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소련 요리(영: Soviet cuisine, 러: Советская кухня)는 소련에서 먹던 요리로, 당대에는 15개 구성국에서 먹던 요리들을 전부 포괄해서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소련 붕괴 후에는 당시 대중 식당에서 판매하던 음식들[1]을 소련 요리로 일컫는 경우도 많다.세계 최대의 영토, 그리고 척박한 토양과 혹독한 기후,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 탓에 소련은 유통 인프라가 좋지 못했고 지역에 따라 신선한 식재료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곳이 다수 있었던 관계로 대체로 단출한 재료로 음식을 풍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2] 이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요리책으로 <맛있고 건강한 음식에 대한 책(Книга о вкусной и здоровой пище)>이 있다.
그래서 소련 요리 하면 가정식이나 단촐한 간편식만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각 구성국과 민족들이 지닌 독특한 식문화들과 30년대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식문화 개선 사업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현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다양한 궁중 요리들이 실전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인들이 자기들의 문화에 갖는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러시아 제국의 대귀족과 황족들이 향유하던 고급 식문화는 혁명 이후에도 대체로 보존이 잘 이뤄진 편이었다.
여성들의 가사 노동량을 줄이고 노동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소련 정부는 구내 식당을 설치하고 공영 세탁소와 세탁물 배달 서비스 같은 것도 제공했지만 소련의 기혼 여성들은 구내 식당인 스탈로바야보다는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고 싶어 해서 스탈로바야를 가는 것보다는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했고 각종 조리 도구와 그릇, 냄비, 오븐, 가스레인지 같은 조리 기구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고급 식당은 가격도 높고 이용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집안의 경사나 파티, 중요한 일이 있으면 집에서 치르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 때문에 소련 정부의 의도와는 다르게 가정에서 식사하는 가정이 많았다.
이 상황에서 소련 정부는 대약진운동 시기의 중국 정부처럼 개인 취사를 금지하는 미친 짓을 하는 대신 기혼 여성들의 요구를 수용해 각종 조리 기구와 가전 제품의 증산, 품질 향상, 식자재 제공을 위해 노력했는데 여성들의 기준을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제 침체기 이전까지는 계속 개선이 이뤄졌다. 실제로 열량 섭취량 측면에서 소련 인민들은 브레즈네프 정권 말기까지 미국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열량을 섭취했고 경제 침체에 들어간 1982 ~ 1983년에도 미국보다 약 200 ~ 300 칼로리 정도 적은 수치의 열량의 음식을 먹었다.
이러한 소련 여성들의 성향이 미 · 소 간의 냉전에 이용된 적도 있었다. 1959년에 모스크바에서 엑스포를 개최한 미국 정부는 독소전쟁으로 성비가 망가져서 여성 인구가 훨씬 더 많았던 소련의 상황을 이용해 내부에서 소련을 흔들고 체제 우위를 선전하려고 했다. 미국 정부는 가전 제품 전시회를 열어 미국의 최첨단 과학 기술이 적용된 가전 제품과 조리 기구들을 전시해 소련 여성들이 박탈감과 소련 정부에 대한 불만을 느끼게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미국 정부는 실험실에나 있던 로봇 청소기와 도우미 로봇까지 끄집어 내서 모스크바로 가져왔다. 미국 정부의 의도를 알아챈 소련 정부는 가전 제품 전시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 꽤나 마음을 졸였으며 미국의 체제 선전을 불편해했던 흐루쇼프는 닉슨에게 여러 번이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소련 정부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소련의 여성들은 미국의 최신 가전 제품에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지만 이 당시에는 급여와 주택, 식료품을 비롯한 민간경제사정이 확기적으로 개선될 시기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관람객들은 지금처럼 노력하면 언젠가는 소련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소련은 미국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어두운 암흑기에 빠지게 되었다.
