중국안의 소련이라는 책도 출판되었다. 1950년대부터 소련은 중화민국을 유엔 회원국에서 배제해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중소관계가 악화된 1970년대까지도 이 문제에 한해서만큼은 중공 편을 들어주었다. 결국 1971년 대만은 유엔에서 상임이사국 자리와 중국 대표권을 잃고 쫓겨나듯 탈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파탄난 중국이 미국과 접촉하며 관계를 개선하자 대만과 소련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기도 했다.[6] 소련은 일본, 홍콩, 서독, 동유럽 국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만과 무역을 하기도 했다.

소련 말기인 1990년모스크바-타이베이 항공노선개설협의를 맺으면서 소련이 아에로플로트 관계자들을 대만에 파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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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종결

소련 붕괴 이후 소련과 대만과의 관계는 러시아-대만 관계로 승계되었다.

3. 그 외의 세력

3.1. 봉천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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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중국공산당(국공내전)

소련은 국공 양당이 치열하게 싸우는 1920-30년대에 중국국민당에게는 미하일 보로딘을 파견하여 국가 대 국가의 지원을 해 주었고 중국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을 통한 당대당의 지원을 했다. 한마디로 양다리를 걸쳤다.

소련은 블라디미르 레닌 이후 일국사회주의론을 펼쳤기 때문에 실리적으로 쑨원 사후 중국국민당의 주도권을 쥐게 된 장제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오히려 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을 경계했다.

1932년 외교 관계를 재개했는데 소련의 국민당, 공산당에 대한 양다리 관계는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으로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이 사망하면서 파국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일본 제국의 패배 후 소련이 만주를 점령했는데 1946년 중화민국에 반환해야 했지만 공산당에게 넘기고 국공내전에서 사실상 공산당의 편을 들어줬다. 결국 국공내전의 승자는 공산당이 되고 중국 대륙을 잃은 국민당과는 1949년에 단교하고 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승인했다.

3.3. 성스차이 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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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동튀르키스탄을 다스린 성스차이 정권은 명목상 국민당 정권에 충성했지만 치세의 상당 기간 동안 적극적인 친소 정책을 펼쳤다. 당시 신장은 중국보다는 소련[7]과 훨씬 경제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성스차이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선택이기도 했다. 성스차이 정권은 소련의 튀르크어 학자 세르게이 말로프의 도움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민족 분류법을 신장에 도입했는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 후 중국 전역에서 여러 소수민족을 분류하는 방식의 근간이 되었다.

성스차이는 14개 민족 분류를 바탕으로 각 민족들에게 신장성 의회의 대표권을 할당했는데 당시에는 아직 위구르인 인구가 한족 인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소련처럼 레닌주의 방식에 입각한 민족 자치구역 할당까지는 진행되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성스차이는 자신이 다스리던 신장성을 동튀르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구성국으로 편입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명목상 국민당 정권에 충성하던 성스차이는 소련하고만 줄타기한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도 끌여들었으며 중국공산당과도 친교 관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을 꿀보직인 재정청 부청장에 임명하였고 마오쩌민은 신장에서 소련 공산당과 옌안의 중국공산당을 연결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던 중 독소전쟁이 벌어지고 소련이 전쟁 초반부 나치 독일에 대패하자 성스차이는 소련이 패망을 앞두었다고 보고 국민당에 협조할 목적으로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을 벌여 대대적인 공산당원 숙청 작업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친동생 마오쩌민이 사망하고 말았다. 마오쩌민을 죽인 성스차이는 국공내전 종료 이후 대만으로 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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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중'은 중화민국, 즉 대만을 뜻한다.[2] 러시아 도적[3] 미국도 동조하여 1951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였던 딘 러스크는 중국을 슬라브만주국(Slavic Manchukuo)이라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한국 반공 노래인 '중공 격멸의 노래'에서도 '소련 압재비 오랑캐'라는 가사가 나온다.#[4] 대한민국이 동시기 북한을 소련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하며 북괴라고 부른 것과 비슷하다. 다만 대륙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반소 감정은 당시 대한민국보다 훨씬 심하다고 할 수 있다.[5]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러시아(소련)에 항거한다.[6] 사실 1960년대까지 중공 견제를 위해서 비공식 접촉을 이어간 적이 있었다.[7] 정확히 말하자면 소련의 중앙아시아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