1.1. 외식 문화
소련에는 다양한 요리점들이 존재했다. 바, 클럽, 칵테일 바, 펍처럼 주류를 제공하는 주점, 다양한 규모의 카페, 음료와 과자, 빵을 취급하는 제과점, 과자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벡을 비롯해 민족 요리를 취급하는 음식점도 있었으며 극장이나 당구장, 영화관 같은 곳에서도 뷔페나 식당을 운영했다.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맥주를 취급하는 야외 노점들도 있었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볼 법한 구조를 지닌 식당들도 있었다. 도시에서 펠메니를 비롯한 만두를 파는 가게들도 있었는데 일종의 패스트푸드점으로 기능했다. 카페에서는 차와 커피 같은 음료 외에도 간단한 전채 요리와 샌드위치를 취급했으며 허가를 받은 경우에는 주류나 담배도 판매했다.계획경제 국가였던 소련은 물자 공급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정해 두고 있었고 이는 식당들도 피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그래서 지역별로는 양대 수도의 식당들이 최우선적으로 식자재를 공급받고 대도시와 소도시, 지방 도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식당의 '수준'에 따라서도 공급 순위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고급 식당들이 가장 먼저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소련의 식당들은 감독관들의 감사를 받아 식자재의 관리 현황과 조리법의 준수 여부를 확인받았다.
전반적으로 소련 식당들의 서비스는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러한 문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이후가 되어서야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식당 건물의 건축 양식, 인테리어도 밋밋하고 장식이나 포스터 같은 것도 선전적이거나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게 많았다. 게다가 스탈로바야를 제외한 식당이나 다른 주점, 카페들은 그 숫자가 부족했는데 주택이나 다른 인프라들의 건설이 우선적으로 이뤄지고 식당과 카페 같은 시설들은 우선 순위에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련에서 카페 문화나 외식 문화는 잘 성장하질 못했다.
반면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위시한 코메콘 국가들은 사정이 훨씬 나아서 코메콘 국가들로 해외 여행을 간 소련인들은 자국과는 다른 분위기의 식당, 문화 시설에 큰 자극을 받고 호평을 남기기도 했다. 일부 소련 건축가들이 폴란드의 카페나 식당에서 좌담을 나누고 식사를 했던 경험을 살려 새로이 '폴란드식' 건축 양식을 적용한 건물을 지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소련 수뇌부들의 보수주의와 고루한 인식 때문에 새로운 혁신을 건축계 전체에 퍼뜨리지는 못했다.
프랑스 혁명 후 귀족 가문과 왕실 소속의 요리사들이 식당을 세워 프랑스 요리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소련에서도 황실 요리를 취급하는 고급 식당(ресторан)들이 성업을 이루어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다만 물가와 외식비가 저렴한 소련에서도 고급 식당들은 가격이 높아서 특별한 일이나 접대를 할 때나 갔고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만한 곳은 아니었으며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그 소련에서 드레스 코드를 적용해 손님들을 돌려보낼 권한이 있었다. 그래서 급여가 높은 전문직 종사자, 인기가 좋은 배우, 작가, 언론인 같은 이들이 주로 고급 식당을 이용했다.[3]
문제는 급여 체계와 계획 경제의 문제점, 관리 · 감독의 부족으로 인해 고급 식당임에도 서비스가 나쁘거나 요리의 품질과 조리 시간이 오락가락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다. 소련의 경제 성장율이 낮아지고 부패가 심화되던 시기부터는 블랴트나 인맥, 권력을 이용해 자리를 선점한 사람들 때문에 돈이 있더라도 이용을 못 하는 경우가 있었다. 때로는 클럽의 기도마냥 손님들을 쳐내던 지배인의 눈에 찰 정도의 돈을 찔러준 끝에 겨우 입장해 자리에 앉은 뒤 자신이 차르인 것마냥 손님들을 무시하는 종업원들에게 재차 뒷돈을 제공해야 겨우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4]
1960년대 말 ~ 70년대 초부터 이런 문제를 풍자한 장면을 삽입한 코미디 영화나 부패 관료, 조직 범죄자들이 고급 식당을 이용하는 장면을 묘사한 범죄 수사 영화가 나올 정도로 고급 식당의 서비스와 이용객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지만 인테리어가 좋고 분위기가 고급스러우며 메뉴도 기본적으로는 고급 요리 위주였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에게 고급 식당들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즉, 결혼식 · 생일 · 집안의 경사 · 진급 같은 특별한 일을 기념하거나 파티를 하기 위해 가족이나 연인과 갈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고급 문화 공간이면서 타락한 고위 공직자와 조직 범죄자, 부유한 노멘클라투라들이 아니면 뒷돈을 써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부패의 온상이었다.[5]
소련의 식당을 대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탈로바야(Столовая, 구내 식당)일 것이다. 소련 정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식생활 개선과 건강 증진을 도모하고 노동자들이 식사 및 도시락 준비, 설거지 같은 번거로운 일에서 벗어나 여유 시간을 누리고 휴식 시간을 갖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대규모로 구내 식당을 설치했다. 구내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나름대로 양질의 식단을 제공하면서 도시 노동자들의 식생활도 크게 개선되기 시작했다.[6]
스탈로바야는 다양한 요리들을 진열해 둔 뷔페로서 손님이 진열된 요리들에서 원하는 요리를 선택해 식대를 치른 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는 방식이었다. 스탈로바야의 식단은 식재료의 변동이나 식당의 사정에 맞춰 매일 바꾸거나 미리 준비해 두는 식이었지만 운영 기관에서 식단을 관리했기 때문에 어느 구내 식당을 가든 메뉴가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이용 시간은 24시간이거나 주변에 존재하는 기업이나 관공서의 휴식 시간에 맞춰서 시간을 정하기도 했다. 일반 시민이나 여행객들도 충분히 이용이 가능했지만 일부 스탈로바야는 기업의 직원 식당으로만 운영되어서 일반인들의 이용을 제한하기도 했다.
스탈로바야의 요리는 신속하게 조리되었고 품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 소련인들은 메뉴가 고정적된 경우가 많다보는 점때문에 몰린다는 불평을 종종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단돈 50코펙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식사를 할수 있었기 때문에 애용하곤 했다. 주로 러시아와 캅카스 요리를 취급했고 프랑스 요리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요리의 영향을 받은 음식들도 있었다. 의외로 중앙아시아 요리들은 주로 해당 요리를 취급하는 식당에서 취급했다.[7]
1.2. 식재료
소련은 연방 구성국들이 지역 환경과 특성에 맞춰 산업을 특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식품 산업도 이에 영향을 받아 지역별로 특산물처럼 취급되는 식료품과 음식들이 많았으며 품질과 수량도 모두 상이했다.- 치즈와 버터, 맥주 중에서 고급품은 주로 리투아니아, 홍차는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와인은 몰도바, 그루지야,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브랜디는 아르메니아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이 유명했다. 특히 맥주의 경우 소련 전역에서 무려 350여종에 달하는 맥주를 생산할 정도였다. 대중적인 맥주 브랜드로는 지굴룝스코예, 레닌그라드스코예, 모스콥스코예 등이 있었으며 이 중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지굴룝스코예는 소련 붕괴 후 다양한 브랜드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8]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는 소비재 부족과 경제난, 금주법으로 인해 주류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가정에서 과시 목적으로 맥주 캔을 인테리어로 장식하는 일도 있었다.
- 러시아인들이 즐겨 마시는 홍차는 19세기 후반까지 청나라에서 수입하다가 1900년대 초에 들어서 조지아에서 고품질의 차를 대량 재배하는 데 간신히 성공하여 소련에서도 어느 정도 자급할 수 있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와 주변국에서는 조지아산 홍차, 리투아니아산 버터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중세부터 단맛에 환장하던 러시아인들의 기질은 소련 시기에도 계속 이어져서 소련인들은 겨울만 되면 다차에 가서 잼과 다양한 음식들을 만들곤 했다. 한국인들이 겨울에 김장을 담그듯 소련인들도 겨울에 잼을 만들었기 때문에 겨울만 되면 설탕과 과일 수요가 폭증해서 소련 정부에서 제대로 공급을 못해줄 지경이었다. 소련의 농축산물 수입이 급증하기 시작한 70년대부터는 쿠바 같은 우방국이나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설탕을 수입하곤 했는데 그 구매량이 매년 상이하고 시기도 특정할 수가 없어서 소련이 국제 시장에서 설탕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국제 설탕 시장이 교란되어 설탕 가격이 심하게 요동쳤고 세계 각국들이 짜증을 많이 낼 정도였다. 다만, 쿠바를 위시해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한 국가들은 소련 덕분에 설탕 가격이 폭증해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 "샴페인"이 흥하기도 했다. 일명 '소볘츠코예 샴판스코예(Советское шампанское, 소비에트 샴페인)'라고 진짜 프랑스 샴페인은 아니고 이름만 빌려 온 스파클링 와인이긴 했지만 말이다.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이 "귀족들이나 즐기던 사치품을 인민 대중에게도 공급해야 한다"며 대중화를 추진한 것이 시초로[9] 질보다 양에 집중하긴 했지만 여차여차 대량 생산에 성공했고 이후 널리 퍼져서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생산은 소련 붕괴 후에도 계속 이어진 모양인지 2021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안에서만 생산된 제품에 대해서만 샴판스코예(샴페인)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명령하여 원조 샴페인 생산국인 프랑스가 반발하는 일도 있었다.
- 고기, 치즈, 버터, 우유 같은 축산품은 1950년대 중반부터 비교적 흔한 식재료가 되었지만 막상 구하려면 유통 시스템의 문제로 지방 국영 상점에서 생고기를 구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였고 기본 가격도 다른 식자재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그래서 소비재 공급이 상대적으로 좋은 양대 대도시(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그 밖의 주요 대도시가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육류를 풍족하게 구하고 싶으면 집단농장 농민 시장에서 몇 배의 돈을 주고 비싸게 사야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도시에서도 콜호즈 시장에 가서 육류를 구매하곤 했다.[10]
식당에서는 미트볼, 깔바싸, 피로시키, 보르시, 샤슬릭 같은 고기 요리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통조림과 냉동식품도 비교적 흔했기 때문에 육류는 통조림이나 소시지 같은 가공 식품, 냉동 식품의 형태로 섭취하는 비중이 상당했던 편이다.
- 추운 기후와 육류에 대한 높은 선호도 때문에 소련인들의 육류 수요는 대단히 높았다. 그래서 육류 공급은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던 중대 사안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육류의 소매 가격을 동결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축산 농가에 보조금을 주며 생산을 장려하는 지원 정책과 가축 두수가 감소하면 지원금을 삭감하고 징계를 먹이는 정책을 병행할 정도였다.
소련 정부의 육류 가격 동결 조치로 인해 축산업의 채산성이 계속 떨어져서 축산 농가에서는 어려움을 호소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일반인들이 국영 상점에서 구매하는 '소매 가격'은 낮게 유지하고 축산 농가로부터 육류, 축산품을 구매하는 '도매 가격'은 인상해 주었는데 가격 격차 문제로 인해 소련 정부는 육류 공급 부문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해야 했고 1970년대에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을 채우기 위해 아르헨티나, 호주 등지에서 육류, 치즈, 버터 같은 축산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일 머니가 풍족하던 70년대의 소련은 세계 농축산물 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했고 아르헨티나와 호주에서는 미소관계의 냉각으로 무역 금수 조치가 떨어지면 늘 미국에게 불평했으며 더러는 미국을 배제하고 소련과 단독으로 거래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 소련인들은 고기 요리는 그런대로 먹었지만 생선 요리는 신선도가 떨어져서 비린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선호도가 떨어졌다. 여기에는 소련의 지리 특성상 음식 문화가 주로 대륙권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역사가 길다 보니 해안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해물 요리가 생소했던 탓도 있었다.
이 점은 소련 수뇌부에서도 알았던지라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에 오케안(Океан)이라고 이름 붙인 생선 공급 유통망을 조직하여 이전보다 품질이 좋은 수산물을 대량으로 공급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오케안 점포들이 개점하자 소비자들이 진열대의 상품들을 싹쓸이할 정도로 오케안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과 재화가 공급되는 점과 수산물 어획량에 대한 회계 처리와 감독이 느슨하다는 점을 노린 부패 관료, 당 간부들이 여기에 개입하면서 모든 계획이 뒤틀려졌다.
이 '생선 마피아'들은 어선에서 항구로 선적되는 수산물 상자의 무게를 몇 킬로그램씩 높이고 팔리지도 않은 수산물이 수백 톤씩 판매되었다고 허위로 장부를 기재해 수익금과 물품들을 빼돌렸는데 이렇게 빼돌린 물품들은 박스갈이나 택갈이를 해서 서방에 밀수하거나 블랴트(암시장)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 불법적인 루블, 외환 거래가 이뤄졌으며 수백 명이 넘는 관료와 당 간부들이 여기에 개입했다. 이 일은 오케안의 지점에서 점원이 실수로 택갈이를 한 통조림을 고객에게 판매한 것 때문에 꼬리가 잡힌 것을 시작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전부터 고위 공직자들의 뇌물 수수 사건을 조사하던 소련 검찰은 오케안에 수사를 집중해 약 200명의 공직자를 체포, 기소했고 이 사건에는 물고기 재판(Рыбное дело)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재판에서 많은 이들이 중형을 선고받았으며 수산부 차관 블라디미르 리토프는 총살당했지만 최고 책임자인 수산부 장관 알렉산드르 이시토프는 브레즈네프의 보호를 받아 장관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처분만 받았다.
- 소련에서는 껌이 197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지 않았다. 원래 소련은 껌을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 금기시했으며 껌이 있더라도 죄다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많은 청소년들이 관광객들에게 껌 좀 달라고 구걸을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11] 당시 껌을 구할 수 있던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하는 데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대외 방문객들을 고려해 1976년부터 껌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소련 전역의 상점에 껌이 공급되기 시작했지만 맛이 빨리 사라지고 단단해서 서방 국가의 추잉 껌보다 질이 낮았고 껌 1통(5개 단위)의 가격도 50코펙(0.5루블)[12]이라 소련 아이들에게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1980년대의 소련 아이들은 껌을 통으로 사기보다 낱개로 사서 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소련에서는 '게마토겐(Гематоген)'이라는 이름의 에너지바가 큰 인기를 끌었다. 게마토겐은 바닐라 향이 나는 바처럼 생겼고,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동구권 사람들에게 선호되던 맛인 탓도 있지만, 기능성 식품이라는 점 덕택에 게마토겐은 달달한 자양강장제 취급을 받으며[13] 어린이와 성인 모두가 즐겨 먹는 간식 대접을 받았다. 철분이 워낙 많이 들어있어 먹고 나면 비릿한 철분 뒷맛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철분을 공급하는 원재료가 소의 피(선지)였던지라 해외에서는 엽기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게마토겐은 지금도 동구권에서 널리 팔리고 있으며, 소의 선지도 여전히 들어간다. 단단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탈리아 요리 중 상귀나치오 돌체(Sanguinaccio dolce)와 매우 유사한 음식이다.
-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경제 사정이 크게 나빠지면서 식료품 부족 현상이 자주 일어나자 당시 소련에서는 부족한 식량 사정으로 인해 다른 생필품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었던 마카로니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다만 실제 시중에 유통되었던 제품의 품질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소련인들 사이에서는 마카로니가 저렴하고 풍족한 이유는 사실 군용 탄피를 만들던 기계로 만들어서 그렇다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 소련의 패스트푸드는 한동안 음료를 탄산이 아닌 주스로 제공했는데 미국에 대한 적대감 때문만으로 수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소련 정부 입장에서 수입하거나 생산권을 구매하기에는 가격부터 시작해서 부담스러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식품들처럼 국산화를 시도하여 조지아산 차로 대체하여 새로운 유형의 탄산음료를 만들려고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출시가 무산되었다.
이후 미국의 콜라는 1959년에 소위 '부엌 논쟁'이라고 불리는 리처드 닉슨과 니키타 흐루쇼프의 설전이 있었던 모스크바 무역 박람회에 참여한 펩시가 흐루쇼프에게 자사의 제품을 권하면서 다시 소련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콜라를 마시는 사진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이 일은 파급력이 상당했지만 정작 수입과 생산은 지지부진해서 펩시는 1974년이 되어서야 노보로시스크에 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 사족으로 미국 회사 입장에서 소련 루블을 이용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펩시는 대금을 보드카로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인들은 냉전 말기까지 콜라는 펩시만 마셨고 코카콜라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인 1986년부터 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만 보면 소련에는 제대로 된 탄산음료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련 정부는 60 ~ 70년대부터 유칼립투스와 카르다몸으로 맛을 낸 '바이칼'을 비롯해 다양한 탄산음료들을 생산하여 인민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소련인들에게 탄산음료 자체는 생소한 음료가 아니었다. 소련 정부가 50년대 말부터 자판기의 보급을 추진하고 소매점에도 탄산수를 비치해 두었기 때문에 소련인들은 시판 중인 탄산 음료 외에도 가정에서 만든 것이나 소매점에서 구한 에이드를 탄산수에 섞는 식으로 탄산 음료를 만들어 마시곤 했다.
- 이탈리아 요리의 경우 마카로니는 이미 18세기에 유입되었고 러시아식 만두인 뻴메니도 이탈리아의 토르텔로니가 현지화된 것이다. 파스타는 마카로니처럼 제정 시기에 유입되었지만 대중화는 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이뤄졌다. 이탈리아 칼초네 피자가 현지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체부레크(Чебурек) 같은 것도 있는데 의외로 피자는 유입되지 않아서 피자가 뭔지 모르는 이들이 많았고, 안다 해도 생김새의 유사성 때문에 토마토 소소를 첨가한 하차푸리(조지아식 치즈빵)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계기로 피자가 소련에 유입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3. 소련 요리와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의 외식문화나 간식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아나스타스 미코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흔히 미코얀은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대에 걸쳐 오랫동안(일명 "일리치부터 일리치까지"[14]) 소련 정치에서 활동한 원로 정치인으로 유명하다.[15] 하지만 1926년부터 무역인민위원(무역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붉은 상인"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소련 무역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으로부터 랜드리스 수급을 총괄하면서 소련군 보급 문제를 해결하여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미코얀은 식품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미국 등 선진국들을 방문해 많은 식품 생산 시설과 기계를 외국으로부터 들여 놓았고 러시아 전통 식품 말고도 다른 문화권과 국가의 음식들도 소련에 많이 도입했다. 미소관계가 개선된 1930년대 중반에 미국을 방문한 그는 소련에서는 생소한 음식이었던 도넛과 햄버거, 바, 각종 포장 식품과 통조림, 시리얼, 팝콘, 주스, 연유와 분유, 소시지, 케첩, 러시아인들이 죽고 못 사는 마요네즈까지 엄청하게 다양한 식품을 소련에 소개하고 그 조리법과 제조 기계를 도입하여 식료품의 품질과 생산량을 개선했으며 아이스크림 생산 시설도 현대화하여 대량 생산 시스템을 확립시켜 놓았다.[16]
여기에 급식 제도의 정비에도 기여했으며 요리책도 손수 출판했다. 오죽하면 스탈린도 미코얀을 보고 "당신은 공산주의보다 아이스크림에 더 관심이 많다."며 농담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만 아니었으면 맥도날드가 성업하기 훨씬 이전에 맥도날드만한 패스트푸드점이 소련에서 탄생했을 것이라는 농담 섞인 예측도 나올 정도다.[17]
도입 과정에서 현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미국의 오렌지 주스에 큰 감명을 받은 미코얀은 소련에서도 오렌지 주스를 생산하고 싶었지만 소련은 한대 기후가 중심이어서 열대 작물인 오렌지를 재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련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과로 대체하여 주스를 생산하고 유치원과 학교와 같은 교육 시설에 급양하여 자라나는 아동, 청소년들에게 추가적인 영양을 제공하려고 했다. 이후 개량과 개선을 거듭하고 종류를 다양화하여 사과와 토마토[18]외에도 배 주스와 자두 주스도 개발해 보급했다. 미코얀이 영향을 미친 급식 시스템이나 요리책은 1980년대까지도 소련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쳐 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도 구 소련 15개국에는 미코얀이 남겨 놓은 유산이 지대하게 남아 있다.
2. 관련 문서
- 소련/문화
- 러시아 요리
- 벨라루스 요리
- 우크라이나 요리
- 몰도바 요리
- 에스토니아 요리
- 라트비아 요리
- 리투아니아 요리
- 조지아 요리
- 아르메니아 요리
- 아제르바이잔 요리
- 카자흐 · 키르기스 요리
- 투르크메니스탄 요리
- 타지키스탄 요리
- 우즈베키스탄 요리
[1] 한국으로 치면 분식집이나 백반집 정도.[2] 소련 후기를 기준으로 하자면 빵과 버터, 우유, 기름이나 통조림, 국수류는 매우 흔했고, 간식류 역시 흔하게 볼수있었지만, 생고기나 비싼 햄같은것은 지방상점에서 줄서가면서 사야하거나 시장에서 웃돈을 줘가면서 사야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신선채소류 역시 비닐하우스같은 온실 시설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지 않던 관계로 제철이 아니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고르바초프 말기에는 대도시 지역에서도 줄을 서가면서 사야되는 것이 일상적이게 되었다.[3] 작가와 배우 같은 예술인들을 위한 전용 식당도 존재했다. 일반인이 이런 식당을 이용하려면 인맥이나 뒷돈을 써야 했다.[4] 기본 급여가 낮은 식당 종업원들은 이런 '팁'을 받거나 남은 음식들을 챙겨갈 수 있어서 많은 돈을 벌거나 고급 요리를 마음껏 먹는 이들도 있었다.[5] 경우에 따라서는 고급 식당에 가는 행위 자체를 부도덕한 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도 내심 고급 레스토랑을 선망의 대상으로 인식했다.[6] (출처) What was it like eating out during the Soviet Union? (영어) (소련에서 식사하는 일은 어땠을까?), Anna Sorokina, Russia Beyond (RBTH), 2018년 12월 11일.[7] 물론 프랑스 요리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해도 흔히 떠오르는 고급스러운 요리들은 비싼 레스토랑에 가야 맛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 팔았던 프랑스식 요리들은 샐러드와 커틀릿류가 일반적이었다.[8] (출처) Soviet hangover: How people drank beer in the USSR (영어) (소련의 숙취: 소련인들은 맥주를 어떻게 마셨을까), Eleonora Goldman, Russia Beyond (RBTH), 2017년 7월 28일.[9] 같은 논리로 와인, 보드카 등도 대량 보급되었다.[10] 공산주의 유머에 나오는 "소시지 열차"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11] 이와 관련된 일화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6월 미육군 항공군 폭격기 부대가 독일 폭격 작전을 위해 소련 비행장에 잠시 머물렀을 때 폴타바를 방문했던 미 공군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이 현지 방문 및 전시 선전을 겸해 껌을 나누어주자 당시 소련 아동들이 이를 즈바츠카(жвачка)라고 부르면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공보영상 (25:11부터)[12] 소련에서 50코페이카는 값싼 담배 1갑을 사거나 영화를 1번 보거나 군것질거리를 여러 개 사먹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소련 아동들에게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13] 심지어 소련 시절에는 약국에서 일반의약품으로 판매하던 물건이었다.[14] 그러니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부터 레오니드 일리치 브레즈네프까지.[15] 여담으로 동생인 아르툠 미코얀은 군용 항공기 설계국 미그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16] 시카고의 소시지 생산 공장을 시찰한 뒤에 미국식 소시지를 현지화한 의사 소시지(Докторская колбаса. 독타르스카야 깔바사)도 개발해 보급했으며 오늘날 러시아에서 소련 시절을 그리워할 때 흔히 언급되는 플롬비르(Пломбир)[19]란 아이스크림도 이때 미국에서 도입된 레시피를 그대로 사용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다. 실물 사진[17] 소련에도 햄버거는 상륙했지만 크게 유행하지 못해 주로 냉동식품으로 취급되거나 소수의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맥도날드가 진출하면서 햄버거가 이전보다 더 많이 퍼지기는 했지만 1990년대 자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햄버거가 간단한 한 끼 식사거리로 취급된 것은 아무리 길게 봐도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18] 토마토 주스는 처음에는 그리 인기가 없었지만, 건강식이라는 인식을 퍼트려서 인기가 높아졌다.